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진동의 지배자

3화

최영우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짚었다. 3.4헤르츠 대역 파형이 확대됐다.

“서브 진동이 크롤러 핵 파괴 뒤에도 0.7초 더 지속됐습니다. 생명체 공명이 멈춘 자리에서 뭔가 혼자 떨고 있었다는 뜻이죠.”

다른 윈도우를 열었다. 차원 균열 이론의 표준 간섭 패턴이 옆에 겹쳐졌다.

“94% 일치. 실험실 오차 범위 안입니다.”

윤재하는 그래프를 바라봤다. 발바닥으로 느꼈던 떨림이 지금 이 선들의 굴곡과 같다. 우연이 아니었다. 던전 바닥은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과학은 그 말을 막 번역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강서윤이 태블릿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포니테일 끝이 어깨를 스쳤다.

“재하야. 들어가기 전에 파티 등록부터 하자. 이번엔 둘이 같이 간다.”

오른손 검지의 진동 반지가 미세하게 빛났다. 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윤재하는 고개를 저었다. 왼손 검지와 중지를 펴서 가슴 앞으로 내밀고, 오른손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렸다. 양손을 펼쳐 앞으로 밀어내며 한 번 멈췄다.

증명이 먼저다. 그다음이다.

강서윤은 번역 태블릿을 보지도 않았다. 수화는 이미 익숙했다.

“기다릴 수 있어. 얼마든지.”

말에 섞인 감정은 기다림보다 무거웠다. 과거 어딘가에서 이미 기다리지 못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최영우가 프린터에서 막 출력된 그래프 용지를 건넸다. 진동 파형과 분석 수치가 빼곡한 A4 세 장이었다.

“협회 측정실에 보여주십시오. 비표준 진동 감지 능력 재측정 요청 근거가 됩니다.”

윤재하는 종이를 받아 반으로 접었다. 전술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손끝에서는 아까 모니터를 만졌을 때 느꼈던 희미한 정전기 비슷한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한 번 폈다 쥐었다.

“조심하십시오.” 최영우가 덧붙였다. “데이터는 드렸지만, 밖에서 무슨 의미일지는……”

말을 마치지 않았다. 윤재하는 이미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강서윤이 태블릿을 벨트에 끼우며 뒤따랐다. 부츠가 복도 바닥을 밟을 때마다 규칙적인 진동이 발바닥에 닿았다. 바깥에서는 이게 전부였다. 발걸음, 기계 소음, 사람들 움직임이 주는 무질서한 떨림들.

그러나 사일런트 게이트 안에서는 달랐다. 모든 진동이 증폭되고 선명해졌다. 마치 엉킨 실타래를 손가락 하나로 풀어내는 것처럼.

헌터 협회 저층 로비는 오후의 나른함 대신 낮은 긴장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일정을 마친 헌터들이 대형 모니터 앞에 서성거렸다.

문이 열리자 몇몇 시선이 윤재하에게 꽂혔다. 곧바로 시선이 떨어지거나 슬쩍 돌아갔다. F등급 헌터에게 주는 관심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뒤따라 들어온 강서윤을 보자 웅성거림이 약간 커졌다.

로비 중앙에서 무리가 갈라졌다. 푸른색 헌터 유니폼의 박태진이 걸어나왔다. 뒤로 파티원 세 명이 팔짱을 끼거나 벽에 기대어 있었다. 박태진은 엄지로 가슴을 가리키며 윤재하 앞에 멈춰 섰다.

“살아 있었군.”

회색 눈동자에 담긴 건 조소보다 진짜 놀라움에 가까웠다. 오른쪽 뺨의 흉터가 형광등 불빛에 반사됐다.

“사일런트 게이트. 남들 갔다가 청력 날리고 돌아온 던전에서 혼자 크롤러 잡았다는 게 사실인가 보지.”

주변 헌터들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로비의 공기가 한 겹 두꺼워졌다.

박태진은 한 걸음 더 다가서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만 낮췄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해두자. 그 게이트는 내가 독점 공략권 신청해 놨어. 길드에서 절차 밟고 있고.”

검지 손가락 하나를 펴서 윤재하의 어깨 너머 허공을 가리켰다.

“네가 한 번 살아나왔다고 기회가 공평해지는 건 아냐. 경쟁하려면 정식으로 해.”

윤재하는 조용히 눈을 바라봤다. 박태진의 목소리에는 허세가 없었다. 다만 왼손 검지가 허벅지 옆에서 짧게 두 번 떨렸다. 말이 가진 자신감과 달리, 몸은 무언가 다른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양손이 올라왔다. 오른손 엄지와 소지를 펴서 가슴 높이에서 바깥으로, 왼손 집게손가락을 가볍게 내렸다.

좋다.

수화 한 마디뿐이었다.

강서윤이 태블릿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로비 구석에서 그 동작을 알아본 한 하급 조제사가 “좋다고 했다”라고 조용히 주변에 옮겼다. 웅성거림이 다시 파도처럼 번졌다.

박태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거절이나 분노를 예상했는지도 몰랐다. 상대는 단 한 마디로 승부를 접수했다.

“……좋아.”

짧은 대답이었다. 뒤돌아서는 동작은 빠르고 정확했지만,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 파티원들에게 손짓하자 일행은 개인 트레이닝실 쪽 복도로 사라졌다.

윤재하는 측정실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전술 재킷 안주머니의 접힌 그래프 용지가 옷감에 닿아 경쾌하게 구겨지는 촉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바깥 세계의 진동은 희미했다. 엘리베이터 저음, 복도를 걷는 누군가의 구두 굽, 멀리서 닫히는 트레이닝실 철제 문. 던전 안에서처럼 선명하지도, 말을 걸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래프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던전은 이미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직 그 언어의 단어 몇 개밖에 모를 뿐이었다.

발걸음이 측정실 문을 향해 가속됐다. 강서윤이 반 발짝 뒤에서 같은 속도로 따라붙었다.

신호 반지가 다시 한 번 희미하게 빛났다.

측정실까지 복도를 몇 걸음 걷지 않아 강서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그래프, 측정실에 넣기 전에 한 번만 더 볼 수 있을까요.” 윤재하는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건넸다. 접힌 선을 따라 그래프를 펴서 들여다보고는 곧바로 돌려주었다. “됐어요.” 측정실 문이 앞에서 열렸다.

문이 닫히자 공기가 달라졌다. 냉방 장치의 낮은 떨림이 대리석 바닥을 통해 올라왔다. 던전 안이었다면 거리와 방향이 읽혔을 신호였다. 이곳에서는 그저 기계가 돌아간다는 사실만 알려줄 뿐이었다.

측정관이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두드리며 데이터를 확인했다. 세 개의 표준 항목이 차례로 초록색으로 표시됐다. 마나량, 속도, 힘. 모두 F등급 임계치 아래였다. 측정실 구석에서 비표준 속성 스캔 장비가 낮은 주파수로 윙윙거렸다.

그때였다.

측정관이 자세를 바로 했다. 화면을 한 번 지웠다가 다시 열었다. 스캔 그래프 하단에 붉은색 미세 파형이 찍혀 있었다.

손가락으로 파형을 확대하자 주파수가 표시됐다. 3.4헤르츠 부근. 옆자리 동료를 불렀다.

“이거 보십시오.”

동료가 다가와 화면을 살폈다. 두 사람은 잠시 그래프를 번갈아 보다가, 동시에 윤재하를 바라봤다. 측정관이 물었다.

“최근에 접촉한 게이트가 있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이 올라왔다. 검지와 중지를 세워 이마 옆에서 밖으로 튕겼다.

사일런트 게이트.

측정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려 결과를 기록했다. F등급. 표준 항목은 변함없었다. 비표준 항목에 ‘관찰 필요’라는 주석을 달고 상부 보고 파일에 첨부했다.

윤재하는 결과표를 받아들었다. 종이를 통해 측정관의 지문이 남긴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결과표를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몸을 돌렸다.

복도를 나서자 강서윤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상박을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 오른손 검지의 반지가 형광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태블릿은 이미 켜져 있었다.

“측정 결과 들었어.”

강서윤이 다가왔다.

“F등급이래도 상관없어. 파티만 돌아오면——”

윤재하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왼손을 펴서 가슴 높이로 올리고, 엄지를 접은 채 나머지 손가락을 앞으로 밀었다.

다시 간다.

강서윤이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번역을 확인한 눈썹이 좁혀졌다.

“또 혼자? 그럴 필요 없어. 내가——”

고개를 저었다. 두 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하며 바깥으로 강하게 밀어냈다. 이어 왼손 검지로 가슴을 가리키고, 양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펴서 앞으로 내밀었다.

혼자다. 이 던전은 나를 증명할 유일한 장소다.

강서윤의 손가락이 태블릿을 더 세게 쥐었다. 번역된 문장을 읽은 입술이 움직였다. 무언가 말하려다, 그대로 다물었다.

“알았어.”

물러섰다.

“기다릴게. 게이트 앞에서.”

윤재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지나쳤다. 뒤에서 부츠 소리가 잠시 따라오다 멈췄다.

게이트 진입부의 공기가 달랐다. 사일런트 게이트의 경계면은 늘 그렇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경계를 넘자 모든 음파가 사라졌다. 부츠 소리도, 호흡 소리도, 심장 박동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대신 바닥이 살아났다.

발바닥을 통해 저등급 구역의 암반 진동이 올라왔다. 크롤러의 핵 공명 주파수와 다른, 더 깊은 곳의 저주파 떨림. 최영우의 연구실에서 그래프로 확인했던 바로 그 패턴이었다.

윤재하는 장갑의 센서 상태를 확인했다. 진동 증폭 센서 잔량 표시등이 녹색으로 깜빡였다. 허리를 낮추고 바닥에 손바닥을 얹었다.

순간.

3.4헤르츠의 진동이 손바닥을 통해 밀려왔다. 지난번보다 선명했다. 방향성을 가진 신호였다. 서쪽, 약 80미터 앞. 몸을 일으켜 그 방향으로 이동했다.

암반 사이 길을 따라가자 진동이 점점 강해졌다. 더 이상 미세한 떨림이 아니었다. 던전 전체가 천천히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걸음 속도에 맞춰 진동의 간격도 변했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 바닥에 손을 얹었다.

그때였다.

진동이 끊겼다. 1초, 2초, 3초.

그리고 돌아왔다. 손바닥에서 나는 맥박과 정확히 같은 주파수로.

손끝에서 시작된 떨림이 손목을 타고 팔 전체로 퍼졌다. 눈을 감았는데도 던전의 구조가 읽혔다. 지금까지 지나온 통로, 머리 위로 얽힌 암반의 균열, 오른쪽 벽 너머의 빈 공간. 발바닥으로는 한 번도 감지하지 못했던 먼 곳까지 한 번에 들어왔다. 던전 전체가 하나의 신경망처럼 연결되어 손바닥 아래에서 박동하고 있었다.

머리가 욱신거렸다.

관자놀이 양쪽에서 시작된 통증이 안구 뒤쪽으로 번졌다. 정보가 너무 많았다. 뇌가 처리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진동 패턴이 쉬지 않고 밀려들었다. 이를 악물고 손바닥을 바닥에서 떼어냈다.

접촉이 끊기자 던전 전체를 읽던 감각이 사라졌다. 통증은 남았다. 눈을 뜨자 시야 가장자리에 하얀 점들이 떠다녔다. 손끝에서는 여전히 던전 구조의 진동 잔향이 남아 있었다.

이건 단순한 감각이 아니었다. 던전이 그를 인식하고 있었다. 진동을 받아들여 같은 주파수로 응답하고 있었다.

윤재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라봤다. 장갑의 센서 표시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이었다. 숨을 고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열 걸음쯤 갔을 때, 왼쪽 암반 뒤에서 진동 반향이 돌아왔다. 단단한 바위 너머에 빈 공간이 있다는 신호였다. 지난번에는 없던 통로였다.

암반을 따라 손바닥을 움직였다. 진동 반향이 가장 강한 지점에서 멈췄다. 장갑을 낀 손으로 틈새를 더듬자 얇은 판석이 움직였다. 부드럽게 밀리며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통로 끝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는, 살아 있는 맥박 같은 빛이었다.

게이트 진입부의 공기가 달랐다. 사일런트 게이트의 경계면은 늘 그렇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경계를 넘자 모든 음파가 사라졌다. 부츠 소리도, 호흡 소리도, 심장 박동마저도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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