FeverStory

청연재비록

25화

내명부 회랑은 해질 무렵의 붉은 빛이 반쯤 물러나고 어둠이 회벽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채연이 품에서 어머니의 수기를 꺼냈다. 손가락이 마지막 장을 펼쳤다. 먹빛 행간의 끝, 어머니의 필체가 아닌 붉은 글씨가 있었다.

「청사, 북문 외곽. 염수차로 위장. 강 도사가 주관함.」

이현이 고개를 숙여 그 글자를 읽었다. 관자놀이의 핏줄이 얕게 뛰었다.

“강 도사.”

“의금부 심문 때 의안을 압수했던 자입니다.”

채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손끝이 붉은 글씨 아래 작게 적힌 날짜를 짚었다. 경신년 시월 초닷새. 어머니가 의금부에 잡혀가기 이틀 전이었다.

이현이 몸을 일으켰다. 회랑 끝에서 대기 중이던 의금부 도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이 문서에 기재된 ‘청사’와 강 도사를 즉시 수사하라. 염수차 반입 기록부터 확인한다.”

도사가 수기를 받아 들었다.

“북문 외곽의 사설 약방은 이미 불에 탔사옵니다.”

“불타기 전에 드나든 사람은 있을 것이다.”

이현의 말투는 짧았다. 도사가 수기를 봉인함에 넣으며 허리를 굽혔다.

“수사 개시 명령을 하달하겠사옵니다.”

발소리가 회랑 밖으로 멀어졌다.

이현이 채연을 돌아봤다.

“내일 청문에서 이 수기를 직접 제시해 주시오.”

“그럴 생각입니다.”

채연이 수기를 품 안에 도로 넣었다. 오른손이 왼쪽 손목을 잡았다. 포승 자국 위로 손가락이 천천히 감겼다.

이현이 그 손을 보다가 말했다.

“강 도사가 의안을 압수하던 날, 당신의 수기를 노린 이유가 분명해졌군.”

“‘청사의’는 십 년 전부터 존재했던 조직입니다. 한씨 개인의 복수가 아닙니다.”

채연이 손목을 꼭 쥐었다.

“조직의 유통망이 궁 안까지 닿아 있었다면, 약방 하나가 불탄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어둠이 회랑을 완전히 덮었다. 등롱을 든 나인이 다가와 불을 밝혔다.

이현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내의원 정청으로 가겠소. 허 어의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요.”

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을 감았던 손이 풀렸다.

내의원 정청에는 촛불 여섯 개가 켜져 있었다. 전직 어의 셋이 좌측에 앉고, 현직 의관들이 우측에 자리했다. 정중앙의 좌대는 비어 있었다.

허 어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자주색 관복의 소매 끝이 가늘게 떨렸다. 손가락에 묻은 약재 가루 자국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이현이 상석에 앉자 허 어의가 정중앙으로 걸어나왔다. 발걸음은 느렸으나 구부정한 등이 평소보다 곧았다.

좌대 앞에 멈춰 선 그는 품에서 첨지 한 장과 별책 한 권을 꺼냈다.

“십 년 전, 선왕 시절. 소의 한씨의 고모 되는 후궁이 독초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소.”

촛불이 흔들렸다.

“나는 그 후궁의 탕약에 천오두가 든 것을 알았소. 그러나 어의원의 권위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의안을 조작했소.”

좌중이 술렁였다. 한 전직 어의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도로 앉았다.

허 어의의 손이 첨지를 들었다.

“이것은 십 년 전 내가 올리려다 찢어버린 ‘외청 약방 금지 건의’요. 사설 약방이 독초의 온상임을 알고도 묵살했소.”

첨지가 좌대 위에 놓였다. 이어 별책이 그 옆에 내려졌다.

“별책 의안은 공식 기록에서 지워진 열 명의 사망 원인을 내가 따로 적은 것이오. 원인은 모두 천오두 중독이오.”

허 어의가 채연을 향해 돌아섰다. 떨리는 손이 허리춤에서 동패 하나를 풀어내었다. 청동빛 패면에 ‘내의원 의안 열람’이라 새겨져 있었다.

“내가 틀렸네.”

손이 동패를 채연 앞으로 내밀었다. 손가락의 떨림이 동패에 부딪혀 작은 소리를 냈다.

“의녀에게 의안 열람권을 주는 것은 어의원 오백 년 관례에 없소. 그러나 오백 년 관례가 열 명을 죽였소.”

채연이 두 손을 내밀었다. 동패의 무게가 손바닥에 가라앉았다.

“내의원 관례가 아니라 의학적 사실에 따라 열람하겠습니다.”

허 어의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깊이 숙였다. 그가 좌대 앞에서 물러나며 자주색 관모를 벗었다.

“나는 오늘부로 어의원을 떠나오. 관록은 모두 내탕금으로 환수하시오.”

좌측에 앉았던 전직 어의 하나가 중얼거렸다.

“자네…… 정말 가려나.”

“이미 십 년 늦었소.”

허 어의가 정청 문을 열었다. 소매 자락이 마지막까지 바람에 흔들리다, 문밖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촛불이 반쯝 줄었을 무렵, 정청 밖에서 인혜의 발소리가 들렸다. 감색 당의 자락이 문지방에 닿기 전, 수행 상궁이 개정 규례 문서를 받쳐 들고 먼저 들어왔다.

인혜가 정청 중앙에 섰다. 왼손 엄지의 백옥 가락지가 촛불에 빛났다.

이현이 일어서며 말했다.

“주상궁께서 직접 오셨군.”

“허 어의의 빈자리를 채우는 규례가 있어서요.”

인혜가 문서를 펼쳤다. 상궁 특유의 낮고 또렷한 음성이 정청에 울렸다.

“내명부 규례 보충 제15조. 의녀의 공식 증언은 내명부와 어의원 합동 청문에서 증거 효력을 가진다.”

채연의 호흡이 멈췄다.

“제16조. 내명부 소속 의녀의 약재 감별서 및 독초 분석 보고는 어의원의 확인 없이 단독 증거 효력을 가진다.”

좌중의 의관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인혜는 멈추지 않았다.

“제17조. 의녀의 진단 권한은 정5품 의관의 권한에 준하여 행사될 수 있다.”

인혜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백옥 가락지를 천천히 빼내어, 개정 규례 문서의 마지막 장 위에 엄지를 눌렀다.

촛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문서 위에 찍힌 인주 속에서, 가락지 안쪽에 음각된 두 글자가 또렷이 드러났다.

「서의」

인혜가 문서를 들어 채연에게 보였다.

“네 어미의 이름으로 이 개정을 서명했다.”

가락지는 문서 위에 그대로 놓였다. 인혜가 이어 말했다.

“십 년 전 윤소영, 서의녀가 내명부에 제출한 보고서는 오늘부터 공식 증거로 인정된다.”

채연이 두 걸음 걸어 나왔다. 문서에 찍힌 어머니의 성씨를 한참 들여다봤다. 입술이 떨렸으나 소리는 없었다.

인혜가 조용히 덧붙였다.

“이 가락지는 더 이상 내 손에 있어선 안 될 물건이오.”

수행 상궁이 자주빛 보자기를 펴고 그 위에 가락지를 올렸다. 인주가 묻은 백옥이 보자기 주름 사이로 굴러 멈췄다.

인혜가 서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규례는 즉시 발효하며, 현재 진행 중인 청사 관련 수사에도 소급 적용된다.”

서기가 붓을 놀렸다. 정청 안의 모든 의관이 일어서서 목례했다.

이현이 채연을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의 기록이 법이 되는 순간이오.”

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른손이 다시 왼쪽 손목을 찾아갔다. 포승 자국은 이미 옅어지고 있었고, 손가락은 그 위를 천천히 쓸었다.

인혜가 정청 문을 열고 나갔다. 가락지 없는 왼손 엄지가 소매 안으로 접혀 있었다. 감색 당의 자락이 문밖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의관들은 한 사람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동궁 후원 연못가는 잠든 궁궐 속에서 유일하게 물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수면에 비친 별빛이 잔물결에 부서졌다.

채연이 연못가 돌의자에 앉았다. 품에서 어머니의 수기를 꺼내 가슴 앞으로 모았다. 오른손이 왼쪽 손목을 천천히 감았다.

열 손가락이 꼭 맞물렸다.

어머니가 의금부에 잡혀가던 날, 마지막으로 보였던 동작. 손목을 쥐고, 떨지 않던 손. 그 손목을 지금 자신의 손으로 감싸자, 비로소 어머니의 손이 닿은 듯했다.

채연이 손을 풀었다. 손가락이 한 마디씩 펴졌다.

이현이 그 옆에 서서 말했다.

“서의녀께서 자랑스러워하실 거요.”

채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는 붉었으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의녀의 기록이 이제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함께 증거를 만들자.”

이현이 채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깊은 밤, 동궁 후원의 별빛이 두 사람의 발밑까지 쏟아졌다.

이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청사는 아직 남아 있다.”

“찾아낼 겁니다. 기록으로.”

채연의 손이 수기를 꼭 움켜쥐었다. 어머니의 필체가 어둠 속에서 만져졌다.

연못 건너편, 밤하늘에 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끌며 떨어졌다. 그 끝이 담장 너머 북문 방향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별똥별의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궁궐 담장 너머로는 아직 밝혀내지 못한 어둠이 있었고, 그 안에 청사의 남은 길이 있었다.

청연재비록2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