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독초 도감 - 12화 완결
4화
이른 아침, 서연의 처소에는 촛불이 반쯝 줄어 있었다.
서연은 품속에서 월영의 밀지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은비녀 잎맥 끊김을 지적한 대목과, 검시 기록의 멍 추정 시각이 의녀 진찰록과 다르다는 문장 사이로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세 번을 읽어도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종이를 접어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불꽃이 밀지 모서리를 스치자 손을 거두었다. 증거를 태우는 것은 월영이 바라는 반응이다.
서랍 아래쪽에서 작은 증거물함을 꺼냈다. 은비녀 실물이 든 보관함이었다. 이중 뚜껑을 열고 내부 칸막이 사이에 밀지를 끼워 넣은 뒤, 바깥 자물쇠를 채웠다. 열쇠는 따로 주머니에 넣어 옷깃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월영의 지적은 정확했다. 멍 시각은 의도적으로 반나절 늦췄고, 은비녀 문양 해석은 표준 규격과의 미세한 차이를 근거로 논증했다. 그러나 지금 드러난 사실은 서연 한 사람의 목숨보다 무거웠다. 강윤의 수사가 대왕대비전을 향하는 순간, 검시관의 신뢰가 흔들리면 사건 자체가 덮인다.
관모를 고쳐 쓰고 처소 문을 나섰다. 회현궁 복도는 아직 어스름했다.
서연이 형조 문서고 앞에 이르렀을 때, 강윤은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열람권은 확보했다.”
강윤이 중종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관리인에게 건넸다. 관리인은 직인을 확인하고 깊이 읍한 뒤 무거운 철제 문을 열었다.
문서고 안은 서늘했다. 장서가와 기록궤가 복도 양옆으로 늘어서 있고, 공기는 종이와 먹 냄새로 무거웠다. 강윤이 독초 도감이 보관된 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 한가운데 탁자 위에 도감이 펼쳐져 있었다. 겉표지는 짙은 남색 비단, 안쪽은 두꺼운 한지에 채색 삽화와 문자 기록이 빼곡했다. 강윤이 은비녀 무늬를 확대한 종이를 꺼내 도감 옆에 놓았다.
“청화마름문이다.”
서연이 그 종이를 짚었다. 일곱 꽃잎 은비녀의 문양과 도감의 약재 배합표를 번갈아 보던 손가락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적화독 배합표의 부재료 문양과 일치합니다.”
강윤이 도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기록에는 독약 배합에 쓰이는 여러 부재료의 문양 코드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중 세 번째 문양이 은비녀의 잎맥 끊김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배합 지시 코드다.”
강윤이 탁자 위에 손을 짚자, 손가락 사이로 도감의 다음 장이 넘어갔다.
“이십오 년 전 세자 독살 사건 기록을 찾아라.”
서연은 별실 안쪽의 편년 기록궤로 다가갔다. 이십오 년 전 형조 사건 기록함을 열자, 상단에 누렇게 바랜 문서첩이 올려져 있었다. 세자 독살 사건 수사 기록 제1책.
기록을 탁자로 가져와 펼치자, 강윤이 페이지를 넘기며 증거물 목록을 훑었다. 열세 번째 줄에서 손이 멈췄다.
“여기다.”
강윤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당시 사건 현장에서 수거된 증거물 중 하나로 ‘청화마름문이 새겨진 은제 찻잔’이 기재되어 있었다. 문양은 지금 탁자 위 은비녀의 그것과 동일했다.
“같은 문양 코드가 이십오 년 전에도 사용됐다.”
서연이 말했다. 강윤은 대답하지 않고 기록의 다음 장을 넘겼다. 사건은 미결로 종결되었고, 증거물은 모두 폐기. 조사 책임자는 당시 형조 판서였으나 사건 종결 이틀 후 사직했다. 그 이상의 기록은 없었다.
그때 문서고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월영이었다. 손에는 문서 묶음 몇 권이 들려 있었다. 탁자 위의 독초 도감과 세자 독살 기록을 한 번 훑은 월영의 시선이 그 확대본에 머물자, 손가락이 문서 묶음 가장자리를 살짝 눌렀다.
“이른 아침부터 열람이 바쁘십니다.”
월영이 문서를 서가에 꽂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손놀림은 평소보다 느렸다. 강윤이 도감을 덮으며 몸을 돌렸다.
“무슨 일로 오셨소.”
“회현궁 내명부 기록 정리차 들렀습니다. 매월 말일 문서고 정리는 상궁의 소임이니까요.”
서가에서 한 걸음 물러선 월영이 시선을 탁자 위 기록으로 다시 옮겼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자 저하의 일이오.”
월영의 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 강윤이 굳은 표정으로 읍했다.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단서가 닿았을 뿐.”
“닿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입니다.”
월영이 읍하고 돌아섰다. 발걸음이 복도로 사라지기 전, 잠시 멈춰 서서 어깨 너머로 서연을 보았다. 입은 열리지 않았으나 눈빛에는 이미 결론이 서 있었다.
문서고 문이 닫혔다.
서연이 손끝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증거물함 열쇠가 품속에서 차갑게 옷감을 눌렀다. 강윤이 세자 독살 기록을 집어 들며 말했다.
“월영이 이걸 알게 됐으니 대왕대비전도 곧 알 것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 위에는 은비녀 문양본과 적화독 배합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그 사이로 이십오 년 전 기록의 첫 장이 반쯤 펼쳐져 있었다. 같은 문양이 세 장의 종이 위에서 똑같은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서연이 회현궁 별실을 나서자마자 하급 의녀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서 의녀 나리, 서 참하의 병세가 갑자기……”
서연은 곧장 걷기 시작했다. 회랑을 지나 내의원 부속 병실로 향하는 내내 입술을 깨물었다.
서윤의 병실은 약재 찌꺼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침상에 누운 서윤은 얼굴빛이 창백하고 손끝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서연이 침상 옆에 무릎을 꿇자, 서윤이 천천히 눈을 떴다.
“서연아.”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또렷했다. 서윤이 손을 들어 서연의 소매를 더듬어 잡았다.
“오라버니, 약은 드셨습니까.”
“어제 진단이 나왔다. 독이다.”
서연의 손이 멈췄다.
“오 년 전, 아버님 탄핵을 주도했던 판중추부사…… 그 자가 마지막으로 사준 차에 든 것이었다. 이렇게 천천히 퍼지는 독이다. 어의도 어제야 원인을 알아냈다. 명이 길지 않다. 한 달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더군.”
서연이 일어서려 하자, 서윤이 소매를 놓지 않았다.
“내가 검시를 배운 이유를 아니. 아버지가 독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판중추부사는 그로부터 삼 년 뒤 스스로 독을 마셨다. 같은 증상이었다.”
서윤이 거칠게 기침했다. 물수건을 집어 이마를 닦아주자, 서윤이 베개 밑에서 종이 뭉치를 더듬어 꺼냈다.
“내 진단 기록이다. 독의 성분과 진행 경과가 상세히 적혀 있다. 형조 참의 강윤 대감께 직접 전하거라.”
“어찌하여 강 대감께.”
“그가 이 사건을 끝까지 파고들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강 대감을 믿는 눈빛이었다.”
서윤의 손이 소매를 놓았다.
“가라. 내 병실에 너무 오래 있으면 의심을 산다.”
일어나며 진단 기록을 소매 안쪽 깊숙이 넣었다. 병실 문을 닫고 나온 서연은 잠시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아버지의 죽음에 독이 개입되었을 가능성, 그리고 지금 사건의 독이 그와 같은 계열이라면…… 이 사건은 단순한 궁녀 독살이 아니다. 서연은 소매 속 진단 기록 묶음을 꽉 움켜쥐었다.
오후 늦게, 형조 집무실. 강윤은 탁자 위에 은비녀 문양 묘사도, 장신구 법제 편람 등본, 독초 도감 부분 사본을 펼쳐두고 보고서 초안을 작성 중이었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참의 대감.”
대왕대비전 소속 내관 김상선이 예고 없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뒤로 하급 관리 하나가 헐레벌떡 따라붙었다.
“통보도 없이 들어오다니, 김상선께서 예를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강윤이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김상선은 허리를 대충 굽히고는 곧바로 탁자 앞에 섰다.
“회현궁 궁녀 사망 건은 사고사로 종결하기로 내부 합의가 있었사옵니다. 형조에서 더 이상 수사를 확장하는 것은 월권이옵니다.”
“누구의 합의 말이오.”
“왕대비 마마께서 직접 내리신 뜻이옵니다.”
강윤이 천천히 일어났다.
“왕대비 마마의 뜻이라면 김상선이 아니라 전교로 전달되는 것이 절차요. 구두 지시로 형조 수사를 중단시킬 권한은 궁내 어느 분께도 없소.”
김상선의 얼굴이 굳었다. 잠시 침묵 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건을 더 파고들면 대감께서 감당할 수 없는 후과가 따를 것이옵니다.”
“충고는 받겠소.”
강윤이 탁자 위의 독초 도감 부분 사본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은비녀 문양이 독초 도감에 기록된 적화독 배합 코드와 일치하오. 적화독은 이십오 년 전 세자 저하의 독살에 사용된 희귀 독약이오. 이 사건은 왕실 내 연속 독살 의혹으로 확장될 소지가 있소. 본 참의는 이 증거를 바탕으로 내일 아침 정식 연계 수사 상소를 올릴 것이오.”
김상선의 시선이 탁자 위 은비녀 문양 묘사도를 스쳤다. 입을 열려다 닫았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물러가 주시오.”
강윤이 자리에 앉으며 붓을 다시 집었다. 김상선은 잠시 서 있다가 읍도 없이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렸다. 숨이 약간 가쁜 서연이었다.
“김상선께서 방금 이 건물을 나가셨습니다. 수사 중단을 요구하더군요.”
“짐작했습니다.”
서연이 소매에서 서윤의 진단 기록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오라버니의 진단 기록입니다. 오 년 전 독차로 인한 시한부 진단을 어제 받았습니다. 사용된 독은 궁중에서 유통되는 희귀한 독일 가능성이 있으며, 지금 이 사건에 쓰인 독과 동일 계열일 수 있습니다.”
붓을 멈춘 강윤이 진단 기록을 집어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다 한 대목에서 멈추었다.
“증상 진행 패턴이 독초 도감의 만성 백화독과 유사하군요.”
“백화독은 적화독의 전구 물질이옵니다. 이십오 년 전 세자 사건 이후 폐기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서연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이것도 상소문에 포함시키겠소. 백화독 유통 경로 자체가 수사 대상이오.”
서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윤이 다시 먹을 찍으며 말했다.
“상소문 초안을 완성하는 대로 검시관께도 보여주겠소. 그 전에 독초 도감 부분 사본과 세자 사건 기록을 최종 대조해주시오.”
탁자 반대편에 앉은 서연이 독초 도감 사본을 펼치고, 강윤이 이십오 년 전 세자 독살 사건 기록지를 나란히 놓았다. 은비녀 문양이 담긴 확대본을 그 위에 포개자, 독초 도감 적화독 배합표 맨 아래의 모란 잎맥이 끊긴 기호가 세자 사건 증거물 목록의 ‘범인이 소지한 은비녀 한 점’ 옆 기호와 정확히 일치했다.
“일곱 꽃잎, 모란 당초문, 그리고 잎맥이 끊겼습니다. 이십오 년 전 기록과 완전히 동일한 위조 패턴이옵니다.”
강윤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댔다.
“같은 손이거나, 같은 제조 계보로군요. 대왕대비 측 압력은 더 거세질 것이오. 그래도 수사를 확장하겠소.”
서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촛불 아래 하나로 합쳐졌다가 다시 둘이 되었다.
밤, 회현궁 월영의 처소.
촛불 세 개가 방 안을 밝혔다. 월영은 탁자 위에 의녀 진찰록 원본과 서연의 검시 기록 사본을 나란히 펼쳐두고 손가락으로 한 줄 한 줄 두 기록을 번갈아 짚었다. 진찰록에는 생체 반응으로서의 독소 분포—피부 발진이 목에서 가슴으로 번진 시점, 눈 흰자위의 황변 진행 속도, 손발 저림의 순서가 기록되어 있었다. 검시록에는 사후 변화만 있었다.
월영의 눈이 두 기록 모두에 등장하는 ‘체내 독소 분포 경로’ 항목에서 멈췄다. 진찰록에는 독소가 간에서 신장 방향으로 확산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검시록에는 독소가 심장에서 말초 혈관으로 퍼졌다고 적혀 있었다.
붓을 들어 별지에 두 항목을 나란히 베꼈다. 의녀의 기록은 생체 중심이고 검시관의 기록은 사후 중심이라 기술 방식이 다를 수는 있었다. 그러나 독소가 생성된 지점과 확산 방향 자체가 완전히 반대인 것은 서로 다른 사실을 기록했거나, 한쪽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검시록 사본 위로 시선을 천천히 움직여 멍 자국 추정 시각 항목까지 다다르자, 손가락이 진찰록의 같은 항목으로 돌아왔다. 반나절 차이.
그녀는 두 기록을 포개어 별도의 표지로 감싸고 밀납을 녹여 봉인한 뒤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서랍에서 문서함을 꺼내 봉인된 서류를 넣으며 월영은 혼잣말을 삼켰다. 반나절이 우연일 리 없다. 이 기록은 명백한 위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서연의 성별이나 신원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보다 더 큰 거래를 위해, 이 증거는 아직 사용하지 않는다.
문서함 뚜껑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