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32화
서화연의 손목을 잡은 이현의 손이 천천히 풀렸다.
창밖 등불 행렬은 여전히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폐가 바깥을 가로지르는 대열이었다. 말 탄 자들의 그림자가 달빛에 길게 늘어져 언덕 비탈을 핥았다.
서화연은 촛불에서 손을 거두었다.
둘은 말없이 벽장으로 돌아갔다. 판자를 닫는 이현의 손이 느렸다. 소리를 죽인 움직임이었다. 서화연은 어둠 속에서 옷깃 안 편지를 다시 한 번 만졌다. 종이 가장자리가 손끝에 닿았다.
바깥에서 말발굽 소리가 멎었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폐가 앞 마당쯤. 흙바닥을 밟는 발소리가 몇 겹 포개졌다. 네 명. 아니, 다섯.
“이 구역은 앞선 조가 이미 훑었습니다.”
젊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다시 온 거다.”
나이 든 자의 대답이 벽장까지 닿았다.
“네 놈들이 놓친 게 있을 테니.”
서화연은 숨을 멈췄다. 이현의 손이 어둠 속에서 그녀의 소매를 짚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발소리가 마루로 올라섰다. 대청을 가로질렀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
첫 번째 방, 두 번째 방. 세 번째 방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추었다. 그들이 있는 방이었다.
“이 방은 앞서 확인했습니다. 판자 틈새 거미줄이——”
“거미줄은 다시 칠 수 있다.”
나이 든 자의 목소리가 바로 문밖에서 울렸다.
“열어라.”
서화연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옷깃을 움켜쥐었다. 이현이 판자 한쪽 모서리에 손을 댔다. 미는 것도, 당기는 것도 아닌, 단지 진동을 감지하려는 듯한 자세였다.
문이 열렸다.
발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 걸음, 두 걸음. 탁자 앞에서 멈추었다.
“등잔 심지가 아직 따뜻하군.”
서화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까 그녀가 촛불을 켜려다 이현이 막았던 것이 채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았다. 등잔의 온기가 남아 있을 만했다.
“누군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옷자락 스치는 소리.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살피는 듯한 기척이었다.
“탁자 밑 먼지가 흐트러졌다. 발자국이다. 하나는 장화, 하나는——”
서화연은 눈을 감았다. 이현의 장화. 그녀의 포선(布鞋).
“작은 신발이다. 여자거나, 체구가 작은 사내.”
“이 근처에 숨었을 수도 있습니다.”
“판자를 다시 확인해라. 이 방 벽장도.”
서화연은 이현의 옆구리를 더듬었다. 붕대 너머로 그의 체온이 손끝에 닿았다. 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판자에 댄 손만 미세하게 떨렸다.
바깥에서 무언가 금속성 소리가 났다. 칼집에서 칼이 빠져나오는 소리였다.
“열어보시지.”
이현이 말했다.
서화연이 숨을 들이켰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바깥에 닿지 않을 크기였다.
“뭐라고?”
나이 든 자가 물었다. 이현이 판자를 밀었다. 먼지가 흩날렸다. 달빛이 벽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이미 늦었소.”
이현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과 싸우러 온 게 아니오.”
검을 든 무인이 셋. 그 뒤로 둘이 더 보였다. 다섯 모두 대비전 표식이 박힌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나이 든 자가 이현의 관복을 훑어보았다. 은빛 허리띠 장식이 달빛에 반사되었다.
“의금부 경력.”
그가 칭호를 입에 올렸다. 무인들의 자세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의금부가 이 시각에 폐가에서 무얼 하는 게냐.”
“수사 중이오.”
이현이 벽장 밖으로 완전히 걸어나왔다. 서화연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현의 오른손이 뒤로 돌아가 그녀의 손목을 짚었다. 놓지 않았다.
“의금부 경력이 비무장으로?”
나이 든 자가 이현의 허리춤을 보며 말했다. 검은 없었다.
“검시관과 함께 검증 중이오. 이 시간이 아니면 확인할 수 없는 증거가 있어서.”
이현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무슨 증거냐.”
“의금부 수사 내용을 대비전 무인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소.”
나이 든 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손이 칼자루에 얹혔다.
“이곳은 대비전의 관할 구역이다.”
“틀렸소.”
이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서화연의 손목을 잡은 손은 여전히 뒤로 향해 있었다.
“경복궁 서북쪽 빈 전각은 의금부 기록상 폐비 서씨의 옛 거처로 등재되어 있소. 대비전 관할로 이관된 기록은 없소.”
무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나이 든 자의 눈이 이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경력께서 그걸 증명할 문서를 가지고 있느냐.”
“내일 아침 의금부 집무실에서 보여드리지.”
나이 든 자가 잠시 망설였다. 이현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의금부 관원을 연행하겠다면 그리 하시오. 다만 그땐 대비전 마마께 직접 연행 사유를 소명해야 할 것이오. 폐비 사건 재심 청구가 접수된 상태에서 의금부 경력을 구금한 이유를.”
달빛이 구름에 가렸다. 방 안이 어두워졌다. 칼끝이 아래로 내려갔다.
“좋다.”
나이 든 자가 검집에 칼을 꽂았다.
“내일 아침까지. 그 증거를 보지 못하면 그땐 대비전 마마의 명을 받들어 연행하겠다.”
“기다리시오.”
무인들이 돌아서자 이현이 말했다. 등을 보인 무인들의 어깨가 멎었다.
“대비전에 전할 말이 있소.”
나이 든 자가 고개만 돌렸다.
“의금부 경력 이현이 말씀드린다고. 폐비 서씨의 은비녀는 이미 확보했고, 이제 내부 구조를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고.”
서화연의 손목을 쥔 이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무인들은 대답 없이 방을 나갔다.
마루를 건너 마당으로 내려서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말에 오르는 소리, 말발굽이 흙을 박차는 소리. 멀어졌다.
완전한 정적.
“거짓말을 하셨군요.”
서화연이 손목을 빼며 말했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고 벽장으로 걸어갔다. 판자 안쪽 구석에서 검집을 꺼냈다. 허리띠에 차며 그가 말했다.
“반은 진실이오.”
“은비녀는 아직——”
“내부 구조를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그건 진실이오.”
이현이 창문을 닫았다.
“대비전이 알 필요는 없는 부분을 말하지 않았을 뿐.”
서화연은 탁자 앞에 섰다. 등잔 심지에 손을 대었다.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곧 다시 올 겁니다.”
“내일 아침까진 안 오오.”
이현이 검을 탁자 위에 올렸다.
“대비전 마마는 지금쯤 내 말을 전해 듣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요. 우리가 은비녀를 확보했는지, 아닌지.”
서화연은 이현의 얼굴을 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의 옆얼굴엔 피곤함이 서려 있었다. 왼쪽 옆구리를 감싼 붕대 자락이 옷깃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당신의 부상부터 제대로 살펴야 합니다.”
서화연이 말했다.
“내일 아침이면 대비전 무인들이——”
“그 전에 할 일이 있소.”
이현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까지 올린 소매 아래로 단단한 팔뚝이 드러났다.
“해 뜨기 전에 우물가로 가야 하오.”
“우물가?”
“심수련에게 보낼 연락을 확인할 장소요.”
이현은 품에서 작은 대나무 통을 꺼냈다. 속이 빈 대롱이었다.
“저번에 내가 써둔 문구가 아직 남아 있을지, 그녀가 답을 남겼을지. 지금 확인하지 않으면 내일은 늦소.”
서화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현은 이미 등잔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불빛이 그의 얼굴 아래쪽을 비추자 광대뼈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서화연은 그가 환약을 먹는 모습을 떠올렸다. 통증은 여전할 터였다.
“같이 가겠습니다.”
“안 되오.”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이 남아 있어야 이 장소를 지킬 수 있소. 우리가 여기 머물고 있다는 걸 대비전이 확신하면 안 되오.”
“당신 혼자 가면——”
“혼자 가는 게 더 빠르오.”
이현이 검을 집었다. 칼집을 허리에 고정하는 그의 손이 정확했다.
“한 시진이면 돌아오오.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시오.”
서화연이 입을 열려다 말았다. 이현이 검을 허리에 차고 방문을 나섰다. 문지방을 넘기 전 그가 잠시 멈추었다.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그가 말을 끊었다.
“그땐 벽장 판자 뒤에 숨겨둔 비상식량과 지도를 챙겨서 단독으로 남쪽 폐사로 이동하시오. 거기서 심수련 상궁을 찾으시오.”
그리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
서화연은 혼자 남았다. 등잔불이 심지에서 타닥 소리를 냈다. 탁자 위엔 이현이 두고 간 대나무 통의 자국만 남아 있었다.
이현이 돌아오기까지, 서화연은 등잔불 아래서 탁본을 펼쳤다.
은비녀의 윤곽이 먹으로 찍혀 있었다. 그동안 수십 번 살핀 종이였다. 서화연은 등잔을 들어 종이 뒤편에 비추었다. 불빛이 종이를 투과하며 은비녀 형상 안쪽으로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화연은 숨을 들이켰다.
은비녀의 머리 부분. 꽃문양이 새겨진 둥근 장식 바로 아래. 빛이 투과된 자리에 다른 부분보다 어두운 선이 보였다. 바늘 몸통을 따라 이어지는 가느다란 공간. 바깥쪽 은벽과 안쪽 빈 공간의 경계였다.
“비어 있다.”
서화연이 중얼거렸다. 손끝으로 탁본 위를 따라 그었다. 몸통 전체에 걸쳐 빈 공간의 윤곽이 감지되었다.
은비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속이 빈 관 형태였다. 그 안에 무엇인가 넣을 수 있는.
폐비가 남겼다는 각인. 심수련이 말한 ‘진실’. 겉면에 새긴 문양이 아니라 안쪽 면에 써넣은 글자였을 가능성.
문이 열렸다.
이현이었다. 그의 어깨에 밤이슬이 내려앉아 있었다. 손에 작은 대나무 통을 쥐고 있었다.
“심수련의 답신이 있었소.”
탁자 위에 대나무 통을 올렸다. 서화연이 통을 집어 들었다. 마개를 열자 좁쌀만 한 종이가 말려 들어 있었다. 펼쳤다.
짧은 한시였다. 첫 구절이 서화연의 눈에 들어왔다.
은빛 속 감춘 말, 지워지지 않는 흔적 —
다음 구절로 눈이 옮겨갔다.
열어도 부서지지 않는 것이 진실의 그릇이라.
서화연은 시를 다시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읽었을 때 그녀의 손이 탁본 위로 올라갔다.
“은비녀 안쪽입니다.”
서화연이 말했다.
“폐비는 은비녀의 속을 비워 거기에 진실을 새겼습니다. 겉면에는 꽃문양을 새기고, 안쪽 면에는——”
“기록을.”
이현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비전이 진짜 은비녀를 손에 넣으려는 거요.”
이현이 탁본을 내려다보았다.
“안쪽 빈 공간이 확인된다면, 그 안에 금속편이나 종이가 들어 있을 가능성도 있소.”
“은비녀 자체에 각인했을 겁니다.”
서화연이 탁본의 윤곽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었다. 손끝이 바늘 머리 부분에서 멈추었다.
“종이는 썩을 수 있고 금속편은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비녀 자체에 새긴 글자는——”
“은비녀가 있는 한 지워지지 않소.”
이현이 서화연의 말을 마무리했다.
잠시 침묵. 등잔불이 가늘게 흔들렸다. 서화연은 한시를 다시 탁본 옆에 내려놓았다. 시의 마지막 행이 등잔불 아래에서 반짝였다.
증거를 품은 바늘, 침묵 속에 서 있으니 —
“진짜 은비녀가 필요합니다.”
서화연이 말했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대나무 통에서 한지를 한 장 더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그리고 이것도 있었소.”
달빛에 익은 흰 천 조각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면직물. 한쪽 귀퉁이에 작은 매듭이 세 개 묶여 있었다.
“우물가에서 찾은 거요. 심수련이 남긴 신호.”
이현이 매듭을 하나씩 짚었다.
“내명부에서 쓰는 약속 표시. 매듭 하나가 하루. 세 개는 사흘.”
“사흘 뒤.”
“자시(子時).”
이현의 손가락이 흰 천을 반으로 접었다.
“장소는 남쪽 폐사. 우물가 돌계단 밑에 숯으로 써둔 글자가 있었소. ‘南廢寺 子時’.”
서화연은 흰 천을 집어 들었다. 매듭이 손바닥에 닿았다. 삼베도 명주도 아닌, 내명부 상궁들이 봉함에 쓰는 세저포(細紵布)였다. 심수련의 취향이 배어 있는 직물.
“사흘 뒤면 대비전의 추적이 절정에 이를 시기입니다.”
서화연이 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함정일 가능성도——”
“없소.”
이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심수련이 이 시점에 우리를 팔 이유가 없소. 그녀는 대비전에 이미 배신자로 찍혀 있소. 지금 그녀에게 이득이 되는 건 우리 손에 은비녀가 들어가는 것뿐.”
서화연은 탁본과 한시, 그리고 흰 천을 나란히 놓았다. 세 물건이 등잔불 아래서 각자 다른 빛을 반사했다. 종이는 노르스름한 먹 빛, 천은 창백한 달빛. 탁본은 그 사이에서 은은한 흑백의 경계를 드러냈다.
서화연이 입을 열었다.
“사흘 뒤 자시까지 이 은신처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이현이 검을 만지며 말했다.
“지키는 게 아니라 계속 움직여야 하오.”
“움직인다면 어디로——”
“폐가 주변엔 빈 공방이 세 개 더 있소. 사흘이면 충분히 돌아가며 머물 수 있소.”
서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탁본 위를 천천히 쓸었다. 등잔불이 한 번 깜빡이고 다시 밝아졌다.
“사흘 뒤 자시.”
서화연이 중얼거렸다.
“은비녀가 우리 손에 들어오면, 그 안의 각인을 탁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폐비 검시 기록, 순찰 기록 위조 증거, 백미초 반출 전표와 함께——”
“재심 청구의 물증이 완성되오.”
이현이 등잔불을 낮추며 말했다. 불빛이 작아지자 방 안 그림자가 길어졌다. 검집에 손을 얹은 이현의 옆모습이 어둠과 빛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서화연은 천천히 탁본을 말아 보관함에 넣었다.
흰 천도, 한시 쪽지도 품 안으로 들어갔다. 심수련의 필체가 접힌 종이 속으로 사라졌다. 사흘 뒤 자시.
남쪽 폐사. 봉인된 은비녀. 서화연은 옷깃을 여몄다. 편지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품었다.
“한 가지 더.”
이현이 갑자기 말했다. 서화연이 그를 보았다.
“사흘 동안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그리고 증거가 완성되면. 그땐 더 이상 숨지 않을 작정이오.”
서화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탁자 위의 등잔불에 머물렀다. 심지의 끝이 불꽃 속에서 하얗게 변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