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11화

문이 닫혔다. 발걸음도 함께 멈췄다.

로즈마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복도에서 느낀 파장은 틀림없었다. 문신에서 뿜어져 나온 마법의 잔향. 한 번 겪은 적 있는 감각이다. 어머니의 작업실에서, 사고가 터지기 직전에 공기가 똑같이 떨렸다.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

“한도영!”

촛불이 간신히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한도영은 책상 앞에 서 있고, 왼쪽 소매는 어깨까지 완전히 걷어 올렸다. 팔 전체에 번진 문신이 촛불 아래서 검붉게 빛난다.

그쪽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다.

“로즈마리.”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통증을 삼킨 톤이다.

“그 파장…… 당신한테서 온 거지?”

로즈마리가 다가섰다. 시선은 왼팔에 고정됐다. 문신은 팔목에서 시작해 팔꿈치를 넘고, 위팔 중간을 지나 어깨 쪽까지 번져 있었다. 붉은 발적이 문양 주변을 따라 피부를 물들였다.

“내가 느꼈어. 마법적 파장을.”

숨을 들이켰다.

“어머니 이후로 처음이야.”

한도영은 오른손으로 수첩을 집어 들었다.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이 문양. 고대 측량 기호다.”

수첩을 상대 쪽으로 돌렸다. 왼팔 문신의 패턴과 똑같은 기호들이 연필로 스케치돼 있다. 60도 교차각의 격자. 원형 노드에서 뻗어나간 가지들.

“의식장 바닥 문양과도 같다. 크세니아의 혈서 계약과도.”

로즈마리는 스케치와 실제 문신을 번갈아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이 문신은 단순한 각인이 아니야. 내 생명력을 이 세계의 어떤 좌표에 묶어두는 장치다.”

한도영이 수첩의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고대어 단어들이 빼곡히 적혀 있고, 그 옆에 번역이 병기돼 있다.

“계약 조건을 분석했다. 목숨, 기억, 종속.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돼 있어.”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 거야?”

“아니.”

연필을 쥐었다. 수첩의 빈 페이지에 빠르게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세 개의 선을 긋는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세 조건은 각각 다른 대상을 전제한다. 목숨은 소환된 자의 것이다. 기억도 마찬가지. 하지만 종속은 소환자를 향한다.”

연필이 멈췄다.

“한 계약이 동시에 두 방향의 의무를 부과할 수는 없어. 고대 측량 기호의 논리로도 그래.”

로즈마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이용하려는 거구나.”

“이 구조는 측량 좌표 체계와 동일하다. 좌표는 하나의 기준점에서만 정의될 수 있어. 두 개의 기준점이 동시에 존재하면 좌표 자체가 무효화된다.”

한도영이 수첩을 내려놓고 왼팔을 들었다.

“내가 직접 의식을 진행할 거야. 계약 조건의 모순을 정확히 지목하면, 문신이 반응할 거다. 고대 측량 기호는 논리를 거스르지 못해.”

“실패하면?”

로즈마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잠시 시선을 마주했다.

“편입이 가속될 거다.”

“그럼.”

“그래도 해야 한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하지만 연필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기한이 오기 전에 문신이 내 몸 전체를 덮을 거야. 지금 속도로 보면 열흘도 안 남았어.”

로즈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첩 속 고대어, 스케치, 그리고 한도영의 팔에 새겨진 문신 사이를 시선이 오갔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한도영이 수첩을 집어 들었다.

“문 옆에 서 있어.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끝났다고 말하기 전에는 방해하지 마.”

할 말을 삼켰다. 평소 같으면 위험성을 따졌을 것이다. 준비 부족을 지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쪽 눈빛은 측량할 때와 똑같았다. 확신이 아니라 계산을 끝낸 자의 고요함.

물러나 문 옆에 섰다.

한도영은 방 중앙으로 이동했다. 책상을 벽 쪽으로 밀고 공간을 확보했다. 그대로 바닥에 앉는다. 왼팔을 앞으로 뻗어 바닥에 손바닥을 댔다. 문신 전체가 촛불 아래 완전히 드러났다.

수첩을 왼손 옆 바닥에 펼쳐 놓았다. 고대 측량 기호와 계약 조항의 고대어 해석이 적힌 페이지.

오른손 검지를 문신의 시작점, 손목의 원형 노드에 대었다.

“좌표계의 원점. 소환된 자의 생명력.”

손가락이 천천히 문양을 따라 올라갔다. 60도로 교차하는 첫 번째 격자점에서 멈췄다.

“첫 번째 조건. 목숨. 대상은 소환된 자 자신.”

문신 부위에서 열기가 서서히 올라왔다. 이전의 급격한 발열과는 다르다. 깊은 곳에서 천천히 달궈지는 감각.

손가락이 다음 격자점으로 이동했다. 팔꿈치 바로 아래.

“두 번째 조건. 기억. 대상은 소환된 자 자신.”

열기가 팔 전체로 퍼졌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하나 흘러내린다. 로즈마리는 벽에 기댄 채 숨을 멈췄다.

이윽고 위팔 중간, 새로 번진 문양의 가장 위쪽 노드에 손가락이 닿았다.

“세 번째 조건. 종속. 대상은 소환자.”

눈을 감았다. 오른손 검지를 그대로 노드에 고정한 채 숨을 들이쉰다.

“세 조건의 대상은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의 측량 좌표계에 두 개의 기준 원점이 존재할 수 없다. 이 계약은 고대 측량 기호의 논리에 의해——”

목소리가 한순간에 끊겼다.

문신 전체가 빛났다. 붉은색도 푸른색도 아닌, 살갗 아래에서 올라오는 뼛속 같은 백색광. 로즈마리는 눈을 가렸다. 방 안의 촛불이 한꺼번에 꺼졌다.

몸이 뒤로 젖혀졌다.

팔을 타고 올라가던 빛이 순간 어깨를 넘었다. 문양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번진다. 손목에서 시작된 가지 패턴이 팔꿈치를 넘고 위팔을 지나 어깨에 닿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쇄골을 타고 가슴 쪽으로 뻗어간다.

“한도영!”

달려나갔다.

그 순간 상대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고, 이내 피가 터져 나온다. 선홍색이 턱과 목을 적셨다.

“안 돼!”

무릎을 꿇고 옆에 붙었다. 어깨를 잡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문신이 여전히 빛나고 있다. 빛은 점점 약해지고 있지만 열기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한도영의 몸에서 타는 듯한 열이 뿜어져 나온다.

“계약이…… 조건 모순을……”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으려 한다. 피가 입술을 타고 흘렀다.

“……문신이 아니라 좌표를 고정하는 거였어. 계약 자체가…… 나를 세계 규칙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말이 끝나기 전에 몸이 다시 한 번 경련했다. 눈동자가 위로 돌아간다. 몸이 축 늘어졌다.

“한도영!”

얼굴을 감싸 쥐었다.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의식을 완전히 잃은 상태다.

즉시 왼쪽 손목을 잡았다. 맥박을 확인하려던 손가락이 문신 부위에 닿았다.

순간.

로즈마리의 오른손 끝이 얼얼해졌다. 작은 전류가 손끝에서 손목을 타고 팔로 올라오는 듯한 감각. 손을 떼지 못했다.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열네 살 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마법을 쓰던 날 밤. 작업실에 가득 찼던 바로 그 떨림. 억누르고 숨겼던 그 감각이 한도영의 문신을 통해 깨어나고 있다.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 어머니의 최후가 뇌리를 스쳤다. 마을 하나를 불태운 마법 사고. 그리고 그로 인해 죽은 사람들.

하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

손가락을 펼쳐 문신 부위를 감쌌다. 얼얼함이 손바닥 전체로 퍼진다. 문신의 열기와 손의 감각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무서워해도 되는 건 나중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른손으로 문신을 감싼 채, 왼손으로 상대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심했다. 호흡은 얕고 불규칙하다. 바닥에는 토한 피가 고여 있다.

이를 악물었다. 두려움을 삼키는 데 3초가 걸렸다. 그리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상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책상 근처에 놓인 간이 침상까지 다섯 걸음.

한 걸음씩 신중하게 옮겼다. 머리가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문신의 열기가 옷감 너머로도 느껴진다.

침상에 눕혔다. 베개를 머리 밑에 받치고, 담요를 접어 다리 아래 넣었다.

왼팔을 조심스럽게 펴서 몸 옆에 두었다. 문신은 이제 팔 전체를 덮고 있다. 손목에서 시작된 가지 패턴이 어깨를 지나 쇄골 아래까지 번져 있었다. 붉은 발적은 여전했지만 빛은 사라졌다.

물수건을 적셨다. 이마와 목을 닦고, 피 묻은 입가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손이 약간 떨리고 있지만 움직임은 정확했다.

“바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준비도 없이 혼자서.”

하지만 알고 있었다. 준비 없이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오늘 밤 저쪽은 모든 지식을 동원했다. 고대 측량 기호를 해석하고, 계약서의 고대어를 분석하고, 모순점을 찾아내고, 의식을 설계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른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차가웠다. 문신이 뿜어내는 열기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은 냉기를 띠고 있다.

“네가 말한 대로야. 지식만으로 안 되는 게 있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의식 불명이지만 표정은 일그러지지 않았다. 차분한 평소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지식만으로 안 된다고 포기할 사람이 아니잖아.”

오른손이 여전히 얼얼했다. 마법적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도영의 문신 가까이 있을수록 감각이 강해졌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 평생 억누르려고 했던 마법의 흔적. 하지만 지금은 두렵지 않았다. 두려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살리는 일이다.

일어나 물주전자에서 물을 더 따랐다. 깨끗한 천을 적셔 왼팔 문신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다. 젖은 천이 닿자 문신 부위에서 미세한 김이 올라왔다.

그때였다.

한도영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눈꺼풀이 떨리더니 서서히 열렸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입술이 달싹인다.

“좌표……”

로즈마리는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나를 이 세계의 법칙 자체로 편입시키려는 거야.”

목소리는 갈라지고 낮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추론을 완성한 자의 단호함이 담겨 있다.

한도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의식이 다시 가라앉는 듯했다.

그 순간,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거친 발걸음. 이어서 문을 두드리는 다급한 소리.

“도영 씨!”

파스칼의 목소리였다. 숨이 차 있고, 공포가 묻어 있다.

“역병이야! 우리 영지까지 번졌어!”

침상 옆에서 일어섰다. 이마에 얹었던 젖은 천이 바닥에 떨어졌다.

문신의 열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손끝의 얼얼함도 사라져간다. 하지만 알았다. 마법적 감각은 사라진 게 아니다. 그저 다음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파스칼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빨리! 영민 구역 우물가에서 시작됐어!”

침상에 누운 한도영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는 수첩이 펼쳐져 있다. 고대 측량 기호와 계약서 해석이 빼곡히 적힌 페이지.

수첩을 집어 침상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문 쪽으로 돌아섰다.

지금 깨울 수는 없다. 저쪽이 내린 결론은 이제 그녀가 알고 있다. 이 세계의 법칙 자체로 편입되는 것.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깨어날 때까지, 그녀가 막아야 한다.

문을 열자 파스칼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숨을 헐떡이고 있고, 옷에는 진흙이 튀어 있다.

“로즈마리 씨…… 도영 씨는……”

“지금은 못 일어나.”

방 안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부터 갈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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