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파동
12화
주조정실 형광등이 낡은 콘솔 위로 가라앉았다. 최미경이 먼저 복도로 나가고, 스튜디오에는 서지오, 유재민, 권태호만 남았다.
권태호가 믹서 페이더를 내리자 화이트 노이즈가 멎었다.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네.”
서지오가 유재민 어깨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권태호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접힌 편지 봉투를 꺼냈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한 오래된 종이였다.
“그 편지… 선배님도 받으신 거예요?”
“아니. 내가 보낸 거야.”
유재민의 눈매가 좁아졌다. “뭐라고요.”
“십 년 동안 보낸 편지 전부. 발신인은 나다.”
서지오의 왼손이 시계 유리로 갔다가 멈췄다. “말도 안 돼요. 필적 감정 결과도 나왔고…”
“서지윤이 생전에 나한테 보낸 편지지. 원본을 복사해서 썼어. 매번 다른 구절을 발췌해.” 권태호는 봉투를 콘솔 위에 내려놓았다.
“Y 이니셜.” 유재민의 음성이 낮았다. “그것도 선배님 작품인가.”
“아니. 그건 서지윤 방식이었어. Young 세대 약자. 이 방송국에서 주파수 기호로 쓰던 코드. 서지윤이 작업 노트에 그렇게 표시했고.” 권태호가 안경을 벗어 닦았다. “내가 편지에 Y를 넣은 건, 진짜 편지와 가짜를 구분하는 서명 같은 거였네. 서지윤이 남긴 방식으로.”
서지오의 손가락이 콘솔 모서리를 더 세게 움켜잡았다.
“왜.” 유재민이 대신 물었다.
“테이프.” 권태호가 짧게 대답했다. “십 년 전 마지막 방송날, 믹서 아래 비상 녹음 버튼으로 녹음한 테이프야. 서지윤의 생방송 끝나고도 계속 돌아갔어. 그 뒷부분에… 협박 대화가 들어 있었네. 동생 이야길 꺼내며 애원하는 목소리까지.”
서지오의 숨이 얕아졌다.
“듣고도 가만히 계셨단 말이에요. 10년 동안.”
“그래.” 권태호가 안경을 다시 썼다.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네. 충격 받고 무너질 게 뻔한 애송이에게, 언니가 협박당하다 사라졌다는 녹음을 들려줄 순 없었어.”
“그럼 익명으로 편지를 보내는 건…”
“단서였네. 조금씩. 방송국 내부는 수발신 기록이 남지 않으니까. 나 혼자 흘리기엔 적당했어. 네가 따라올 때까지.” 권태호의 시선이 콘솔 위 봉투에 닿았다. “서지윤이 남긴 마지막 기록이 어떤 건지, 그걸 네 손으로 확인하게 하려고.”
서지오가 시선을 거뒀다. 무릎 위의 손이 떨렸고, 유재민이 그 위로 손바닥을 포갰다. 말없이.
한참 뒤, 서지오가 입을 열었다. “배신감, 들어요.”
목소리는 떨렸지만 울음은 아니었다. “10년 내내, 나 혼자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도 몰랐다고. 근데… 누군가 이걸, 10년 동안 보관하고 있었다는 걸 지금 알겠어요.”
권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지오가 천천히 일어나 그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고, 오래도록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권태호의 손이 잠시 어깨 위에 짧게 닿았다.
“됐네. 이제.”
유재민도 일어나 천천히 권태호 쪽으로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한 마디였지만, 그 짧은 호칭 안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권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숙직실 간다. 차 한 잔 하고 싶네.”
그가 문을 열자 복도의 어두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서지오는 등을 편 채 돌아서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스튜디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콘솔 위의 누런 편지 봉투는 아직 열리지 않은 채 형광등 아래 놓여 있었다.
주조정실의 형광등이 낮게 윙윙거렸다. 서지오는 의자에 앉아 멈춰 있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쳐야 하는데.”
유재민이 옆으로 와 서서 고개를 숙여 시선을 찾았다. “시간은 더 간다. 이제.”
서지오가 얼굴을 들었다. 눈가가 붉었지만 울먹임은 없었다. “나…… 그동안 내가 행복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유재민은 대답 없이 기다렸다.
“언니가 사라진 날 밤, 마지막 통화에서 다퉜거든. 사소한 일로.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그래서 나는, 내가 뭔가를 바라면 안 되는 줄 알았어. 원하는 순간 모든 게 사라질 거라고.”
유재민이 천천히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나도 그랬다. 서지윤 씨를 구하지 못한 것도, 전화를 끊은 것도…… 평생 짊어져야 할 빚이라고 믿었다.”
서지오가 시선을 들자 그의 눈가 흉터가 보였다.
“이제 그만 내려놔도 된다고, 나는 생각해. 네 탓이 아니야. 너는 그냥, 그날 밤 언니와 다툰 동생이었을 뿐이야.”
그가 손을 내밀었다. “혼자 짊어지지 마.” 차가운 손 위로 따뜻한 체온이 스몄다.
“나…… 이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10년 동안 죄책감만 붙들고 살아서.”
“그럼 이제부터 찾으면 돼. 혼자가 아니야.”
유재민이 손을 가볍게 쥐었다. 서지오의 눈에 수분이 고였지만 흐르지는 않았다. 그가 일어나 팔을 벌렸다.
서지오는 반 박자 망설이다 한 걸음 다가갔다. 이마가 그의 가슴께에 닿았다. 팔이 등을 감쌌다.
낡은 니트에서 비누 냄새와 커피 향이 났다. 서지오의 손이 등 뒤로 올라가 셔츠를 가볍게 움켜잡았다.
“무서웠어. 너도 사라질까 봐.”
“안 사라져.”
한참 동안 그 상태였다. 믹서의 불빛 몇 개가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그의 손이 등을 위아래로 한 번 쓸었다.
먼저 팔을 살짝 풀자 서지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오른손이 턱선을 따라 올라갔고, 엄지가 뺨을 스쳤다.
“서지오.”
처음이었다. “서 PD님”도 아니고 “너”도 아닌.
대신 눈을 감았다. 유재민이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맞추었다. 처음엔 온도를 확인하는 것처럼 가볍고 짧았다.
두 번째는 조금 길었다. 부드럽고 천천히. 입술의 작은 떨림이 사라질 때까지. 그가 먼저 물러났고, 이마가 잠시 서로에게 닿아 있었다.
눈을 떴다. “고마워.”
유재민이 대답 없이 손을 다시 잡았다. 손가락 사이를 깊숙이 끼웠다. 여전히 멈춰 있는 손목시계의 유리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지만, 시계는 보지 않았다.
오전 10시, 편집실.
유재민이 책상 위에 큐시트 초안을 펼쳐 놓았고, 서지오가 노트북 화면을 보며 원고 포맷을 조정하고 있었다. 최미경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인쇄된 원고 뭉치를 건넸다.
“PD님, 청취자 반응이에요. 진짜 난리 났어요.”
서지오가 출력물을 훑었다. “대부분의 사연이…… 언니에 대한 거네.”
“네. 이상하게 하나도 무섭지 않은 분위기예요.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서지윤 씨를.”
서지오가 얼굴을 들었다. “오늘 방송, 방향을 바꿀게요. 범인 추적이나 암호 해독이 아니라……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방송으로.”
최미경이 파우치에서 또 한 장의 편지를 꺼냈다. 익숙한 필체였다. “권태호 선배님이 아까 전달하셨어요. 서지윤 언니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 원본이래요.”
이미 한 번 봤던 갈색 봉투를 바라봤다. 이제 그 편지의 모든 문장이 가리키는 대상을 알고 있었다. 편지를 꺼냈다. “최미경 씨, 이 편지를 오늘 방송 마지막 순서에 넣어 주세요.”
최미경이 큐시트에 재빨리 체크했다. 유재민이 자신의 큐시트를 들고 옆으로 왔다.
“나도 진행할까.”
질문 형태였지만 물음표가 없었다.
“같이 마이크 앞에 앉아요. 오늘.”
유재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자정 4분 전. 스튜디오 부스.
온에어 표시등이 붉게 물들었다. 유재민과 서지오가 나란히 메인 콘솔 앞에 앉았다. 부스 밖에서 최미경이 헤드폰을 조정하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고, 권태호가 믹서의 마스터 페이더를 점검했다.
“자정입니다.”
마이크가 열렸다. “밤을 건너는 파동, 열두 번째 밤입니다. 오늘 방송은…… 지난주에 이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마저 전해드리려 합니다.”
유재민의 음성이 이어졌다. “십 년 전, 이 방송국의 밤 지킴이였던 한 DJ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편지와…… 침묵에 관해.”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펼쳤다. “직접 읽겠습니다. 맨 마지막 문장을 제외하고는, 십 년 전 이곳에서 보내졌던 편지입니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마이크에 닿았다.
“‘지오야, 오늘 방송에서 네 목소리를 들었어. 네가 큐시트 읽는 소리, 조금 떨렸지. 나는 알았어. 네가 긴장할 때마다 오른쪽 검지로 시계를 두드린다는 걸.’”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며 잠시 멈췄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그런데 편지로는 다 못 쓰겠다. 그래서 하나만.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해도 되는 사람이야.’”
스튜디오 안이 조용했다. 부스 밖에서 최미경이 고개를 숙인 채 메모하고 있었고, 청취자 수는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제 언니, 서지윤입니다. 십 년 전 이 방송국에서 DJ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협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방송국의 비리를 폭로하려다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유재민이 마이크를 열었다. “어떤 진실은 말해지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오늘 이 방송은, 그 진실을 함께 나누는 자리입니다.”
큐시트를 한 장 넘겼다.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지금부터 들려드릴 음성은, 십 년 전 언니를 위협했던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오래된 자기 테이프에서 복원한 거라 음질이 고르지 않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권태호가 믹서의 페이더를 올렸다. 변조된 협박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동생이 위험해진다.’ ‘그 자료 당장 접어.’
녹음이 끝나고 스튜디오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마이크가 열렸다.
“언니는 실종자가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아직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언니는 자신의 목소리로 진실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을 지키기 위해 십 년 동안 침묵했던 사람이 이곳에 있었습니다.”
유재민이 시선을 들어 부스 너머 권태호를 바라봤다. 권태호는 믹서 앞에 앉아 있었고, 페이더 위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오늘 이 방송은 추적을 끝내는 방송입니다. 그리고 떠나보내는 방송입니다. 저는, 제 언니를 더 이상 죄책감의 그림자로 붙들어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손목시계를 풀었다. 십 년간 멈춰 있던 가죽 밴드가 손목을 떠났다. 콘솔 위에 올려놓자 유리판이 작은 소리를 냈다.
“이 시계는 오늘 방송이 끝나면 수리를 맡길 겁니다. 다시 움직이게 할 겁니다.”
유재민이 옆에서 마이크를 당겼다. “이 시계가 멈춘 시간, 새벽 2시 13분은 서지윤 씨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지키려 했던 시간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시간을 다시 시작합니다.”
마지막 사연이 적힌 페이지를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보내는 사연은, 언니를 향한 저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편지입니다.”
원고를 똑바로 펼쳤다. 유재민의 손이 콘솔 아래로 내려가 손을 찾았다.
“‘언니, 나는 이제 당신을 놓아주려고 해. 당신이 없어서 망가진 시간이 아니라, 당신이 있어서 가능했던 날들을 생각하면서 살 거야.’”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당신이 남긴 편지를 읽고 나서야 알았어. 당신은 사라진 게 아니라, 오랫동안 나를 지키고 있었다는 걸.’”
부스 밖, 최미경이 입술을 깨물며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SNS 실시간 반응이 폭주하고 있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마지막 문장이었다. “‘나는 내 행복을 선택할게. 당신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잠시의 정적. 권태호가 미리 준비된 음악 페이더를 올렸다. 낮고 느린 피아노 곡이 스튜디오를 채웠고, 온에어 표시등이 꺼졌다.
최미경이 부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가가 빨개져 있었다. “PD님…… 청취자 반응…….”
말을 잇지 못했다. 모니터 화면에는 위로와 공감의 실시간 메시지가 끝없이 밀려 올라가고 있었다.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손목시계를 집어 왼손에 다시 찼다. 여전히 2시 13분이었지만, 이제는 고장이 아니라 약속처럼 보였다.
유재민도 일어났다. 손이 자연스럽게 어깨에 닿았다. “끝났어.”
그를 돌아봤다. 눈 밑의 그늘이 아니라 입가의 주름이 먼저 보이는 미소였다. “응, 끝났어.”
생방송 부스의 불이 하나둘 꺼졌다. 최미경이 장비를 정리하고, 권태호가 마지막 페이더를 내렸다. 엔딩 시그널의 피아노 선율이 잦아들며 열두 번째 파동의 마지막 방송이 막을 내렸다.
한 시간 뒤. 모든 방송 장비가 꺼진 텅 빈 부스.
비상구 쪽 문을 열고 들어왔고, 유재민이 뒤를 따랐다. 전원이 내려간 마이크 앞에 섰다.
“이제, 나는 당신 곁에서 내 삶을 살겠다.”
마이크가 없어도 그 말이 방 안을 채웠다. 유재민이 걸어와 콘솔 위의 스위치 하나를 올렸다. 스튜디오 모니터 스피커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마이크가 살아 있었다. 그의 손이 마이크 스탠드를 서지오 쪽으로 기울였다.
“사랑한다.”
문어체에 가까운 정제된 발음. 하지만 생방송용 존댓말도, 비꼬는 억양도 없는 유재민의 반말이었다.
그를 보며 웃었다. 손목시계를 두드리지 않았다.
“새해 첫날. 방송국 옥상에서 해 뜨는 거 보고 싶어. 같이.”
유재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올라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