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독초록
12화
다음 날 아침 조회. 정전 용상 위로 첫 햇살이 비스듬히 내리꽂혔다.
국왕이 용상에 앉았다. 밤새 한숨도 붙이지 못한 얼굴이었다. 눈 밑이 검게 꺼졌고, 두 손은 용상 팔걸이를 움켜쥔 채였다.
중신들이 좌우로 늘어섰다. 이조판서, 형조판서, 도승지. 모두 홀을 들었으나 손이 굳어 있었다.
정전 중앙에는 이운이 섰다. 담묵색 도포 대신 정제된 곤룡포를 입었다. 왼쪽 소매 아래로 흉터가 살짝 비쳤다. 허리춤의 은고리 칼집은 그대로였다.
이운 곁에 서인녀가 무릎 꿇었다. 교복도 없는 평복 차림. 머리칼을 망건으로 틀어 올렸으나 어깨 위로 흩어진 가닥이 몇 올 떨어져 있었다.
서인녀의 세 걸음 뒤, 서단운도 무릎을 꿇었다. 바람 빠진 듯 어깨가 굽어 있었다.
국왕이 팔걸이에서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삼중 기록을 분석하여 십오 년 전 선왕후 독살의 진상을 밝힌 공은——” 한숨을 들이켰다. “내 이미 들었다.”
정전 안의 공기가 움직이지 않았다.
“왕태비 민씨는——”
국왕의 목소리가 갈라졌다가 다시 굳었다.
“모후를 독살하고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삼중 기록을 위조했다. 왕실의 법도로, 그 죄는 폐위와 사사로 다스린다.”
형조판서가 홀을 들어 올렸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이조판서도 뒤따랐다. 중신들이 차례로 홀을 올렸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국왕이 도승지를 돌아보았다.
“장상궁은 태비의 지시를 받아 탕약 배합을 조작했다. 초오의 비율을 높이고 작약을 빼—— 독성을 배가시켰음이 증명되었다. 참수형에 처한다.”
도승지의 붓이 기록 위를 바쁘게 움직였다.
“설 내관과 궁녀 소영은—— 증인으로서 사면한다. 증거 보존과 진술에 공이 있었다.”
서인녀의 두 손이 무릎 위에서 살짝 떨렸다. 은비녀가 소매 안에서 팔뚝을 눌렀다.
이운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입술이 열릴 듯했으나 말을 삼켰다.
도승지가 기록을 마치고 붓을 놓았다. 정전 밖에서 의금부 나장들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왕태비를 동궁에서 의금부로 압송하는 소리였다.
침묵이 길어졌다. 형조판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전하. 한 가지 더 아뢰올 일이——”
이운이 형조판서를 향해 반 걸음 틀었다. 눈동자가 검은 돌처럼 고정되었다.
형조판서는 이운을 보지 않고 계속했다.
“여인 서씨의 검률 신분 사칭 건입니다.”
서단운의 굽은 어깨가 더 깊이 꺾였다.
“대연왕조 법도에 따르면——” 형조판서가 홀을 가슴 앞에 세웠다. “여성이 관직을 사칭한 죄는 관직 박탈과 더불어, 해당 관직에 준하는 율문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서인녀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이운이 그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곤룡포의 소매가 공기 속에서 살짝 부풀었다.
“형조판서.”
반말이었다. 예를 갖춘 속도였으나 톤은 낮았다.
“이 여인이 아니었더라면 십오 년 전 모후의 원통한 죽음은——”
“전하.” 형조판서가 이운의 말을 자르지 않았다.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그것은 오늘 조회의 첫 번째 안건에서 이미 논해진 사실입니다. 국왕 전하께서 공을 인정하셨습니다.”
잠시 멈췄다.
“그러나 공과 죄는 별개입니다.”
이운의 턱 근육이 당겨졌다. 왼손이 허리춤 칼집을 쥐었다가 놓았다. 손날의 흉터가 소매 아래로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증거를 제출하고 진실을 밝힌 자를——”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형조판서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오늘 저희가 왕태비를 처단할 수 있었던 근거 또한 무너집니다.”
이운이 대답하지 않았다. 정전의 횃불이 한 차례 흔들렸다.
서인녀가 무릎을 조금 옮겼다. 돌바닥이 옷감 너머로 정강이를 찍었다.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으나 끝이 흔들리지 않았다.
형조판서가 돌아보았다. 국왕의 시선도 서인녀에게로 옮겨졌다.
서인녀가 얼굴을 들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검시할 때 외에는 항상 낮추던 시선을 완전히 열었다.
“소녀는 오늘 오라버니의 이름을 빌려 이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다.”
서단운이 동생의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입술이 떨렸다.
“삼중 기록이 어떻게 위조되었는지, 물금초목부 어느 쪽이 재편철되었는지, 기거주기 누락 쪽과 순찰부 위조본 사이의 시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인녀의 손이 소매 속 은비녀를 찾았다가 멈췄다. “그 모든 것을 밝힌 것은 소녀 자신입니다.”
형조판서의 눈썹이 움직였다.
“검시록을 대필한 죄는 인정합니다. 여성의 몸으로 검률 관복을 입은 죄도 인정합니다.”
서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그러나 그 검시록들이 사실을 기록했는지 여부는——”
국왕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전하께서 직접 판단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정전 안의 중신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조판서가 무언가 말하려다 멈췄다. 도승지의 붓이 기록 위에서 잠시 떠올랐다.
이운이 서인녀를 내려다보았다. 짙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눈물샘이 파인 듯한 다크서클이 한층 짙어 보였다.
서인녀가 계속했다.
“소녀는 단 한 번도 검시록을 거짓으로 기록한 적이 없습니다. 채아의 사인을 독물 호흡마비로 적시했고, 은엽초 분말의 성분을 누락 없이 기재했습니다. 삼중 기록 체계의 균열을 근거로 물금초목부 위조를 증명한 것 또한——”
그녀가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검률의 일이었습니다.”
국왕이 용상 팔걸이를 짚은 손을 살짝 들었다. 침묵이 흘렀다.
“형조판서.”
“예, 전하.”
“서 검률이 작성한 검시록——”
국왕이 말을 고치지 않았다. ‘서 검률’이라는 호칭이 정전에 그대로 놓였다.
“그 안에 오류가 있었느냐.”
형조판서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렀다. “전하. 검시록의 사실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는——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국왕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한 번 두드렸다. “서 씨의 죄는 검시록 위조가 아니라 신분 사칭이다.”
서단운이 갑자기 무릎걸음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전하! 모든 것은 소인의 책임입니다. 누이가 검시록을 대신 쓴 것은——”
“서 군관.” 국왕이 손을 들어 서단운을 멈추게 했다. “그대의 책임은 따로 묻겠다.”
서인녀가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라비의 음성을 들었을 때 오른쪽 어깨가 살짝 경직됐을 뿐이다.
국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인 서씨에게—— 관직을 내릴 수는 없다. 대연왕조의 법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운의 왼손이 칼집을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관직 박탈과 궁 밖 추방으로 다스린다. 검시록은—— 이미 기록된 것은 그대로 둔다. 삼중 기록에 올랐으니 법대로 보관하라.”
도승지가 붓을 내려놓았다. 먹이 번지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또렷했다.
“서단운은——” 국왕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검률 직위를 박탈하고, 동생의 신분 사칭을 방조한 죄로 삼 년 유배에 처한다.”
서단운의 굽은 어깨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서인녀가 일어섰다. 천천히 몸을 돌려 오라비 앞에 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서단운의 둥글고 다정한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누이.”
서인녀가 오라비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관복도 없는 평복 차림으로 올린 인사였다. 소매 속 은비녀가 돌바닥에 닿을 듯 기울었다.
이운이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곤룡포 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입술이 열렸다.
서인녀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이운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인녀의 갈색 눈동자가 이운의 검은 눈동자에 닿았다. 눈물샘이 파인 듯한 다크서클이 그녀의 시야 안에 가득 찼다.
“전하.”
서인녀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했다.
“소녀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궁 밖으로 나가서도 검시관으로 살겠습니다. 관직 없는 검시관으로——”
이운의 눈동자가 떨리지 않았다. 소매 아래 손이 칼집에서 떨어졌다.
“그것이——”
서인녀가 말을 맺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한 번 더 숙였다. 은비녀가 소매 속에서 차갑게 굴렀다.
이운이 입을 열었다. 허리를 숙인 서인녀의 정수리 위로 낮은 음성이 떨어졌다.
“그 답변이——”
한 박자 멈췄다.
“그대가 내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냐.”
서인녀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이운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지막이 아닙니다.”
입술이 살짝 떨렸다가 굳었다.
“언젠가—— 법이 바뀌거든. 그때 뵙겠습니다.”
이운의 검은 눈동자가 처음으로 깜빡였다. 한 번이었다. 천천히 감겼다 떠졌다.
“······묻는 말에 답이나 해라.”
“답했습니다.”
서인녀가 돌아섰다. 의금부 관원이 그녀의 좌우로 다가섰다. 서단운도 일어섰다. 두 남매가 정전 중앙 복도로 걸어 나갔다.
이운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곤룡포를 입은 채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전 문이 열렸다.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서인녀의 흩어진 머리칼이 빛에 스며들었다.
문이 닫혔다.
왼손이 허리춤 칼집 위에 얹혔다. 손날의 흉터가 곤룡포 소매 아래로 사라졌다. 눈물샘이 파인 듯한 다크서클이 한층 짙어 보였다.
도승지가 붓을 들어 기록의 마지막 줄을 썼다.
의금부 나졸 둘이 정전 앞마당 동쪽 담장 아래에 대기하고 있었다. 서인녀는 그들을 향해 세 걸음 떼다가 멈췄다.
돌아섰다.
이운이 정전 월랑 기둥 곁에 서 있었다. 담묵색 도포는 아침 볕에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서인녀의 평복 소매가 가볍게 들렸다.
“전하.”
한 걸음 다가섰다. 손이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은비녀가 손바닥에 놓였다. 검시침 대신 써온 그것. 비녀 끝이 햇빛을 받아 한 번 반짝이고 멎었다.
“이것은 소녀의 이름으로 처음 쓴 증거입니다.”
이운의 검은 눈동자가 은비녀로 향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서인녀가 은비녀를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검시관이 아닌 서인녀로서 전하께 드립니다.”
바람이 비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운이 손을 내밀었다. 왼손이었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목에는 불에 탄 흉터가 얇게 번져 있었다. 손가락이 은비녀를 집었다. 가볍게, 그러나 정확히.
“……이름.”
서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이운은 여전히 은비녀를 보고 있었다. “네 이름을 이걸로 처음 썼다고 했다.”
“그렇습니다.”
“서인녀.”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짧았다. 은비녀를 쥔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칼집이 아닌 도포 주머니 쪽이었다.
“기억하겠다.”
서인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 번이었다.
이운이 눈을 들었다. 짙고 투명한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눈물샘이 파인 듯한 다크서클은 더 깊어졌으나, 눈빛에는 돌 같은 침묵만이 남아 있었다.
“진실을 밝히는 일은 계속된다.”
한 박자.
“네가 남긴 증거로.”
서인녀가 허리를 굽혔다. 평복의 깃이 바람에 한 번 들렸다 가라앉았다. “소녀는——”
말을 멈췄다.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허리를 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았다. 이운의 손가락이 은비녀를 감싸쥐었다. 서인녀의 손은 이미 소매 안에 있었다.
돌아섰다.
나졸 둘이 그녀의 좌우로 다가섰다. 한 사람이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서인녀가 첫걸음을 뗐다. 평복의 끝자락이 돌바닥을 스쳤다.
이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궐문으로 향하는 길. 정전 앞마당을 가로지르고 좌측 회랑을 지날 때쯤, 서단운이 대기처에서 튀어나왔다. 두 명의 하급 관원이 그를 따라붙었으나 막지는 않았다.
“인녀야!”
서단운의 눈이 벌개져 있었다. 이마에는 베갯자국이 아직도 붉은 선으로 남아 있었다. 손에는 종이 문서 한 통이 들려 있었다. 관복도 벗은 지 오래라 어깨가 더 굽어 보였다.
서인녀가 걸음을 멈췄다. “오라버니.”
“이것 좀 봐.” 서단운이 달려와 종이를 내밀었다. 손이 떨려 종이 모서리가 바르르 떨렸다. “형조에서…… 형조에서 방금 보냈어. 아버님 누명이 벗겨졌다는——”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서단운이 코를 훌쩍였다.
서인녀가 종이를 받아들었다. 두 손으로 펼쳤다.
형조판서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이첩 문건이었다. ‘전 검률 서충헌은……
모함에 의한 삭직으로 판명되어…… 본직을 회복하고 명예를 복권함.’ 그 아래에 수결로 쓴 글씨 몇 줄. ‘유족 서단운·서인녀에게 고함.’
서인녀.
문서에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오라비의 대필자가 아닌, 아버지의 딸로서.
“인녀야.” 서단운이 낮게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네 이름으로 받아.”
서인녀가 천천히 문서를 접었다. 반듯하게, 세 번. 소매 속으로 밀어 넣었다.
“형조판서가 직접 서명했습니까.”
“응. 국왕 전교를 받아서 급히 처리했다고…… 하더라.”
“그렇습니까.”
서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소매 안에서 문서 모서리를 한 번 눌렀다. 아버지의 혐의를 벗긴 종이가 손목 안쪽에 닿아 따뜻했다.
나졸 중 한 사람이 기침을 했다. “서 낭자. 시간이——”
“조금만.” 뒤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또박또박, 금이 가지 않았다.
서단운이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손을 올리려다 내렸다. “나는 유배라서…… 같이 못 갈 줄 알았는데.”
“형은 나졸이 뒤를 따릅니다.”
“그래도, 궐문은 같이 나가게 됐잖아.”
서인녀가 걸음을 옮겼다. 회랑의 그림자가 반쯤 물러난 자리였다. 서단운이 왼편으로 따라붙었다.
“네가 마지막 인사를 청했다며.” 서단운이 조심스레 물었다. “태상군 전하께.”
“여쭀 말씀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오라버니.”
서인녀가 발을 멈추지 않고 답했다. 사찰단을 두른 목소리는 낮았으나 바람에 흩어지지 않았다.
“내 이름으로 증거를 남겼다고 전했습니다.”
서단운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그 대신 걸음을 빨리해 어깨를 나란히 했다.
궐문이 가까워졌다.
돌로 쌓은 정문 양옆으로 위병 둘이 창을 든 채 서 있었다. 나졸 하나가 앞서 걸어가 손짓으로 통과를 알렸다. 위병이 창을 세우고 물러섰다.
문지방이 눈앞에 놓였다.
서인녀가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들어 소매 속 문서를 한 번 더 짚었다.
서단운이 그녀를 보았다. “나가자.”
서인녀가 문지방을 넘었다.
궐 밖의 공기가 달랐다. 습기가 적고 흙먼지가 섞여 있었다. 평복의 소매가 팔뚝에 느슨하게 감겼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걸음째에 숨을 들이켰다. 세 걸음째에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서단운이 옆에서 발을 맞추며 걸었다.
“내 이름으로 걷습니다.”
정전 앞마당에 이운이 남아 있었다. 손바닥 위에 은비녀가 놓여 있었다. 비녀 끝이 아침 햇볕에 창백하게 빛나다 멎었다.
궐문이 닫혔다. 멀리서 나무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몸을 돌리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은비녀를 한 번 굴렸다. 검시관의 도구.
여인의 비녀. 증거. 그 무게가 손금을 따라 옮겨갔다.
도포 주머니에 비녀를 넣었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텅 빈 정전 앞마당에 담묵색 도포 자락만 가볍게 들렸다 내렸다. 눈동자가 궐문 쪽을 향했다. 닫힌 지 오래였다. 침묵 속에 서서 문이 있던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