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검쟁명 (琴劍爭鳴)
12화
폭포 소리가 잦아들었다. 공명의 심장부 동굴 중앙에 귀곡자가 쓰러져 있었다. 올빼미 가면은 벽에 기대어 굴러 있었고, 드러난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코끝에서 흘러내린 검은 피가 도포 깃에 굳어 있었다. 역혈이 터진 것이 분명했다.
명원진이 사모도 끝으로 귀곡자의 손목을 살짝 밀었다. 손이 축 늘어지며 손가락 사이에서 독침 하나가 굴러나왔다.
“자결할 틈도 없었군.”
하진혁이 쪼그려 앉아 귀곡자의 도포 안주머니에서 가장자리가 까맣게 그을린 악보 한 묶음을 꺼냈다. 공손려가 받아 들고 페이지를 넘기며 철선으로 리듬을 짚다가 멈췄다.
“치와 우가 뒤집혔어요. 음의 흐름을 완전히 거꾸로 꼬았더군요. 이걸로 수련하면 경락이 일곱 호흡 안에 역류하고 말 겁니다.”
“비극의 씨앗이다.”
하진혁이 악보를 접어 공손려에게 건넸다.
“이제 끝이다.”
그가 동굴 벽으로 걸어갔다. 거문고 현과 같은 금속 줄이 동굴 전체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고, 끝마다 공명석이 매달려 있었다. 하진혁이 거문고를 품에 안고 현에 손가락을 얹어 짧은 음 하나를 울렸다.
내공이 금속 줄을 타고 번져 들어가 수호의 검으로 바뀌었다. 줄들이 하나씩 끊어져 땅으로 흘러내렸고, 마지막 공명석에서 불꽃이 튀며 가루가 흩어졌다. 물길이 낙차마다 다른 음을 울리게 설계된 구조도 함께 무너졌다.
명원진이 사모도를 거두며 귀곡자의 도포에서 피리와 뼈 북채를 빼냈다. 공손려가 독침이 숨겨진 피리 안쪽을 확인한 뒤 천으로 감쌌다.
“하 대협의 거문고에서 숨겨진 칸이 있었죠. 이제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하진혁이 거문고를 바닥에 내려놓고 옆면의 나뭇결을 따라 밀어 올리자 판이 빠지며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에 누렇게 바랜 종이 묶음이 들어 있었다. 일기의 마지막 장이었다.
하진혁이 종이를 펼쳤다. 공손려와 명원진이 양옆에서 들여다보았다.
'금지에 손을 댔다. 사제에게 금검술의 기초 구결을 전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그 재능이 정도를 걸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곡은 기초를 전부 뒤집어 왜곡했다. 치음을 우음 자리에, 우음을 치음 자리에 넣어 운기 궤적을 찢는 법을 스스로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 내가 확인한 위조 비급의 원리다. 내가 뿌린 씨가 참화가 되어 돌아왔다. 거둘 수 없다면 차라리 봉쇄해야 한다. 뒷날 누군가 이것을 보거든, 명심하라. 금검술은 자연과의 공명에서 시작된다. 타인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는 결코 금검을 완성하지 못한다.'
일기장 아래에는 대비표가 붙어 있었다. 왼쪽은 청음검향의 정통 기초 구결, 오른쪽은 귀곡자가 변형한 왜곡 구결. 치와 우 외에도 여러 지점이 붉은 획으로 대비되어 있었다.
공손려가 손끝으로 대비표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귀곡자의 위조 방식 전부가 청음검향의 기본 구결에서 출발했군요. 이 정도 대비라면 지금까지의 피해 문파도 모두 증빙할 수 있겠어요.”
명원진이 사모도 자루에서 손을 떼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위조 비급으로 죽은 사형에게 이제야 증거가 생겼군.”
하진혁은 스승의 일기 마지막 장을 접어 악보와 함께 품에 넣고 숨겨진 칸을 다시 닫았다. 옥 가락지를 만지며 일어났다.
“이것으로 위조 비급의 뿌리는 뽑혔다. 스승께서 남기신 증거다.”
공손려가 철선을 접어 허리춤에 꽂았다.
“강호의 각 문파에 이 대비표를 알리면 더 이상의 피해는 없을 거예요.”
명원진이 귀곡자의 유품을 천으로 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월당과 무풍객잔의 잔당들도 이걸로 압박할 수 있다. 조직의 발은 꺾였다.”
동굴 밖에서 저녁 빛이 폭포 물줄기 사이로 비쳐 들었다. 물안개가 희게 빛났다. 하진혁이 거문고를 등에 메고 공손려와 명원진이 양옆으로 섰다.
해 질 녘이었다. 환영곡 입구의 바람이 세 사람의 옷자락을 다른 방향으로 흔들었다.
명원진이 사모도를 내려 바위에 기대어 세웠다. 가죽 갑옷의 끈을 풀어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거친 손가락이 종이를 펼쳤다. 먹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자술서였다.
“무림맹으로 간다.”
공손려의 철선이 멈췄다.
“지금…… 말입니까.”
“내가 뿌린 독이다. 내가 걷어야지.”
명원진의 청회색 눈동자가 해를 등진 서쪽 산등성이를 스쳤다.
“나는 전 행동대장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으러 가겠다.”
하진혁이 물었다.
“언제 출발하느냐.”
“지금.”
명원진이 자술서를 다시 접어 품에 넣었다. 왼팔의 붕대 아래 상처가 당겼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공손려가 한 걸음 다가섰다. 바람이 그녀의 땋은 머리를 앞으로 흘렸다. 철선을 접어 허리띠에 꽂는 손끝이 조금 떨렸다가 곧 멈췄다.
“길이 험할 겁니다. 무림맹까지는 산길로도 여러 날.”
“안다. 혼자 가는 게 낫다.”
“대협께서 선택한 길. 그것이 정도라면 멈추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명원진이 사모도를 집어 들었다.
“너는 나를 용서할 셈이냐.”
“아니요. 용서는 피해를 입은 이들의 몫.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아니에요.”
“그럼 뭐냐.”
“속죄는 길이에요. 걸어서 완성하는 것.”
명원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바람만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그가 사모도를 고쳐 메고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섰다.
“네놈들 덕에 한 가지 배웠다. 복수만으로는 아물지 않는다는 걸.”
걸음이 빨라졌다. 남쪽 임도로 접어드는 길목에 섰을 때, 공손려가 허리를 숙였다.
“무림맹에서 뵙겠습니다.”
철선을 아래로 내린 손목이 옷소매 속에서 곧게 뻗었다. 공손려는 허리를 수그린 채 명원진의 뒷모습이 길 건너편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일어서지 않았다. 하진혁은 팔짱을 낀 채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명원진의 실루엣이 희미해졌다. 공손려가 천천히 상체를 바로 세웠다.
“……무거운 발걸음이었어요.”
하진혁이 끄덕였다. 거문고 끈을 다시 어깨에 고쳐 메고 그가 폭포 쪽으로 턱짓했다. 공손려가 비파를 한 손에 쥐고 그의 옆으로 섰다.
초저녁 별빛이 폭포 물보라에 부서져 은은하게 번졌다. 물줄기에서 열 걸음쯤 떨어진 평평한 바위 위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폭포 소리는 더 이상 공격이 아니었다. 고요를 깨는 소리가 아니라 고요를 만드는 소리였다.
하진혁이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바라봤다. 금검술로 검기를 일으키던 바로 그 손이었다.
“나는 오늘 한 가지를 알았다. 음이 된다는 것. 타인의 소리에 공명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공손려의 시선이 하진혁의 손에 닿았다. 옥가락지가 별빛에 옅은 빛을 띠고 있었다.
“석굴에서 거문고 없이 검을 만들었을 때…… 그 소리는 감싸는 소리였죠. 제 철선 소리도 거기에 닿았어요. 처음 느끼는 공명이었죠.”
“들었다. 나는 그동안 복수만으로 나아갔다. 스승의 원한을 갚는 것만이 유일한 길인 줄 알았다. 이제 아니다.”
하진혁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힘이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약하지는 않았다. 칼집에서 검을 빼는 대신 품에서 악보를 꺼내어 살피는 사람처럼 차분했다.
“금검술은 베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키기 위한 기술이다. 이젠 복수가 아닌 금검술로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 그게 스승의 유지를 잇는 길이다.”
공손려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무언가가 마침내 제자리에 맞춰졌을 때의 안도감이었다.
“그럼 제 소리도 그 검에 닿을 수 있게. 함께 하는 걸 허락해 줘요. 내 비파 소리는 금검술을 닮아가고 있어요. 이번 여정에서 변했어요. 폭포 소리와 닮았고, 당신의 거문고 소리와도.”
철선의 금속 날이 별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공손려가 그것을 천천히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약속의 의식 같았다.
“내 거문고 소리가 그 검에 닿을 수 있게 해 달라는 뜻이다.”
하진혁이 일어섰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거친 손바닥이 별빛 아래 펼쳐졌다. 공손려가 철선을 한 손으로 쥔 채 다른 손을 올렸다. 두 손이 마주 잡혔다.
“검과 소리. 어디로 가야 할지는 그 둘이 가리킬 거예요.”
공손려가 일어서며 말했다. 두 사람은 각자 거문고와 비파를 등에 멨다. 두 악기의 끈이 각자 다른 무게로 주인을 눌렀다. 폭포 소리가 뒤에서 꾸준히 들렸다.
다음 날 새벽이었다.
동쪽 하늘이 짙은 쪽빛에서 엷은 홍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환영곡 입구 바깥 대로까지 나오자 풀숲에서 아침 이슬이 걷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밤사이 정리한 짐을 각자 등에 진 채 길 위에 섰다.
대로는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졌다. 어느 쪽이든 산을 넘으면 사람 사는 마을이 나왔다.
“가자.”
하진혁이 짧게 말했다. 공손려가 그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나란히 한 걸음을 뗐다.
“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공손려가 대답 대신 철선을 펼쳤다. 아침 공기를 가르는 날이 맑은 금속음을 냈다. 그 소리가 먼 산등성이에 부딪혀 돌아왔다. 메아리는 폭포의 먼 울림과 섞여 길 위로 퍼졌다.
수평선 너머로 길은 곧게 뻗어 있었다. 두 사람의 실루엣이 나란히 그 길 위로 멀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