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진동의 지배자

8화

통로에 발을 디딘 순간, 조각이 손아귀 안에서 비틀렸다. 통증이 손바닥을 찢고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상체가 기울어질 뻔했다.

강서윤이 내 팔꿈치를 오른손으로 받치며 손가락 끝으로 짧게 두 번 눌렀다. `멈춰`.

“멈출 수 없어.”

통로 저 끝에서 진동이 조여들고 있었다. 박태진의 심장이 마지막으로 뛴 뒤, 3초 넘게 다음 박동이 없다. 방어 기제의 저주파 파쇄 진동이 그 생체 파형을 덮어가고 있었다. 광석 촉수들이 수축할 때마다 박태진의 진동 출력이 1할씩 깎였다.

오른손의 조각이 다시 울었다. 폭주 상태였지만 진동이 무작위로 퍼지지 않고 통로 쪽으로 쏠렸다.

“던전 전체의 진동장이 뒤틀리고 있어. 핵 쪽으로 기울어져.”

발바닥으로 읽은 그 기울기를 말로 옮겼다.

강서윤의 진동이 급변했다. 수화를 하려다 오른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생체 리듬이 두려움의 파형 위에 다른 무언가를 겹쳤다. 그 진동 패턴은 방금 전 `미안해`를 전했을 때와 똑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네 진동이…… 읽혀.”

강서윤의 진동은 폭주 와중에도 선명했다. 파형 아래 깔린 저주파 대역에 침전물처럼 쌓인 진동. 몇 년을 삭히며 굳은 파편들. 그게 죄책감이라는 걸 그 순간 처음 알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건 손동작이었다. `미안해`. 세 번의 손가락 움직임. 그 짧은 수화가 전한 진동이 지금 온몸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는 왼손을 강서윤의 손등 위에 올렸다. 손가락을 한 번 구부렸다 폈다. 짧게 닿았다. 읽었다는 신호였다.

강서윤의 진동이 한 박자 멎었다. 손등 위에서 손가락을 마주 쥐었다. 손아귀 힘만으로 답했다. 진동 파형은 여전히 두려움과 죄책감이 섞여 있었지만, 그 안에 가느다란 고주파가 한 가닥 꽂혔다.

손을 뗐다. 오른손의 조각을 더 세게 쥐었다. 결정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푸른 실금이 손가락 사이로 번졌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던전 바닥이 뒤틀렸다. 진동 파형이 갈라지는 감각. 벽면의 광석들이 일제히 푸른빛을 발했다. 공간 자체가 늘어나는 느낌이 다리에 전해졌다.

“공간을 변형시켜. 접근을 막는 거야.”

조각은 이미 방향을 잡았다.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조각에서 나온 진동파가 공간 왜곡을 뚫고 나아갔다. 벽면을 타고 핵 쪽으로 파형이 달려가며 광석의 빛이 일렁였다.

통로 끝에서 박태진의 진동이 다시 한 번 약하게 뛰었다. 심장이 아니라 근육의 경련이었다.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어.”

가슴을 압박당하며 갈비뼈가 미세하게 밀리는 진동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달렸다. 왼쪽 어깨가 벽에 스쳤다. 광석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점퍼를 찢고 피부를 긁었다. 통증은 느껴졌지만 진동 감지는 더 선명해졌다. 던전 전체의 진동이 신경계로 밀려들며 폭주가 임계점에 닿고 있었다.

열 걸음 앞에 박태진이 보였다. 등과 팔다리에 광석 촉수들이 감겨 있었다. 살아 있는 광맥처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몸을 조여들고 있었다. 고개는 가슴 쪽으로 꺾여 있었고 오른팔은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뒤로 젖혀져, 촉수가 팔뚝을 깊게 파고들었다.

오른손의 조각을 던지지 않았다. 손목을 꺾어 조각의 결정면을 촉수 무리 쪽으로 향했다. 공명 에너지를 모은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흘려보내.”

조각이 빨아들인 진동을 그쪽으로 쏟았다. 손바닥에서 결정이 맥박처럼 뛰었다. 주변 진동을 빨아들여 새 파형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파형이 첫 번째 촉수를 때렸다. 2.7초 주기로 조이던 압박이 순간 풀렸다. 촉수 하나가 결정 격자를 잃고 갈라졌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촉수에 공명파가 닿았다. 방어 기제의 저주파 진동과 조각의 고주파 공명이 부딪혔다. 광석 표면에 실금이 번졌다. 조각이 더 뜨거워져 살갗이 타는 듯했다.

왼손을 조각 쥔 오른손 위에 포갰다. 통증이 양손으로 퍼졌지만 파형 출력은 두 배로 뛰었다. 촉수 넷이 동시에 결정 구조를 잃고 먼지처럼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박태진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얼굴을 한 번 들었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오른팔은 축 늘어졌고, 촉수에 감겼던 부위가 검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여기.”

왼손을 내밀었다. 박태진은 그 손을 한참 바라봤다. 분노와 수치심, 두려움으로 뒤섞인 파형이 읽혔다. 청각 상실의 공포. 소리 없는 공간에서 완전히 무력해지는 자신에 대한 공포.

박태진이 왼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았다. 부상당하지 않은 손의 악력은 여전히 강했다. 입술이 떨리며 한 마디를 뱉었다. 무음 속에서도 입 모양은 분명했다.

“네 진동이…… 나를 살렸다.”

말과 함께 파형이 바뀌었다. 분노의 주파수 아래 다른 파형이 올라탔다. 단어로 번역할 수 없었지만 의미는 알았다.

굴욕과 인정이 같은 맥박 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박태진이 손목을 놓고 물러났다. 비틀거렸지만 끝내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 순간, 조각이 폭발했다.

진동이 손바닥에서 터져 나와 던전 전체로 퍼졌다. 제어력을 완전히 잃은 공명 에너지가 무차별로 사방으로 뻗었다. 벽면의 광석들을 때렸다. 바닥이 갈라졌다. 검은 균열이 통로를 따라 번졌고 천장에서 광석 조각들이 떨어졌다.

강서윤이 달려와 옆으로 붙었다. 손이 등에 닿았다. 오른손을 펼 수 없었다. 조각이 손바닥에 들러붙었다. 푸른 실금이 손등까지 번져 팔뚝을 타고 올라갔다.

등판 왼쪽, 어깨뼈 아래에서 무언가가 찢어지는 느낌. 뜨거운 균열이 척추를 따라 번지는 걸 느꼈다. 통증은 없었다.

“진동 감지가…… 극단적으로 넓어져.”

던전 전체의 구조가 신경망처럼 느껴졌다. 모든 벽, 모든 광석, 모든 균열이 동시에 진동했다.

바닥의 균열이 더 깊어졌다. 바닥 전체가 내려앉았다. 공명 반동이 던전의 구조 자체를 무너뜨리는 중이었다. 박태진이 입 모양만으로 외쳤다.

“나가야 한다!”

강서윤이 왼팔을 잡아끌며 뒤로 물러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으로 균열이 번지는 진동을 읽었다.

“출구 방향은 아직 열려 있어.”

진동이 통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등 왼쪽의 균열 감각이 더 깊어졌다. 피부 아래로 무언가가 패여 들어가는 느낌.

그러나 진동은 여전히 읽혔다. 오른손을 움켜쥔 채 뒤돌아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던전 천장에서 광석 몇 개가 더 떨어졌다.

벽면을 타고 온 진동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공명 반동의 잔향만이 허공에 맴돌았다. 바닥의 진동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신발 밑창으로 일그러진 던전의 맥박이 전해져왔다.

벽에 기대 앉은 박태진이 오른팔을 감싸쥐었다. 타박상이 든 팔뚝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호흡은 짧았다.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나도…… 느꼈다.”

자신의 가슴께를 오른손으로 움켜잡았다. 진동 감각을 표현하려는 듯 손가락이 굽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진동을. 그걸 밀어낸 건…….”

말이 멎었다. 턱이 굳어졌다. 벽에 붙은 왼손으로 벽면을 한 번 쳤다. 타격음은 없었다. 진동만이 바닥으로 번졌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왼손이 다시 벽을 짚었다.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무음 속에서 그 떨림이 전부였다. 발바닥으로 그 떨림을 읽었다. 주파수가 점차 낮아졌다. 생체 진동에서 고주파 영역이 빠져나갔다.

강서윤이 그 옆에서 움직였다. 팔꿈치를 받치고 있던 손이 위로 올라와 내 어깨를 짚었다. 손바닥이 천을 통해 전한 진동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손을 들어 올렸다. 수화는 느렸다. 한 동작 한 동작 힘이 실렸다.

`그날`

발바닥에 심박 진동이 전달됐다. 분당 심박이 급격히 올라가고 있었다. 발뒤꿈치로 전해지는 파형이 불규칙하게 찢어졌다.

`폭발 속에서`

왼손이 내 어깨를 더 세게 붙잡았다. 손가락 끝이 천 위로 파고들었다. 오른손이 허공에서 멎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동작이 빨라졌다. 쏟아내는 듯이.

`내가 망설이는 동안`

등 왼쪽 어깨뼈 아래에서 열이 올라왔다. 공명 반동의 균열이 청색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갔다.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손이 멈췄다. 입술이 떨렸다. 턱을 꽉 물었다.

눈꺼풀 가장자리에 물기가 고였다. 다음 동작은 수화가 아니었다. 그녀가 양어깨를 붙잡았다.

손아귀의 압력이 옷감 너머로 진동을 밀어넣었다. 생체 파형이 완전히 찢어져 울부짖는 듯한 저주파로 번졌다.

`네 귀가…`

끝까지 쓰지 않은 손이 떨어졌다. 대신 이마를 내 어깨에 댔다. 떨림이 그 접촉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죄책감의 파형이었다. 날카롭게 솟구쳤다 급락하는 무질서한 진동이 척추로 읽혔다.

오른손에 쥔 공명핵 조각이 반응했다. 결정의 파형이 그 불규칙한 진동과 간섭을 일으켰다.

왼손을 올려 강서윤의 손등 위에 올려놓았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천천히 눌렀다. 짧은 진동 신호였다.

`여기 있다`.

고개를 들었다. 눈가의 물기가 푸른 반사광 속에서 번들거렸다. 그녀의 손이 내 왼손을 마주잡았다.

장갑 너머로 진동이 전해졌다. 파형이 조금씩 규칙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손을 풀지 않았다.

조각을 쥔 오른손에 진동 과부하가 계속 밀려들었다. 하지만 왼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등에서 청색 균열 흔적이 퍼져나갔다.

바닥 진동이 변했다. 규칙적인 저주파 충격이 던전 핵 영역에서 밀려왔다. 패턴이 무질서해졌다.

최영우가 바닥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측정 장비를 붙잡았다. 장비 화면이 깜빡였다. 안경테의 디스플레이를 조정하자 데이터가 스크롤됐다.

고개를 들었다. 손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짧고 긴 신호.

`데이터`.

측정기를 들어 올려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주파수 그래프가 불규칙하게 솟구치고 있었다. 오른손 검지로 맥동 간격을 가리킨 뒤, 두 손을 벌려 간격이 점점 커지는 동작을 보였다.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서툰 수화로 움직였다.

`차원 균열 확장 중`.

`이 던전은 완전 봉쇄되지 못했다`.

측정기가 경고 진동을 발했다. 최영우가 장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재빨리 버튼을 조작했다. 로그 저장 표시등이 녹색으로 깜빡였다.

허리춤에서 통신 장비가 진동했다. 던전 내부 간섭파와 다른 인공적인 변조 신호. 외부 대기조 채널이었다. 통신 연결이 복구되며 짧게 끊어지는 진동 신호가 손목 패드에 전달됐다.

신호를 읽고 손을 올렸다.

`긴급 철수 명령`.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외부 대기조 진입 대기 중`.

발바닥 너머로 던전 전체의 진동이 바뀌었다. 핵 영역의 잔여 진동이 증폭되며 저주파 파동이 굴러왔다. 공명핵 조각이 오른손에서 더 강하게 울렸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새로운 진동이 올라왔다. 저주파도 고주파도 아닌, 공명핵의 3.4헤르츠와 동기화된 파형. 진폭이 달랐다.

지금까지의 잔여 진동보다 깊고, 더 느리고, 더 컸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진동이 뒤통수를 때렸다.

조각이 반응했다. 푸른빛이 손바닥을 넘어 손목까지 번졌다. 등 왼쪽 어깨뼈의 균열 흔적이 더 밝게 빛났다.

최영우의 측정기가 경고음을 울렸다. 디스플레이를 확인한 그의 눈이 안경 너머로 커졌다. 손가락이 재빨리 수화를 만들었다.

`미등록 공명 주파수`.

핵 영역 천장에서부터 바닥으로 푸른 실금이 번져갔다. 진동이 벽면을 타고 파문처럼 퍼지며 암석을 갈랐다. 통신 장비가 다시 진동했다. 긴급 철수 명령이 재송신되고 있었다.

진동의 지배자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