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25화

아침 햇살이 느릿하게 창틀을 넘었다. 먼지가 공중에 떠돌다 책상 위로 가라앉았다.

한도영은 수첩을 펼쳤다. 마지막 장은 비어 있었다. 숯연필을 집어 들었다.

소환 계약 분석 완료. 새로운 계약은 영민과의 자발적 합의로 성립.

붓글씨는 아니었다. 짧고 명료한 활자체. 연필을 내려놓고 표지를 한 번 쓸어내렸다.

이 수첩이 없었으면 계약서 문양의 좌표도, 역병 확산 경로의 삼각형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기억 속의 측량 공식과 이 세계의 격자 구조를 연결한 증거. 한도영은 수첩을 덮었다.

문이 열렸다. 에리히였다. 손에 칙서 한 통을 들고 있었다. 독수리 문장의 밀랍 인장이 떼어진 상태.

“자문관.”

에리히가 칙서를 탁자 위에 올렸다. 양피지 끝이 살짝 말려 있었다.

“왕실에서 변경백령 자치권을 인정하는 문서다. 자네의 집무실 공식 배치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고.”

한도영은 칙서를 펼쳤다. 조문 몇 개를 눈으로 훑었다. 자치권의 범위, 화폐 독립 조항, 그리고 '항구적 자문관 한도영'이라는 글자. 잉크는 어젯밤에 마른 듯했다.

“오늘부터 이 집무실을 쓰도록 하게.”

에리히의 푸른 눈이 한도영의 책상 위 수첩에 잠시 머물렀다.

“원래 백작 전용이오.”

“그쪽도 같이 쓰면 된다. 집무실이 넓으니까.”

에리히가 입가를 살짝 올렸다. 기사 시절의 거친 웃음은 아니었다. 귀족으로서 기품을 유지하려는 절제된 표정이었다.

한도영은 수첩을 책상 서랍에 넣었다. 서랍이 닫혔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다.”

에리히가 허리에 한 손을 얹었다. 전직 기사의 몸에 밴 자세였다. 턱 근육이 살짝 긴장했다.

“어제 광장에서의 계약 전환은 자네가 이미 예측하고 있었나.”

“예측이 아니라 가설이었다. 집단 합의로 개인 구속 계약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논리. 민의 헌장을 발표할 때 본 구조와 같다.”

“가설이었으면 실패할 확률도 있었다는 뜻이군.”

“있었다. 그리고 그 확률을 내가 계산했었다.”

에리히가 잠시 침묵했다. 오른손으로 턱을 한 번 쓸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질문이 하나 더 있어.”

“말해도 된다.”

“계약 전환식이 끝난 뒤에도 자네가 이곳에 남겠다고 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한도영이 대답하기 전에 문이 다시 열렸다.

로즈마리였다. 느릿한 걸음. 허리에는 여전히 약초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손에는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붉은 머리가 아침 빛에 살짝 바랬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걸 먼저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로즈마리가 두루마리를 책상 위에 놓았다. 양피지가 말리는 소리가 났다.

“영민들이 새벽부터 광장에 모여서 돌린 거야. 서명은 못하는 사람도 손도장은 찍었고.”

한도영이 두루마리를 풀었다. 길었다. 팔을 뻗어도 끝이 탁자 밖으로 흘러내렸다. 손으로 쥔 부분만 펼쳐 읽었다.

글자를 아는 사람이 적어 글씨는 몇 되지 않았다. 대부분 손바닥 전체를 먹물에 찍은 자국이었다. 어른 손도장, 아이 손도장. 겹치고 번진 흔적까지.

“무슨 내용이지.”

“공동 감사문. 자문관님이 영지에 머물러 주셔서 고맙다는 내용이야. 법적 효력은 없어.”

로즈마리가 한도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호박색 눈이 두루마리 위에서 잠시 머물렀다.

“법적 효력은 없어도, 이건 네가 받은 첫 번째 공식 문서야. 영민이 자발적으로 준.”

한도영은 왼손등을 내려다봤다. 소환 계약 문신은 사라졌다. 대신 희미한 은빛 맥이 손등 정맥을 따라 얇게 퍼져 있었다. 어젯밤 로즈마리가 만졌던 자리.

“이것이 남는 이유다.”

한도영이 손등을 로즈마리에게 보여주었다. 은빛 맥이 창문 빛을 받아 살짝 반짝였다.

“소환 계약은 소멸했지만, 영민과의 계약 흔적은 물질계에 각인되어 있다. 지우려면 또 하나의 의식이 필요할 거다.”

로즈마리가 손을 뻗어 그의 왼손등을 덮었다. 손가락이 은빛 맥 위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지울 생각 없지.”

부정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한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마리의 입술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작게, 확실하게.

“이것이 내가 여기 머무는 진짜 이유다.”

한도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간결했다. 숫자와 논리로 말하던 톤이었지만 종결부는 평소보다 약간 낮았다.

에리히는 조용히 물러나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로즈마리가 한도영의 손을 꼭 쥐었다. 손바닥 온기가 은빛 맥 위로 전해졌다.

“나도 할 말은 많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해.”

로즈마리의 말투는 평소 그대로였다. 친근하고 솔직하게. 다만 종결부가 평소보다 조금 더 느렸다.

“네가 이제 내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두루마리는 탁자 위에 반쯤 펼쳐져 있었다. 손도장과 서명이 빛에 반짝였다. 계약 전환식을 위해 광장에 모였던 그 발걸음들이 지금은 잉크로 남아 있었다.

문이 가볍게 두드려졌다. 짧은 노크. 두 번.

파스칼이었다. 왼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다. 측량용 숯연필 자국이 손가락 사이에 묻어 있었다. 긴장하면 귀가 빨개지는 버릇은 여전했다.

“들어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한도영이 대답했다. 파스칼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발걸음은 반년 전보다 훨씬 곧았다.

“측량사 길드 설립 허가 신청서입니다. 어젯밤에 초안을 잡고 오늘 아침에 정서했습니다.”

파스칼이 종이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렸다. 필체는 아직 서툴렀다. 글자를 깨친 지 반년밖에 안 된 사람의 글씨였다.

한도영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길드 규약 초안, 회원 자격 기준, 교육 과정 개요. 한 장씩 넘겼다. 세 번째 장에서 손이 멈췄다.

“첫 공식 측량 프로젝트가 명시되어 있다. 변경백령의 새 화폐 유통 경로 지도 작성.”

“네. 독자 화폐를 안정적으로 유통하려면 지형과 마을 간 거리를 기준으로 경로를 최적화해야 합니다. 제가 배운 측량 방식으로 충분히 가능한 작업입니다.”

파스칼의 목소리는 더듬지 않았다. 존댓말 어미는 그대로였지만 톤은 또렷했다. 시선도 한도영의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좋은 판단이다.”

한도영이 서류를 에리히에게 건넸다. 백작은 세 장을 빠르게 훑었다. 푸른 눈이 조문을 따라 좌우로 움직였다.

“허가한다.”

에리히가 깃펜을 들어 서류 하단에 서명했다. 아렌트 가문의 독수리 문장 인장을 옆에 찍었다.

파스칼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셨다. 귀가 붉어졌다.

“한 가지 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크로이츠 변경백령의 아이들에게도 측량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파스칼의 회색 눈이 반짝였다.

“제 부모님이 그 땅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역병이 아니라, 그걸 만든 사람들 때문에. 하지만 거기 사는 아이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배움을 얻으면,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에리히가 잠시 생각했다. 오른손 검지로 탁자 모서리를 한 번 두드렸다. 기사 시절부터 있던 버릇이었다.

“적대 관계인 영지의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것은 정치적 민감한 일이야.”

“압니다.”

“하지만 막지는 않겠다. 변경백령의 측량사 길드 책임자로서 자네가 결정할 일이니.”

파스칼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눈가가 약간 젖어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파스칼이 서류 사본 한 통을 챙겨 들었다. 에리히가 영지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자, 그럼 유통 경로 지도 작성을 논의해 보세.”

에리히와 파스칼이 지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백작의 굵은 손가락이 동부 농경지에서 서부 교역로까지 선을 그었다. 파스칼이 허리 주머니에서 숯연필을 꺼내 지도 위에 가볍게 표시했다.

한도영은 창가로 걸어갔다.

밖은 완연한 아침이었다. 광장의 흙바닥에는 어젯밤 계약 전환식을 위해 사람들이 서 있던 자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발자국들이 겹쳐져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었다.

로즈마리가 곁으로 왔다. 말없이 나란히 섰다.

광장 끝에서 아이 둘이 손을 잡고 뛰어가고 있었다. 어제 어머니 손을 잡고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던 아이였다. 지금은 빈손으로 달리고 있었다. 입가가 웃고 있었다.

“계산서는 끝났다.”

한도영이 작게 말했다. 로즈마리만 들을 수 있는 크기.

“이제는 건설할 차례다.”

왼손등의 은빛 맥이 창문 빛에 한 번 반짝였다. 촛불보다 약하고, 별보다 오래가는 빛.

탁자 쪽에서는 에리히와 파스칼이 지도를 사이에 두고 목소리를 주고받고 있었다. 백작의 낮은 목소리와 파스칼의 또렷한 대답이 번갈아 울렸다. 지도 위로 손가락이 움직이며 새로운 선을 긋고 있었다.

로즈마리가 한도영의 왼손을 다시 잡았다. 손가락이 은빛 맥 위에 살짝 포개졌다.

“그럼 나도 옆에서 건설할게.”

한도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호박색 눈이 정면으로 그를 응시했다. 웃음기가 입가에 남아 있었지만 눈빛은 더 깊었다.

“약속.”

짧은 단어 하나가 집무실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창밖에서는 먼지가 살짝 일었다. 바람이 광장을 가로질렀다. 영민 몇 명이 우물가에 모여 두레박을 올리고 있었다. 물이 양동이에 철썩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한도영은 창문 유리에 비친 네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과 로즈마리, 그리고 탁자에서 지도를 펼치고 있는 에리히와 파스칼.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었다. 새 화폐 유통 체계를 안정시키고, 측량사 길드 교육 과정을 짜고, 무역 중개권 운영 규정을 마련해야 했다. 수첩은 서랍 속에 있었지만, 거기 적힌 공식들은 이미 다른 형태로 이 세계에 편입되어 있었다.

은빛 맥이 마지막으로 한 번 반짝이고 잔잔해졌다.

더 이상 기록할 것은 없었다. 이제 계산 대신 측량이 시작될 차례였다.

변경백의 계산서2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