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의 독초, 성수의 맹세
12화
대관식 준비 위원회 궁정의 대리석 바닥이 오후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공보관이 계약 해지 문서의 마지막 조항을 낭독하고 양피지를 말아내리자, 비비안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에단이 그녀 곁에서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
“끝났소.”
짧은 한마디였다. 검은 제복의 칼라 위로 목울대가 움직였다.
비비안이 입을 열려던 순간, 에단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귀족들의 시선이 무심하게 흩어지려던 찰나였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예복 자락이 대리석 위로 쓸리며 퍼지는 소리가 궁정을 가로질렀다. 왕세자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근위대장이 손을 검자루로 가져갔다 멈췄다.
“비비안 로즈우드.”
에단이 왼손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안쪽에서 푸른 빛이 번쩍였다. 별빛 이슬풀 꽃잎을 본떠 세공한 백금 반지였다.
“왕세자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당신께 청하오.”
궁정이 술렁였다. 누군가의 부채가 바닥에 떨어졌다. 귀족 여인 셋이 동시에 숨을 삼키는 소리가 겹쳤다.
에단이 올려다봤다. 황금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생을 함께하길 원하오. 계약도, 거래도 아닌——”
목소리가 잠시 꺾였다.
“당신을.”
비비안의 손끝이 떨렸다. 가슴께로 올라온 무언가가 목을 조여 왔다. 3년 전 폐허가 된 백작가 저택의 겨울, 그날 이후 처음으로.
눈물이 차올랐다.
“전하.”
입술을 열었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저는——”
에단의 손이 반지를 든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 뜨거워서 더 많은 눈물이 고였다.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존대도, 반말도 아닌 말이었다.
“백작가의 딸로서가 아니라, 그저 비비안으로서.”
궁정 전체가 일제히 들썩였다. 근위대장이 경악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셀레나의 연행 보고서를 들고 있던 서기가 펜을 떨어뜨렸다.
에단이 반지를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별 모양 세공이 손가락에 닿자 푸른 빛이 한 번 더 반짝였다.
그가 일어섰다.
동시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궁정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박수는 둘, 셋, 열 명으로 번져 단상 앞까지 밀려왔다. 가장 먼저 손뼉을 친 마커스 웰튼이 느릿느릿 걸어왔다.
“이걸로 로즈우드 영애께서 이 궁정에 들어오신 지 두 시간 만에 완전히 다른 신분이 되셨네요.”
하얀 약제사 가운 소매가 흔들렸다. 실눈을 한 그의 미소가 평소보다 반 톤 진했다.
“왕세자비 전하.”
비비안은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마커스가 고개를 숙였다.
“성수께서 가장 먼저 축복하셨습니다. 어젯밤 새순이 돋은 걸 보면,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에단이 비비안의 손을 잡았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 위로 그의 엄지가 포개졌다. 그는 마커스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마커스가 손사래를 쳤다.
“감사는 이따 약제실로 술 한 병 보내주시는 걸로.”
그가 뒤로 물러서며 손짓하자, 귀족들 사이에서 박수가 다시 커졌다. 다만 구석에 선 몇몇 귀족——계약 약혼 때 가장 큰 소리로 비웃던 이들——은 얼굴을 굳힌 채 손뼉을 치지 못했다.
에단이 비비안을 끌어당겼다. 망토가 펄럭이며 두 사람을 감쌌다. 검은 천 안쪽의 눈먼 독수리 문양이 오후 빛에 한 번 번뜩였다.
“끝난 뒤에.”
에단의 목소리가 그녀의 정수리 위로 낮게 울렸다.
“아까 하려던 말이오.”
비비안이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제복에서 흙내와 은은한 소독약 향이 났다. 전날 밤 태양이끼 해독제를 함께 조제할 때 맡았던 그 향이었다. 그녀가 작게 웃었다.
“끝난 뒤가 맞네요.”
“뭐요.”
“전하가 약속하셨잖아요.”
그가 팔을 더 조였다. 대리석 바닥 위로 새로 비친 햇살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로 이었다. 근위대장이 낮은 기침을 하며 경비대원들을 물렸다. 마커스가 서기에게서 떨어진 펜을 주워 건네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비비안은 눈을 감았다. 반지 낀 손이 그의 등 뒤로 올라가 천천히 제복을 움켜쥐었다. 성수의 뿌리 곁에서 올려다본 달빛도, 금지 구역 담장 아래에서 뻗어 있던 새순도, 이 순간을 위해 있었던 것 같았다.
살아 있구나.
그녀의 심장 소리가 그의 가슴에 닿았다. 에단의 왼손이 그녀의 뒷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왕실 복도를 반쯤 지날 무렵, 그녀가 팔짱을 조용히 풀고 그의 팔뚝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이마가 그의 어깨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온실 유리 돔이 가까워지자 공기가 점차 따뜻하고 습하게 바뀌었다.
환호성이 담장 너머로 멀어지고 있었다.
비비안은 에단의 팔짱을 끼고 왕실 온실의 돌길을 걸었다. 약혼 반지가 왼손 약지에서 낯선 무게로 반짝였다. 저녁 빛이 온실 유리 돔을 붉게 물들이고, 성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저 상처.
문득 집무실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어린 에단을 안은 근위 기사의 목에 번진 칼자국. 그리고 그와 똑같은 방향으로 에단의 목 오른쪽에 남은 희미한 흔적.
발걸음이 느려졌다.
“전하.”
에단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어릴 적 사진 속 칼자국은… 당신 목의 것이었군요.”
비비안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손끝이 그의 팔꿈치를 살짝 움켜쥐었다.
“그 상처가, 근위 기사의 배신과… 같은 방향이라는 걸. 이제야.”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 어린 에단이 겹쳐 보였다. 신뢰했던 자에게 목을 베이고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칼자국을 감추며 자란 시간들.
“이제야 당신의 모든 고통을 이해합니다.”
에단의 황금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른손이 천천히 올라와 목의 칼자국을 스쳤다.
“이걸 봤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군.”
낮고 담담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손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 상처마저… 당신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비비안이 손을 뻗어 그의 왼손을 잡았다. 아직 흙이 조금 남아 있는 손가락이었다.
“부끄러워할 상처가 아닙니다. 당신을 살린 증거예요.”
에단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강하지 않았다. 부서질 듯 조심스러운 악력이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성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멈춰 섰다.
성수 가지마다 은은한 빛이 맺히고 있었다. 100년 만에 가장 화려한 꽃이 활짝 피어나려는 참이었다.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꽃잎 사이로 옅은 금빛이 새어나왔다.
“비비안 로즈우드.”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은폐도, 비밀도 없는 얼굴이었다.
“앞으로도 이 손을 놓지 않겠소.”
비비안이 대답하려는 순간, 뒤에서 느긋한 발소리가 들렸다.
“아, 이런 장면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마커스 웰튼이었다. 약초 냄새가 밴 하얀 가운을 휘날리며 종이 묶음을 들고 걸어왔다. 실눈이 평소보다 깊게 접혀 있었다.
“공식적인 감사를 전하는 건, 지금이 적기라 판단했습니다.”
성수 앞에 멈춰 서서 비비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느릿느릿한 반존대였지만 평소의 농담기는 사라져 있었다.
“로즈우드 영애 덕분에 제 스승의 누명도 풀리고, 삼십 년간 막혔던 연구도 재개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고는 손에 든 서류를 펼쳐 보였다.
“왕립 식물학원 설립 칙서와 독초 연구 공식 복권 서류입니다. 앞으로 독초 연구는 더 이상 죄가 아닌 학문으로 인정됩니다.”
비비안의 눈이 커졌다.
“정말로… 이 모든 게.”
“네. 이 온실을 지키려 했던 모든 이의 공이 마침내. 아, 그리고 이건 로즈우드 영애에게.”
마커스가 서류 더미 아래에서 작은 상아색 봉투를 꺼냈다.
“왕립 식물학원 공동 설립자 임명장입니다. 거절은 안 됩니다. 이미 왕세자 전하께서 승인하셨으니까.”
에단이 입가를 살짝 올렸다. 비비안은 봉투를 받아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이 복받쳐 올라 손끝이 떨렸다.
“전하.”
비비안이 에단을 올려다봤다.
“내일부터 이 온실에서 같이 연구하자. 이제 독초가 아니라… 꽃으로.”
식물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성수의 회복 패턴을 기록하고, 금지 구역의 토양 성분도 분석해야 해요. 별빛 이슬풀의 pH 적응 범위도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고——”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에단이 그녀의 손등을 들어 올렸다. 입술이 살짝 닿았다.
“좋소.”
짧은 한 마디였다. 하지만 떨림이 섞여 있었다. 마커스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뒤돌아섰다.
“그럼 저는 이만. 대관식 준비 때문에 궁 전체가 난리라서요.”
실눈을 더 접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날은 그냥 눈이 안 보이는 척하는 게 최선입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성수 앞에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일몰이 깊어지며 온실 유리 돔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만개하기 시작한 꽃잎 사이로 은은한 빛이 두 사람을 비췄다.
비비안은 저 멀리 궁정 쪽을 바라봤다. 대관식 준비로 분주한 사람들 사이로, 희미하게 깃발 하나가 올라가고 있었다. 로즈우드 가문의 문장. 바람에 펄럭이며 저녁 하늘에 자리 잡았다.
돌아왔구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에단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제 독초가 아닌 꽃으로 이 나라를 채우겠습니다.”
비비안이 속삭였다. 에단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마를 맞대었다. 성수의 꽃잎 한 장이 바람에 흩날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금빛 꽃잎이 대관식을 준비하는 사람들 위로 흩어졌다.
“함께라면 무엇이든 피울 수 있습니다.”
비비안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에단의 눈에 비쳤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성수 아래 하나로 겹쳐졌다. 저 멀리 궁정 너머, 로즈우드의 깃발이 마지막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