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37화

환기구 너머의 발소리가 멎었다.

서화연은 숨을 죽였다. 이현의 손이 검자루에 닿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천장 틈새로 흙먼지가 한 줌 더 떨어졌다.

그때, 들렸다.

끄응—

쇠붙이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규칙적이었다. 누군가 무거운 물건을 끌고 있었다.

“이 근방은 확인했나.”

목소리는 멀었다. 환기구를 통해 울려서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저수조 쪽만 남았습니다.”

“가자.”

발소리가 멀어졌다. 철갑 마찰음도 함께 사라졌다.

서화연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은침 케이스를 쥐고 있던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이현이 검자루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저수조를 확인하고 돌아온다. 시간은 반 시진.”

“그 안에 할 일을 끝내야 합니다.”

서화연이 케이스를 열었다. 청원지 세 장을 기름종이에서 분리해 바닥에 펼쳤다. 은비녀를 그 옆에 놓았다.

이현이 촛불을 가까이 당겼다. 손에 든 작은 청동 거울로 불빛을 비스듬히 꺾었다.

청원지 표면에 옅은 청색 기름기가 떠올랐다. 위조 먹물 아래로 사라졌던 원본 글씨가 각도에 따라 선명해졌다.

서화연이 첫 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을미년 시월 초사흗날. 내의원 약방에서 조제. 처방 내용은 독초 혼합 탕약.”

“그 위에 무엇이라 덧썼는지 이제 보이겠군.”

서화연이 거울 각도를 미세하게 틀었다.

사약(賜藥)

두 글자가 탕약 처방 위로 겹쳐 나타났다. 붓끝의 힘이 달랐다. 원본은 가늘고 정확한 내의원 서체. 덧쓴 글씨는 획이 굵고 마지막 획이 안으로 꺾였다.

서화연이 두 번째 장을 들었다.

“독초 혼합 탕약의 재료 목록. 백미초 다섯 돈, 은엽초 세 돈, 부자 두 돈.”

“백미초는 폐비 처소에 자생했다. 은엽초는 이중 인장이 필요한 독초.”

“맞습니다.”

서화연이 두 번째 장의 각도를 바꿨다. 재료 목록 아래로 숨은 글씨가 드러났다.

대비마마의 구두 지시에 의함. 차후 전표 보충 예정.

이현이 숨을 들이켰다.

“반출 전표 없이 독초를 뺐다는 기록이군.”

“규정 위반입니다.”

서화연이 세 번째 장을 집었다. 위는 깨끗했다. 덧쓴 글씨도, 숨은 글씨도 보이지 않았다.

이현이 거울 각도를 돌려보다 멈췄다. “뒷면을 보시오.”

서화연이 세 번째 장을 뒤집었다. 건조한 먹물 자국만 보이던 뒷면에, 빛 각도를 낮추자 여섯 글자가 떠올랐다.

독침 발주. 김 씨 장인. 대비전 서화각.

서화연은 은비녀를 집어 들었다. 작은 탐침을 꺼내 중공 구조 안쪽을 따라 천천히 밀어 넣었다.

금속편이 있었다.

“각인이 있습니다.”

탐침 끝이 무언가를 스쳤다. 미세한 저항. 서화연이 은비녀를 귀 가까이 가져갔다. 탐침을 한 번 더 움직이자 금속편이 살짝 돌아갔다.

“안쪽 면이 열렸습니다.”

종이에 먹물을 묻혀 탁본하듯 눌러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도구가 부족했다. 서화연이 은침을 꺼내 끝에 얇은 천 조각을 감았다. 촛농 한 방울을 천에 묻혀 굳히기 전에 은비녀 내부로 밀어 넣었다.

천천히 눌렀다.

천을 꺼내자 촛농에 희미한 글자 흔적이 찍혀 있었다. 세 글자였다.

서화연이 거울 불빛 아래 눕혔다.

은엽초

이현이 세 번째 청원지의 뒷면 여섯 글자를 다시 읽었다. “이제 연결되는군.”

서화연이 천 조각을 다시 은비녀 안으로 밀었다. 다른 각도로 찍어냈다. 이번에는 긴 문장이었다.

열두 글자가 촛농에 박혔다.

독은 이미 짜여 있었다. 전하는 백미초만 아신다. 은엽초를 섞은 자는——

뒤가 짤렸다. 각인이 미완성이었다.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폐비마마는 사약이 오기 전에 이미 자리에 없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독침 자상을 입고 기록을 숨겼다는 말이오.”

“은비녀 안쪽에 진실을 새길 시간이 있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 침을 뽑았거나——”

“자상 부위에서 침을 제거한 자가 기록을 완성시켰다.”

서화연이 끄덕였다. 손끝이 떨렸다. 그녀가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렸다.

이현이 청원지 세 장을 순서대로 포갰다.

“위조 약재 기록. 불법 반출을 시인한 내부 메모. 독침 발주서. 그리고 은비녀에 새겨진 폐비의 마지막 증언.”

“네 개의 물증이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서화연이 은비녀와 청원지를 나란히 놓았다.

“대비마마가 직접 독살을 지시했다. 사약은 위장이었다. 죽음의 원인은 은엽초 중독과 자상—— 혹은 독침이 먼저였습니다.”

이현이 허리춤에서 청동 술병을 빼 한 모금 마셨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통증이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이것으로 법리 구성은 가능하오. 그러나——”

“그러나.”

서화연이 말을 이었다.

“제출자가 검율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도주자 신분입니다.”

이현이 술병을 내려놓았다. “거기에 대해 생각해둔 게 있소.”

그가 소매 안쪽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의금부 소송 절차 요람에서 뜯어낸 페이지였다.

“탄핵된 관리라도 증거를 제출할 수 있는 절차는 있소. 단——”

“피제출자의 신분이 저보다 높을 경우, 동급 이상의 관인이 증거 제출을 보증해야 합니다.”

서화연이 절차 요람을 받아 읽었다. 눈이 문장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이현 경력. 당신은 지금 의금부에서 직무 정지 상태입니다.”

“금패가 무효화되었을 뿐, 관직이 박탈된 것은 아니오.”

“종4품 경력이면 충분합니다.”

“그렇소.”

이현이 종이를 다시 접으며 말했다. “증거 제출은 내 명의로 하겠소. 당신은 배후 진술을 준비하시오.”

서화연이 그를 똑바로 보았다. “당신의 출생 비밀도 증거 제출 목록에 포함시키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현의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폈다.

“내가 전 왕세자의 서자라는 사실. 그리고 열한 살 때 폐비마마가 내 상처를 지혈해주었다는 증언. 이 둘을 검흔 대조와 함께 제출하겠소.”

“대비전이 반격한다면, 당신의 출생이 공격 지점이 될 것입니다.”

“알고 있소.”

이현이 잠시 침묵했다. 촛농이 한 방울 떨어져 종이 위에 굳었다.

“이미 당신 앞에서 말했소. 숨길수록 흠이 된다고.”

“조건이 아니라 증거로 내놓으면 대비전도 건드리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화연이 이현의 오른손을 보았다. 검지가 펴지고 있었다. 그녀가 시선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증거 제출 순서는 세 단계로 합니다. 첫째, 청원지 묵 반응 흔적 대조표로 기록 위조를 입증합니다. 둘째, 은비녀 각인과 독침 발주서로 독살 도구의 출처가 대비전임을 밝힙니다. 셋째, 이현 경력의 검흔과 폐비 검시 기록의 자상을 대조하여——”

“같은 칼날, 같은 날 밤이라는 증거를 제시한다.”

서화연이 붓을 들어 빈 종이에 순서를 적었다. 글씨는 작고 정확했다.

“네 번째 물증도 필요합니다.”

“은침이오.”

서화연이 케이스에서 은침을 꺼냈다. 촛불에 비스듬히 기울이자 내부 균열이 은은하게 드러났다. 균열 끝에 청록색 부식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은침은 폐비 사건에 사용된 독침과 동일한 장인의 작품입니다. 김 씨 장인의 단조 특성—— 수은 과다 혼입으로 인한 균열 패턴이 《독침 장인 도록》 일곱째 도면과 일치합니다.”

“당신 아버지의 유품이 대비전의 범행 도구를 입증하는 셈이군.”

서화연이 붓을 내려놓았다. 질문이 없었다. 그녀가 증거 뭉치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제 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이현이 기다렸다.

“제가 검율직 복귀를 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내일 심리에서 분명히 할 생각입니다.”

이현이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는 거요.”

“서씨 가문의 명예 회복. 폐비마마의 억울함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리고——”

서화연이 은비녀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이 진실이 의금부 기록고에 청원지로 보관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현이 긴 침묵 끝에 말했다. “당신은 검율로서 충분히 능력을 입증했소. 신분을 속인 것은——”

“결과적으로 관직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아니오.”

이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결과가 수단을 규정하지는 않소. 당신은 진실을 위해 그 자리에 있었소. 처음부터 끝까지.”

서화연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은비녀를 기름종이로 다시 싸기 시작했다. 손이 느렸다. 피로가 밀려오고 있었다.

“내일 심리가 끝난 뒤.”

이현이 말을 이었다.

“당신의 신분을 공식적으로 기록에서 정정하겠소. 의금부 검시관 업서화가 아니라, 서씨 가문의——”

“서화연.”

그녀가 말을 끊었다.

“이름은 서화연입니다. 기록 정정은 필요 없습니다. 새 기록을 한 줄 추가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어떤 기록이오.”

“의금부 검시 기록 제37건. 검시관 업서화의 검안서에 첨부된 증인 진술—— 진술인 서화연.”

이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이름으로 증언하는 증인이 되는 거군.”

“그렇습니다.”

서화연이 품에서 작은 기름종이 꾸러미를 꺼냈다. 청원지 세 장, 은비녀 탁본 천, 은침, 《독침 장인 도록》 필사본의 해당 페이지. 모두 하나로 묶었다.

그 꾸러미를 이현에게 건넸다.

“내일 아침, 이것을 당신이 제출하십시오.”

이현이 꾸러미를 받지 않았다.

“직접 제출하시오.”

“제 신분으로는——”

“내가 보증하겠소. 증거 제출인은 이현. 배후 진술인은 서화연. 두 사람이 함께 의금부 정청에 들어가는 거요.”

서화연이 그를 보았다. 촛불이 이현의 얼굴 절반을 비추고 있었다. 눈가의 흰머리가 빛에 닿아 은색으로 빛났다.

“함께.”

서화연이 말했다.

“위험을 나누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위험을 나누는 게 아니오.”

이현이 꾸러미를 받아 자신의 소매 안쪽에 넣었다.

“진실을 함께 전달하는 거요. 그게 당신이 원하는 바라면.”

서화연이 붓을 다시 들어 기록을 한 줄 썼다.

을미년 시월 경. 증거 제출 순서 확정. 제출인 이현. 진술인 서화연. 심리 신청 대상: 폐비 서씨 독살 사건 재심.

붓을 내려놓을 때 바깥 환기구 너머로 발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가까웠다.

“저수조도 없었습니다.”

“헛걸음이군. 철수한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멀어졌다. 이현이 손을 들어 촛불 심지를 낮췄다. 어둠이 방 안을 반쯤 삼켰다.

서화연이 물었다. “증언문 초안은 언제 쓰시겠습니까.”

“지금.”

이현이 빈 종이를 당겼다. 붓을 쥐는 손이 통증으로 약간 떨렸지만 글씨는 일정했다.

을미년 시월 경. 나는 의금부 경력 이현으로서 다음을 증언한다. 첫째, 나는 전 왕세자의 서자이다. 둘째, 폐비 서씨 사건 당일 밤, 나는 폐비 처소에 있었다.

그가 붓을 멈추고 오른쪽 옆구리를 짚었다.

서화연이 말없이 천을 건넸다. 이현이 이마를 닦고 붓을 이어갔다.

셋째, 폐비마마는 열한 살의 내게 지혈을 베푸셨다. 그 상처가 왼쪽 갈비뼈 아래 지금도 남아 있다.

이현이 검집에서 검을 빼 기름종이 위에 눕혔다. 칼날의 폭이 폐비 검시 기록 속 자상의 폭과 일치했다.

“생체 증거 대조는 당신이 기록하시오.”

서화연이 은침으로 이현의 상처 부근을 짚었다. 오래된 흉터의 길이, 방향, 깊이. 검시 기록의 치수와 한 자 한 자 맞춰갔다.

“길이 세 치 두 푼. 각도 좌하향. 칼날 폭 일치.”

기록을 마치자 새벽 공기가 방 안으로 스몄다.

어디선가 동이 트기 시작했다.

서화연이 증거 꾸러미를 품 안 깊숙이 넣었다. 은비녀, 청원지, 은침, 도록 페이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그녀가 창처럼 뚫린 환기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좁은 틈새로 희부연 빛 한 줄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현 경력.”

그녀가 빛을 보며 말했다.

“내일, 의금부 정청에서 이 모든 것을 펼치겠습니다.”

이현이 증언문 초안을 접어 소매에 넣었다.

“가겠소.”

짧은 대답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비녀 아래 진실3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