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들리지 않는 진심

30화

통역실을 나서니 복도의 공기는 어두웠다. 긴 복도 끝,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오후의 재판이 길어지면서 창밖은 이미 어스름에 가까웠다.

유리창 너머로 법원 뜰의 회양목 울타리가 희끄무레하게 빛바래 보였다. 서이언은 가방 끈을 어깨에 걸치며 법원 정문 쪽으로 걸었다. 통역실 문고리가 손바닥에 남긴 차가운 감촉이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한 번, 한 번, 규칙적으로 울리던 소리가 로비의 높은 천장 아래로 흩어졌다. 로비를 가로지르자 유리문 너머로 계단이 보였다.

누군가의 재판이 끝났는지, 멀리서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들렸다가 복도 모서리에 부딪혀 사라졌다. 바깥 공기는 차고 건조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마른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늦가을이었다.

계단을 세 개쯤 내려갔을 때, 시선이 아래쪽 난간에 멈췄다. 대리석 계단은 오후 내내 사람들이 오간 자리가 미세하게 닳아 반들거렸다.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가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오른손으로 담배를 비벼 끄고 있었다. 휴대용 재떨이에 필터가 눌려 들어갔다.

끝이 뭉개진 필터에서 가느다란 연기 한 줄이 올라왔다가 바람에 흩어졌다. 손가락 마디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그 손등 위로 법원 로비의 불빛이 옅게 얹혀 있었다.

유재현이었다.

서이언의 발이 계단에 붙었다. 숨이 한 번, 짧게 멎었다. 오른손이 가방 끈을 더 세게 쥐었다.

가죽 끈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유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을 바람이 건드렸다.

재떨이 뚜껑을 닫아 주머니에 넣었다. 금속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아주 작게 들려왔다.

두 사람 사이, 일곱 계단.

바람이 불었다. 법원 앞 가로수 잎새가 흔들렸다. 마른 가지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유리문을 뚫고 새어 들어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없는 세계가 그들 사이에 펼쳐져 있었다. 서이언의 왼손이 난간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손끝에 대리석의 차가움이 잠시 달라붙었다가 사라졌다.

유재현이 천천히 오른손을 가슴 높이까지 올렸다. 손끝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담배를 비볐던 검지와 중지에 미세한 경련이 남아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쌓인 긴장이 떨림으로 번져나왔다. 그러나 동작은 정확했다.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없이 반복해 온 동작처럼, 낡은 습관처럼.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댔다. 천천히 시계 방향으로 두 번 돌렸다. '오래 걸렸다.' 손바닥이 재킷 천 위를 스치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했다.

서이언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눈가에 얇게 번진 피로의 잔금이 형광등 아래서 그림자로 드러났다. 그의 손이 다시 허리 옆으로 내려갔다. 손끝의 떨림이 멈췄다. 떨림이 사라진 자리에 정적만 남았다.

십 년 전, 그가 처음 배운 수어가 이것이었을까. 법정에서 우상일에게 건넸던 말. 그때도 같은 손, 같은 떨림이었을까. 지금, 같은 손짓을 그녀에게 보내고 있었다. 같은 마음일까, 같은 후회일까, 아니면.

서이언이 왼손을 허리 높이에서 들어 올렸다. 손가락을 편 손바닥을 가슴 앞에 세웠다. 손바닥이 허공에 닻을 내리듯 정지했다.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왼손 손바닥에 댔다. 손바닥의 체온이 집게손가락 끝으로 스며들었다. '유'.

천천히 손을 옆으로 옮겼다. 검지와 중지를 세워 왼쪽 가슴에서 오른쪽으로 짧게 그었다. 손끝이 공기 중에 남긴 궤적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재'. 다시 손을 옮겨, 엄지와 검지로 작은 원을 만들었다. 원 안으로 법원 앞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현'.

세 글자. 한 자씩 또렷하게. 마치 재판 기록을 읽어 내려가듯, 조서의 빈칸을 채워 넣듯.

유재현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입김이 아주 잠깐 모양을 이루었다 사라졌다.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닫히는 입술 사이로 삼켜진 말들이 있었다. 넥타이 매듭이 오르내렸다. 목젖이 한 번 천천히 움직이고 멈췄다. 커프스 단추를 만지는 손은 없었다.

서이언이 손을 내렸다. 손바닥을 편 왼손이 허리께로 돌아왔다. 가방 끈이 어깨에서 약간 미끄러졌다. 바로잡지 않았다. 끈이 천천히 팔꿈치 쪽으로 흘러내리도록 그냥 놓아두었다.

유재현이 몸을 돌려 계단 난간 옆에 내려놓았던 서류 가방을 집었다. 가방 손잡이에 그의 손바닥 땀이 길게 번져 있었다. 손잡이를 바닥에 내려놓을 때 가방 옆 주머니에서 뭔가가 살짝 솟아올랐다.

표지 모서리. 낡은 푸른색. 색이 바래서 군데군데 연한 청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국립국어원 수어 사전. 책등이 여러 번 접히고 닳아 있었다. 페이지 가장자리가 손때에 절어 어두운 베이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방은 계단에 닿지 않았다. 유재현이 무릎을 약간 굽혀 바닥에서 세 개째 되는 계단에 내려놓았다. 대리석 계단에 가방 밑면이 닿으며 작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시 손을 들었다. 허공에서 잠시 망설이던 손이었다. 오른손 검지를 자신의 가슴에 댔다.

'나'. 손끝이 왼쪽 가슴, 심장 바로 위에 닿았다.

그다음 동작이 시작되지 않았다.

손이 공중에서 정지했다. 손가락이 약간 오므라들었다. 검지가 구부러지고 중지가 따라 구부러졌다.

마치 다음 단어를 찾지 못해 허공을 더듬는 듯한, 미완성의 손짓이었다. 유재현이 손을 내리지도, 다음 동작을 잇지도 못한 채 서 있기만 했다. 목젖이 한 번 움직였다.

무언가 삼키는 듯한 동작이었다. 아니, 무언가 삼키지 못하고 머금은 채로 있는 것 같았다.

서이언이 오른손을 들었다. 손바닥을 펴서 입술 앞에서 바깥쪽으로 밀어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손바닥이 천천히 공기를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말하지 않아도'. 손끝에 어스름한 저녁빛이 스며들었다.

수어가 끝나기도 전에, 유재현이 반 걸음 다가섰다. 구두 밑창이 계단을 짧게 긁었다. 대리석에 생긴 흰 자국이 순간적으로 생겼다 사라졌다. 숨소리가 한 뼘 더 가까워졌다.

서이언의 오른발도 반 걸음 앞으로 나갔다. 구두 굽이 계단 모서리를 반쯤 밟아 잠시 머물렀다.

일곱 계단이 다섯으로 줄었다. 그 거리에서 서로의 손이 가장 잘 보였다. 손가락의 움직임, 손목의 기울기, 손바닥의 방향까지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거리였다.

말을 옮기던 손. 법정에서 피고인의 진술을 옮기고, 증인의 떨리는 목소리를 대신 전하던 손. 증거를 제출하던 손.

사진과 서류, 녹음기록을 재판부에 건네던 손. 두 손이 다섯 계단 사이에서 서로를 향해 있었다.

유재현의 왼손이 바지 주머니 옆에서 손바닥을 폈다. 오므리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두었다. 손가락 사이로 난간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지나갔다.

서이언의 왼손이 허리 높이에서 멈췄다. 주먹을 쥐지 않았다. 중지와 검지가 약간 펴졌다.

손가락 사이로 가로수 그림자가 떨어졌다가 사라졌다. 옮길 말을 찾는 손가락 같았다. 아직 형태를 이루지 못한, 공기 중에 흩어져 있는 단어들을 조립하려는 듯한 손짓이었다.

유재현이 다시 손을 들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자신의 가슴에서 바깥쪽으로 천천히, 두 사람 사이를 가리키듯 움직였다. 손끝이 가슴을 떠나 공간을 가르며 나아갔다. '함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의 공기가 아주 잠깐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 목적어도, 방향도, 시제도 없는 단 한 단어. 함께, 누가, 어디로, 언제, 어떻게.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한 단어가 다섯 계단 위에 맴돌았다. 손이 공중에 멈춘 채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실처럼 빠져나갔다.

서이언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팔이 천천히 가을 공기를 가로질렀다. 오른손이 천천히 가로질러 유재현의 왼쪽 손목에 닿았다.

시계 띠 바로 위. 가죽 띠가 피부에 닿는 경계선이었다. 손목뼈가 만져졌다.

얇은 피부 아래 단단한 뼈의 윤곽이 손끝으로 읽혔다. 손끝으로 두드리듯, 두 번. 심장 박동보다 조금 느리게.

가볍게.

그리고 손을 거두었다. 손가락이 손목을 떠나며 미세한 온도의 차이가 생겼다.

유재현의 손목에 그녀 체온이 남았다.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가 바람에 약간 차가워졌다. 체온이 바람에게 빼앗겨 가는 시간이, 어쩌면 일 초보다 짧았을 것이다.

법원 앞 가로수 잎새가 다시 흔들렸다. 마른 플라타너스 잎이 계단 아래로 굴러왔다. 잎맥이 드러난 갈색 잎이 계단 모서리에 부딪혀 구르고 또 굴렀다.

소리는 없었다. 그림자만이 움직일 뿐이었다. 길게 늘어진 가로등 그림자가 계단 위로 기울며 두 사람의 발끝을 삼켰다.

유재현이 서류 가방을 다시 집어 들었다. 가방 손잡이가 손바닥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가방 옆에서 수어 사전 모서리가 보이지 않게,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넣는 동작이 아주 익숙했다. 여러 번 반복해 온 손길이었다.

서이언이 가방 끈을 고쳐 메었다. 어깨에서 흘러내렸던 끈을 검지로 걸어 올리며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손목시계가 진동하지 않았다.

유리판 아래 초침만이 조용히 돌고 있었다. 다음 통역 일정은 내일 오전이었다. 오전 열 시, 같은 법원, 다른 법정. 다른 피고인, 다른 진술, 다른 손짓들.

두 사람은 동시에 계단 아래로 몸을 돌렸다. 나란히가 아닌, 두 계단 차이로. 유재현이 먼저 한 계단을 내려가고, 서이언이 그다음 계단을 내려갔다.

법원 정문에서 정류장으로 이어지는 길로 접어들었다. 보도블록이 일정한 간격으로 깔린 길이었다. 가로수 길을 따라 늦가을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

해는 이미 서쪽 건물 너머로 기울어, 빛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유재현의 그림자가 오른쪽으로, 서이언의 그림자가 왼쪽으로 기울었다. 두 개의 그림자가 보도블록 위에서 각자의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교차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걸었다. 두 걸음 차이. 보폭이 달라서도, 속도가 달라서도 아니었다.

의도된 두 걸음. 손목을 두드렸던 손끝과, 사전을 감추었던 손잡이가 같은 높낮이로 흔들렸다. 팔의 움직임이 보도블록의 리듬에 맞춰 천천히 반복되었다.

행인 하나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쳐 갔다. 코트 깃을 세운 중년 남자였다. 서류 봉투를 든 손이 스치듯 두 사람 사이 공간을 갈랐다.

그가 지나간 자리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반 발짝 줄었다. 누가 먼저도 아니고, 동시에 줄어든 거리였다. 공기가 한 겹 좁아졌다.

법원 앞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붉은 불에서 녹색으로 바뀌었다. 전자음이 울리는 것을 두 사람 중 누구도 듣지 않았다. 깜빡이는 녹색 불빛만이 신호가 바뀌었음을 알렸다.

서이언이 왼쪽을 바라보았다. 유재현도 같은 타이밍에 왼쪽을 확인했다. 차선을 확인하는 눈빛이 똑같은 각도로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신호등 앞에서 잠깐 겹쳤다. 시선이 교차한 지점에서 초저녁의 첫 번째 가로등이 막 켜지고 있었다.

'함께'라는 수어가 남긴 문장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목적어도, 방향도, 시제도 없는 채. 함께 걸을 길이 어디인지, 함께할 시간이 얼마인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손목을 두드린 손은 답을 대신했다. 두 번의 가벼운 두드림. 그것은 대답이었고, 질문이었으며, 약속이었다.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더 많은 말들은 천천히, 한 단어씩, 완성되지 않은 문장을 채워 가듯이.

플라타너스 잎이 바람에 굴러가는 길. 마른 잎이 보도블록 위를 스치며 나아갔다.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포석 위에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구두 굽이 보도블록을 한 번, 한 번, 두드리는 소리. 서로의 발걸음 소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들리고 있을까. 그 소리의 진동이 공기를 통해 발끝으로, 다리로,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을까.

일곱 계단. 다섯 계단.

반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이제, 같은 보폭. 두 사람의 발걸음이 보도블록 위에서 하나의 리듬으로 겹쳐지기 시작했다. 녹색 신호등 아래로, 늦가을 저녁의 길고 긴 그림자가 함께 기울어 갔다.

유재현이 다시 손을 들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자신의 가슴에서 바깥쪽으로 천천히, 두 사람 사이를 가리키듯 움직였다. 손끝이 가슴을 떠나 공간을 가르며 나아갔다.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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