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혈사문의 마지막 밤

12화

진사현의 왼손이 손목을 놓았다.

검끝이 서율의 목에서 가슴으로 내려갔다. 거리는 석 자.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혈사문 본대의 발소리가 회랑을 넘어 마당 입구에 닿는 순간, 진사현은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이 아니라 몸 전체를 던지는 돌진이었다.

서율이 웃음을 멈추고 왼팔을 휘둘렀다. 망가진 의수에서 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혈영만상(血影万象)!”

서율의 마지막 초식이었다. 독문무공 혈영십삼검의 궁극기. 의수에서 뿜어진 연기가 열두 개의 검영으로 갈라져 진사현의 전신을 덮었다. 각 검영은 허상이 아니었다. 내공을 실체화한 기운의 칼날이 살갗을 스치기 전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진사현은 멈추지 않았다. 발뒤꿈치로 땅을 박차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등 뒤로 검영 세 개가 지나갔다.

왼쪽 어깨 위로 하나, 오른쪽 허리께로 두 개. 피할 수 없는 궤적은 검으로 쳐냈다. 쇳소리가 세 번 울렸다.

비급의 궁극기는 서율의 것과 같았다. 같은 구결, 같은 내공의 흐름. 그러나 운용은 달랐다.

진사현은 수련실에서 백 번 천 번 반복한 기본 찌르기의 궤적 위에 궁극기의 기운만 얹었다. 검날이 붉게 타오르지 않았다. 달빛 아래 푸른 강철이 짧게 빛났다.

서율이 이를 악물었다. 오른손 검으로 진사현의 목을 베어 올리려 했다. 어깨 관통상을 입은 쪽이 아니라 멀쩡한 오른팔이었다. 검에 실린 내공이 대전당 공기를 울렸다.

그러나 빈틈은 바로 거기 있었다. 서율이 궁극기를 펼친 직후, 오른손 검을 휘두르기 위해 의수의 기운을 거둔 순간. 두 무공 사이의 틈. 정파 검법과 사파 비급을 하나의 몸에 섞은 자만이 보이는 균열이었다.

진사현은 그 틈으로 뛰어들었다.

스승에게 배운 기본 찌르기. 폐관수련에서 터득한 궁극기의 내공 운용.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졌다.

검끝이 서율의 가슴 정중앙을 향했다. 어떤 화려한 초식도 없었다. 검을 쥔 오른손이 어깨와 일직선이 되었고, 왼발이 앞으로 나아갔다. 허리가 돌아가고, 어깨가 밀고, 손목이 뻗었다.

아이들이 나무인형에 처음 검을 겨눌 때 배우는 자세였다.

서율이 눈을 크게 떴다. 오른손 검이 진사현의 왼쪽 갈비뼈를 스치며 옆으로 빗나갔다. 피가 옷을 적셨지만 진사현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검끝이 가슴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갔다.

서율의 몸이 굳었다. 진사현은 손목을 비틀지 않았다. 칼날이 심장을 관통한 감각이 손잡이를 타고 전해졌다. 그대로 한 걸음 더 밀고 들어갔다. 등 뒤로 검날이 한 뼘 빠져나왔다.

“……네놈이…….”

서율이 입을 열었다. 피가 터져 나와 말을 삼켰다. 관통된 가슴에서 검은 피가 검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웃고 있었다.

“끝까지…… 그 늙은이…….”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이빨 사이로 피가 흘렀다. 관자놀이의 핏줄이 마지막으로 꿈틀거렸다. 혈사인의 붉은 그물이 얼굴 전체로 번졌다.

“……기본 찌르기라…… 참으로…….”

서율의 오른손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쇳소리가 대전당에 울렸다. 이어서 의수를 낀 왼팔이 축 늘어졌다. 무릎이 먼저 무너지고, 이내 상체가 앞으로 쓰러졌다.

진사현은 검을 뽑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서율의 몸이 검날을 따라 미끄러져 바닥으로 내려갔다. 마지막 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짧고 가벼운 소리.

광기가 사라진 얼굴이 대리석 바닥에 닿았다.

진사현은 검을 뽑았다. 천천히, 한 치씩. 칼날이 심장을 빠져나오는 동안 피가 검을 타고 손등으로 흘러내렸다.

따뜻했다. 검을 아래로 내렸다. 칼끝에서 피가 한 방울 떨어져 바닥에 번졌다.

숨을 골랐다. 들숨. 날숨. 구법의 호흡이 아니었다. 그냥, 살아 있는 자의 호흡이었다.

마당에서 병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횃불이 전각 기둥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삼십여 명. 발소리와 쇳소리가 뒤섞였다. 진사현은 문을 등지고 서서 바닥의 서율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오른손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왼손 의수는 부서진 관절이 드러난 채 축 처져 있었다. 의수와 손목이 맞닿은 경계, 인조 피부가 벗겨진 자리에 흉터가 보였다. 매끈하게 잘린 뼈의 단면. 첫째 마디가 없는 왼손 약지의 자리.

스승이 잘랐다던 손가락이었다.

진사현은 그 흉터를 오래 바라보았다. 비급을 훔치려다 빼앗긴 손가락. 그리고 그 손가락을 대신한 의수로 지금껏 사람을 죽여 온 사내. 스승이 마지막까지 가르침을 주지 않았던 제자.

복수는 끝났다.

해방감은 없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비어 있었다. 마치 심장이 뚫린 것은 서율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가 싶을 만큼 허했다.

지난 삼 년 동안 이 순간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침에 눈 뜨고 밤에 눈 감을 때까지, 검을 쥐고 숨을 쉬고 걸음을 옮기는 모든 순간이 오늘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오늘이 끝났다.

내일이 없었다.

진사현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오른손에 쥔 채로 손등의 피가 마르는 것을 느꼈다. 왼손이 떨렸다. 손목을 감싸 쥐려다 멈추었다. 스승의 손은 이제 없었다.

대전당 문 밖에서 병사들의 함성이 멈췄다. 대장으로 보이는 자의 목소리가 명령을 외쳤다. “부문주를 확인하라! 안에 놈이 있다!” 쇳소리가 가까워졌다. 발소리가 돌계단을 밟고 올라왔다.

진사현은 몸을 돌렸다. 문을 향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기둥으로 걸어갔다. 세 걸음.

왼손을 뻗어 붉은 칠을 한 원기둥을 짚었다. 차가웠다. 손바닥에서 나무의 결이 느껴졌다. 기둥에 체중을 실었다.

숨을 들이켰다. 갈비뼈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서율의 마지막 검이 스친 자리였다.

깊지는 않았다. 살갗이 찢어지고 근육 일부가 베였을 뿐이다. 피가 흘러내려 허리춤을 적셨다. 진사현은 기둥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병사들이 문을 열어젖혔다.

진사현은 혈사문 본거지 후문을 등 뒤로 밀었다. 철제 문짝이 돌축에 끌리며 낮은 신음을 냈다.

오른손에 쥔 검은 칼집째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 왼쪽 어깨의 상처는 피가 멎었으나 옷감에 붙은 핏자국이 바람이 불 때마다 차가워졌다. 숲길로 접어들자 해가 기울어 나무 사이로 누런 빛이 얇게 깔렸다.

스무 걸음쯤 걸었을 때, 길 왼쪽 상수리나무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진사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검을 짚은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위소월이 나무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품에는 비상 연락용 화통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진사현의 얼굴, 어깨, 검을 짚은 손을 차례로 훑었다. 입술이 달싹였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나.”

진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가늘었다.

위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한 걸음 다가서더니 시선이 진사현의 왼쪽 손목에 멎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감싸쥔 부위였다. 위소월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그 손목 위에 포개졌다.

손가락이 맥을 짚듯 눌렸다. 내공의 흐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체온을 확인하려는 손길이었다. 진사현의 왼손 근육이 굳어졌다.

스승이 생전에 내공 점검할 때면 으레 잡던 자리였다. 진사현의 어깨 너머로 스승의 손이 아닌, 위소월의 손이 얹혀 있다는 사실이 차이로 다가왔다. 근육이 조금씩 풀렸다.

처음으로, 그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위소월의 손가락이 떨렸다. 새끼손가락을 접지 않았다. 긴장이 풀린 증거였다.

“끝난 겁니까.”

묻는 말투가 아니었다. 확인에 가까웠다.

“끝났다.”

진사현은 검을 들어 땅에 꽂았다. 칼날이 흙에 반쯤 박혔다.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왼손을 허공에 잠시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빈손의 감각이 낯설었다.

위소월이 손목을 감싼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맥박이 그녀의 손바닥에 전해졌다. 느리고, 규칙적이었다. 복수 직후의 심박이라기엔 지나치게 고요했다.

“안으로는 아무것도 없어요.”

위소월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공이 거의 바닥이에요. 체온도 낮고요.”

“안다.”

진사현은 상수리나무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잎사귀 사이로 부서진 햇빛이 그의 눈에 닿았다.

“비어 있어서 좋다.”

말하고 나서 자신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복수심이 사라진 자리에는 진공 같은 적막이 있었다. 분노도, 통쾌함도, 슬픔도 아닌—그저 빈 공간. 그 빈 공간이 지금은 견딜 만했다.

위소월이 손목을 놓았다. 대신 그의 팔뚝을 받쳐 어깨에 두르려 했다. 진사현은 몸을 약간 옆으로 틀었다. 거절은 아니었다. 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함께 가자.”

위소월이 말했다. 먼저 숲길을 걸어가며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꺼낸 말이었다.

“강호는 넓으니까.”

진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위소월의 품에 찬 단도로 향했다. 가죽 칼집에 손때가 묻은 단도였다. 처음 만난 날 밤, 그녀의 목에 겨누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시선만 한 번 주었을 뿐, 고개를 돌려 숲길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땅에 꽂힌 검을 뽑았다. 하지만 칼집에 꽂지 않고 그대로 들었다. 오른손에 익숙한 무게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어깨가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 숲길의 낙엽이 발에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리듬을 만들었다.

언덕길에 접어들자 숲이 점차 옅어졌다. 나무 사이로 서쪽 하늘이 드러났다. 노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붉은빛이 구름 아래를 물들여 능선 위로 번지고 있었다.

진사현이 발걸음을 늦추었다.

언덕 정상에서 강호가 보였다. 먼 산자락이 겹겹이 쌓여 회색빛 실루엣을 이루고, 그 아래로 길이 실처럼 이어져 있었다. 강물인지 안개인지 모를 띠가 지평선에 걸쳐 있었다.

위소월이 한 발짝 앞서다가 멈춰 섰다. 진사현의 시선을 따라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 길로 가면, 어디로 가는 거죠.”

“남쪽으로 가면 하남, 동쪽으로 가면 안휘.”

진사현은 검을 들어 땅에 다시 꽂았다. 이번에는 칼집째가 아니라 칼날이 흙에 박혔다. 손잡이가 허공에 선 채로 멈춰 있었다.

그는 검에서 손을 떼었다.

오른손이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어떤 습관이 손바닥을 다시 손잡이로 향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내렸다. 손가락이 가볍게 구부려졌다 펴졌다.

위소월이 그 손을 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품에서 단도를 뽑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진사현의 검 옆에.

“왜.”

진사현의 질문은 단어 하나였다.

“모르겠어요. 그냥….”

위소월이 자신의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옆에 놓고 싶었어요.”

진사현은 단도를 집지 않았다. 대신 검을 땅에 꽂힌 채로 놔두고 돌아섰다. 발걸음이 언덕길을 향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가 걷기 시작하며 말했다. 등 뒤로 던진 말투였다.

“상관없어요.”

위소월이 따라 걸었다. 목소리가 약간 빨라졌다.

“저도 가는 길이니까.”

두 사람의 발소리가 다시 낙엽 위에서 섞였다. 한 박자 느린 걸음과 반 박자 빠른 걸음이 번갈아 땅을 디뎠다.

언덕길이 완만해지자 노을이 정면을 비추었다. 붉은빛이 두 사람의 옆얼굴에 닿아 윤곽을 흐렸다. 그림자가 길게 뒤로 뻗어 숲 쪽으로 이어졌다.

진사현은 왼손을 들어 눈썹 끝의 칼자국을 한 번 문질렀다. 스승이 남긴 상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흉터를 만질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은 스승이었다.

공허는 여전했다. 복수심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공허 속에서 발소리가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사실을 그는 인지하고 있었다.

위소월이 속도를 약간 올려 진사현의 오른쪽으로 왔다. 바람이 불자 그녀의 은비녀가 딸깍 소리를 냈다.

“저녁이에요.”

위소월이 말했다. 감탄문도, 의문문도 아닌 단순한 문장이었다.

“그렇군.”

진사현은 오른손을 펴서 바람을 스치게 했다. 주먹 쥐는 버릇이 있었던 손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노을빛이 능선을 넘어 하늘 절반을 물들였다. 강호로 이어지는 길은 붉게 타오르는 듯 보이다가, 서서히 보랏빛으로 변해갔다.

두 사람은 발을 내디뎠다. 진사현의 손은 아무것도 쥐지 않았다. 위소월의 곁에 가만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길을 걸었다.

진사현은 그 틈으로 뛰어들었다.

스승에게 배운 기본 찌르기. 폐관수련에서 터득한 궁극기의 내공 운용.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졌다. 검끝이 서율의 가슴 정중앙을 향했다. 어떤 화려
혈사문의 마지막 밤1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