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가면의 소리꾼

12화

가면이 떨어졌다.

은빛이 공중에서 한 번 번쩍이고, 차가운 바닥에 부딪혀 짧은 소리를 냈다.

유여연의 얼굴 위로 촛불이 쏟아졌다. 눈썹, 코끝, 입술까지 또렷했다. 그리고 왼쪽 목덜미. 옷깃 밖으로 드러난 별 모양의 흉터가 불빛에 붉게 물들었다.

이휘의 손에서 어좌 손잡이가 빠져나갔다. 손가락 끝이 얼얼했다.

저 흉터.

어둠 속에서 물이 차오르던 우물. 차가운 벽면을 긁던 손톱. 그리고 그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자신을 꼭 붙잡고 올려주던 손. 어른들이 달려오기 직전, 풀밭에 쓰러진 작은 소녀의 옷깃 사이로 번졌던 붉은 빛.

“······네가.”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되지 않았다.

유여연은 그를 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태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가면 없이 드러난 눈동자가 촛불보다 뜨거웠다.

“선왕비 마마의 노래를 바치겠나이다.”

태후가 반 걸음 물러섰다. 염주를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 곡을 부르는 순간······ 네 목숨은 없다.”

의금부 병사들이 칼을 뽑았다.

태후의 붉은 손톱이 허공을 긁었다.

“저년을······!”

“물러서라.”

이휘의 목소리가 정전을 내리쳤다. 병사들의 칼끝이 흔들렸다. 그는 한 계단 내려섰다. 곤룡포 자락이 발목에 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노래를 끝까지 듣겠다.”

태후가 돌아보았다.

“전하. 이것은 태묘의 의례입니다. 국모로서······”

“그 국모가 선왕비를 독살했느냐.”

이휘의 말에 대신들 사이로 옷깃 스치는 소리가 번졌다. 윤공이 증언서를 완전히 꺼내 들었다. 하태의가 두 손으로 악보를 높이 받쳐 올렸다.

태후가 웃었다. 차갑고 얇은 웃음이었다.

“하태의. 자네는 사약고에서 쫓겨난 지 오래지 않았나. 그런 자의 말이 증거가 될 성 싶으냐.”

“그럼 내가 직접 듣고 판단하지.”

이휘가 유여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은제 가면이 가로막지 않은 시선이었다. 밤마다 숨소리로만 알던 존재가, 지금 낮의 빛 아래 서 있었다.

유여연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깊은 절이었다. 일어나며 그녀가 숨을 들이쉬었다.

첫 소리가 실크를 찢듯 퍼졌다.

낮았다. 한낱 입김 같았다. 그러나 그 소리가 번지는 순간, 가장 가까운 촛불이 일제히 한 번 깜빡였다.

두 번째 음. 유여연의 목울대가 가볍게 떨렸다. 하태의의 악보 위로 마른 먹 냄새가 흔들렸다.

그 노래는 모두가 아는 자장가였다. 어머니가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부르던 그 선율. 그런데 무엇이 달랐다.

소리의 끝마다 숨결이 감겨 있었다. 마치 오래된 비단을 품에 안은 듯한 울림. 맥박이 느려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감각.

이휘의 관자놀이에서 오래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수년째 그를 괴롭히던 불면의 그림자가, 소리의 결을 따라 한 겹씩 벗겨져 나갔다.

이 노래를 안다.

우물에서 들었던 소녀의 목소리. 그 선율을 지금, 바로 여기서 다시 듣고 있었다.

태후의 입술이 벌어졌다. 무언가 명령하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붉은 손톱이 파르르 떨리며 탁자 모서리를 긁었다.

“그 노래······.”

태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노래를, 내가······.”

유여연이 눈을 감았다. 소리의 높낮이가 바뀌었다. 원곡은 지금부터였다. 아버지의 비망록과 하태의의 악보가 한 점에서 만난 그 선율이, 제례의 공기를 갈랐다.

태후의 손이 탁자 위를 긁었다. 붉은 손톱이 나무에 홈을 파며 삐걱거렸다.

“내가 그 찻잔을······ 내 손으로······.”

신료들 사이로 숨소리가 멎었다. 윤공이 증언서를 품에서 꺼내 펼쳤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가득 채웠다.

태후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선왕비가 그 자식을 위해 부르던 노래. 밤마다······ 밤마다 울려 퍼지는 그 소리가······.”

붉은 손톱이 탁자 가장자리를 길게 끌었다.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음을 거꾸로 돌렸다. 악사에게 시켰다. 그리고 그날 밤······ 내가 차를 들고 들어갔다. ‘이제 그 노래는 영원히 잠들 것이다’······ 내가 말했다. 내가! 그리고 유씨 가문. 그 악보를 본 유씨······ 모두······.”

태후의 무릎이 꺾였다. 붉은 치마폭이 바닥에 깔렸다. 염주가 다시 굴러 멀리 흩어졌다.

유여연의 노래가 멈추지 않았다. 소리는 더 깊어졌다. 선율이 흉터 위로 스치듯 흐르고, 그 흐름이 종묘의 기둥을 한 번 휘감았다.

이휘가 완전히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그의 눈에 더는 혼란이 없었다.

유여연의 마지막 음이 길게 뻗었다가, 촛불 하나가 심지 끝에서 조용히 꺼지듯 사라졌다.

몇 번의 숨소리 뒤, 태후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 붉은 손톱 사이로 나무결이 패여 있었다. 눈은 떠 있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입가에는 침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휘가 어좌에서 내려와 유여연 앞에 섰다. 등 뒤로 곤룡포가 드리웠다. 그가 칼을 뽑아 땅에 내리꽂았다. 칼날이 푸르게 빛났다.

“이 여인의 노래는 역모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적막을 찢었다.

“치유였다.”

의금부 병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폐서인 민씨를 당장 압송하라. 태묘의 신위 앞에서 죄를 자백했으니······ 다시는 해를 보지 못할 곳에 가두라.”

병사들이 태후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붉은 손톱이 허공을 스치고, 끌려나가는 붉은 치마폭이 문지방에 한 번 쓸렸다.

이휘가 돌아서서 신료들을 향했다.

“금지된 창 안혼곡은 오늘부터 환세가라 부르리라. 이 곡을 억누른 모든 법과 금제는 이 시각부터 무효다.”

하태의가 깊이 고개 숙였다.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했다. 윤공이 증언서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휘가 유여연을 보았다.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목의 흉터 위로 눈물 한 줄이 흐르고 있었다.

“유씨 가문은 누명을 벗었다. 그대의 아버지께서 남기신 진실은 오늘부터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유여연이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가 약간 잠겨 있었다.

“전하······.”

“그리고.”

이휘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낮은 목소리였다. 신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스스로 가면을 벗어준 그대에게······ 궁중 악사장의 인수를 내리겠다.”

유여연의 눈이 커졌다. 이휘의 입가가 미세하게 풀렸다.

“내 잠을 지켜준 것도, 진실을 찾아준 것도······ 모두 그대였다.”

소취가 정전 밖 기둥 뒤에서 손을 모아 쥐었다. 붉은 팔찌가 손목에서 살짝 흔들렸다.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태의가 악보를 가슴에 안은 채 일어섰다. 그의 입술 사이로 조용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보셨습니까, 마마. 살아서······ 그 선율이 완성되었습니다.”

밤이었다.

침전의 촛불은 서너 자루뿐이었다. 유여연은 문 앞에 서 있었다. 더는 은제 가면이 없었다. 발치에 부드러운 불빛이 닿았다.

이휘가 발 쪽에서 손을 내저었다. 병사들도, 엄내관도 물러났다. 문이 닫혔다.

“가까이.”

유여연이 한 걸음 다가갔다. 발소리가 바닥에 스몄다.

“그 흉터.”

이휘가 손을 들었다. 손끝이 목덜미의 별 문양 위에 닿을 듯 멈추었다.

“우물에서······.”

“네.”

유여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촛불에 흔들렸다.

“소녀는······ 열 살이었사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이 너무 차가웠기에······.”

“놓지 않았다.”

이휘의 목소리가 떨렸다. “끝까지.”

유여연이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이휘가 손을 내려 그녀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일어나라. 이젠 아무에게도 무릎 꿇지 마라.”

그가 탁자 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은제 가면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휘의 것, 유여연이 벗어 놓은 것.

“내일······ 이것들은 내무부로 보내겠다.”

유여연이 가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제 이 밤을 지키는 자는 없을 것이다. 대신······.”

이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끝은 더 이상 싸늘하지 않았다.

“아침을 함께 맞을 사람이 있을 뿐.”

멀리서 종소리가 한 번 울렸다. 긴 밤의 끝을 알리는 소리였다. 유여연의 눈물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이휘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주 천천히, 한 번의 숨결만큼.

“내 불면은 끝났다. 혼자 감았던 모든 눈, 이제 두 사람의 것이다.”

유여연이 손을 들어 그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따뜻한 온기가 번졌다. 긴 침묵 끝에,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말해 보아라.”

“소녀도······ 같은 꿈을 꾸고 싶사옵니다.”

촛불이 반쯤 줄었을 무렵. 침전의 적막이 완전히 내려앉기 직전, 누군가 조용히 흥얼거렸다.

열 살 아이가 들었을 선율. 물가에서, 우물 밖에서, 별빛 아래서 울리던 그 자장가.

이제는 금지된 노래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낮은 소리로 번졌다. 더는 밤을 피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유여연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깊은 절이었다. 일어나며 그녀가 숨을 들이쉬었다.

첫 소리가 실크를 찢듯 퍼졌다.

낮았다. 한낱 입김 같았다. 그러나 그 소리가 번지는 순간,
가면의 소리꾼1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