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100화
차량기지 정비고 사무실은 오전 아홉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신우진이 작업대 위에 부품 하나를 올려놓았다. B4-BV-2287. 청문회 증거로 제출됐다가 검증이 끝나 반환된 실물이었다. 옆에 디지털 캘리퍼스와 마모도 측정 템플릿을 가지런히 정렬했다.
최명식이 안전조끼를 입으며 다가왔다. 긴장한 듯 뒷목을 한 번 만졌다.
“오늘은 혼자 해봐.”
신우진이 한 걸음 물러섰다.
“혼자요?”
“측정부터 기록까지.”
최명식이 캘리퍼스를 집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신우진은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지켜봤다. 최명식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부품의 접촉면에 측정기를 댔다.
첫 번째 측정값이 디지털 화면에 떴다.
“마모도 1.23밀리.”
최명식이 중얼거렸다. 곧바로 정비 일지 책자를 펼쳤다. 왼손으로 페이지를 짚고 오른손으로 볼펜을 굴렸다. 날짜, 부품 번호, 측정값, 측정자 서명 칸까지 한 번에 내려 적었다.
신우진이 작업대로 걸어갔다. 일지를 끌어당겨 눈으로 훑었다. 오른손 검지가 숫자 위를 짚으며 따라갔다.
“좋아.”
한 마디만 했다. 최명식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진짜 괜찮습니까, 선배님?”
“네가 판단한 거잖아.”
최명식이 볼펜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말이 빨라졌다.
“솔직히 말하면요, 선배님이 안 보고 계시니까 더 떨렸어요. 옆에 안 계시니까 실수하면 어쩌나 싶고, 근데 또 옆에 계시면 계속 눈치 보게 되고—”
“됐다. 첫 번째 치고는 정확했어.”
신우진이 말을 잘랐다. 최명식이 멋쩍게 웃으며 뒷목을 다시 만졌다.
“다음 부품도 혼자 할게요.”
신우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박중호가 들어섰다. 안전 자문역 신분증이 왼쪽 가슴에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작업 점퍼 소매에는 여전히 오래된 유압유 얼룩이 남아 있었다. 발소리가 묵직했다.
최명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례했다.
“팀장님.”
“자문역이다, 이제.”
박중호가 퉁명스럽게 정정했다. 시선은 신우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른손에는 얇은 서류 봉투를 쥐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신우진이 봉투를 가리켰다.
“기증 확인서.”
박중호가 봉투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9년 전 보고서 원본이 오늘 아침 TF에 공식 기증됐다. 감사실에서 접수 번호 받았고.”
신우진이 봉투를 열었다. 확인서를 꺼내 접수 일자와 번호를 확인했다. 문서 하단에는 이지원의 서명이 찍혀 있었다.
“잘됐습니다.”
“네 보고서도 있지 않나.”
박중호가 신우진의 상의 안쪽 주머니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신우진이 천천히 주머니에서 접은 서류를 꺼냈다. 강재호의 조사 노트 사본이었다. 청문회 증거로 제출했던 것과 동일한 복사본. 그동안 상의 안쪽에 넣어 다니며 세 번 이상 접힌 자국이 선명했다.
“이걸 TF에 넣으려고 합니다.”
“잘 생각했다.”
박중호의 손이 잠시 허공에 멈췄다. 무언가 말을 고르는 듯했다.
“재호 선임 건으로 표창 거절했다 들었다.”
“현장에 남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박중호가 짧게 끊었다.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신우진의 어깨를 한 번 쳤다. 힘이 실린 손이었다.
신우진이 노트 사본을 서류 봉투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봉투 겉면에 볼펜으로 '강재호 선임 조사 노트 사본'이라고 적었다.
최명식이 조용히 다가와 봉투를 바라봤다.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다.
“그 선배님 노트가… TF 첫 번째 등록 문서가 되는 거죠?”
“그렇겠지.”
신우진이 짧게 답했다.
철도공사 본사 회의실. 오후 두 시.
긴 탁자에 '기록 보존 TF 발족식'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방청석에는 신우진과 박중호가 나란히 앉았다. 신우진의 손에는 강재호 노트 사본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지원이 TF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선이 곧았다. 회의실 불빛이 그녀의 왼쪽 손목 시계에 반사됐다.
“기록 보존 TF의 첫 번째 공식 등록 문서로, 강재호 전 검수관의 조사 노트를 지정합니다.”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이지원이 손을 들어 문서 등록부를 펼쳤다.
“등록 번호 TF-2024-0001. 문서 제목: B4 계열 제동 밸브 결함 조사 노트. 원본 소장자 신우진 검수원.”
그녀가 잠시 멈췄다.
“원본은 고 강재호 검수관이 2017년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현장에서 직접 측정한 수기 기록이며, 2024년 합동 청문회에서 증거번호 AU-2024-0087-03으로 채택된 바 있습니다. TF는 이 노트의 사본을 디지털 스캔·서고 보존·열람용 인덱스의 세 형태로 관리합니다.”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봉투를 이지원에게 건넸다. 두 사람의 손이 잠시 같은 봉투를 잡았다.
“제출자 확인 서명 부탁드립니다.”
이지원이 등록부를 신우진 쪽으로 밀었다.
신우진이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유성 매직을 빼들었다. 잠시 멈칫했다. 매직을 도로 꽂고 탁자 위의 볼펜을 집었다. 등록부의 제출자 서명 칸에 '신우진'이라고 적었다. 글씨는 또박또박했고, 마지막 획이 길게 뻗지 않았다.
한경숙이 방청석에서 일어나 탁자 앞으로 걸어왔다. 노조 측 참관인 명의 서명을 위해였다.
“노조도 이 등록에 공식 참관인으로 서명한다. 앞으로 노조 안전위원회 기록도 TF에 순차적으로 이관할 거야.”
한경숙이 등록부에 서명했다. 펜을 내려놓으며 신우진을 봤다.
“자네 선임 노트가 첫 번째라는 게… 묘하군.”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방청석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
박중호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이제야 제자리로 가는구만.”
이지원이 등록부를 덮었다.
“TF 제1호 등록을 공식 완료합니다. 이 노트의 보존 연한은 개정된 시행령에 따라 30년입니다.”
그녀가 잠시 숨을 골랐다.
“2024년 12월 19일. 기록 보존 TF 첫 등록.”
회의실 구석에서 복사기가 낮은 소리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등록부 사본이 한 장씩 출력됐다. 원본은 별도 서고로, 사본은 감사실과 노조 안전위원회로 각각 송부된다는 안내가 이어졌다.
신우진은 의자에 앉아 출력되는 사본을 바라봤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가로획을 한 번 그었다.
이지원이 서류 정리를 마치고 방청석으로 걸어왔다.
“신우진 자문역님, 노트 사본은 TF 서고에 입고되면 열람용 인덱스 번호가 별도 발급됩니다. 내일 오전 중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며 덧붙였다.
“강재호 검수관의 이름이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신우진이 일어나 회의실 창가로 걸어갔다. 늦가을 오후의 빛이 차양을 반쯤 통과해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창밖으로 차량기지 방향의 기중기 상부가 멀리 보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청문회 증언 종료 확인서를 꺼내 손에 쥐었다. 더 이상 접지 않았다. 그대로 상의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강재호 노트 사본이 있던 자리였다.
한경숙이 다가와 창가에 나란히 섰다.
“오늘 끝이 아니야. 이게 시작이지.”
신우진이 창밖을 향한 채 짧게 말했다.
“그렇군요.”
회의실 뒤편에서 TF 직원들이 등록부 사본에 구멍을 뚫어 바인더에 철하는 소리가 났다. 이지원이 탁자 위의 속기록 사본을 가방에 넣었다.
박중호가 문 쪽으로 걸어가며 신우진을 불렀다.
“한잔할래?”
“먼저 가십시오. 정비 일지 마저 써야 합니다.”
박중호가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 회의실을 나갔다. 복도 쪽으로 무거운 발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신우진은 창가에 홀로 남았다. 허공에 그었던 오른손 검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발족식이 끝난 뒤였다. 신우진은 복도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회의실에서 들리던 바인더 철하는 소리가 멀어지고, 형광등 불빛이 복도 바닥에 고르게 깔렸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참석자들이 복도로 흩어졌다. 박중호가 기증 확인증을 손에 쥔 채 안전 자문역 사무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한경숙은 노조원 두 명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이지원이 신우진의 팔꿈치 옆으로 다가왔다.
“잠시 시간 있으십니까.”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원이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옥상 문을 열자 오후 세 시 무렵의 햇살이 쏟아졌다. 바람이 불었지만 차갑지 않았다. 본사 건물 옥상에는 환기 설비 몇 개와 낡은 벤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래로 차량기지 유도로가 내려다보였다.
이지원이 벤치 쪽으로 걸어가지 않고 난간 앞에 섰다. 신우진은 그 옆으로 한 걸음 떨어져 섰다.
“강재호 선임님 노트가 TF 제1호 등록 문서가 되었습니다.”
이지원이 말했다. 손에는 TF 운영 규정 초안이 들려 있었다.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유도로 위에 정차된 B4 계열 차량을 훑었다.
“7년 동안 가지고 계셨죠.”
“그렇습니다.”
“이제 개인의 기억이 아닙니다. 제도의 기록입니다.”
신우진이 왼손을 들어 검지의 흉터를 엄지로 쓸었다. 손을 내렸다.
“그 노트만으로는 증명이 안 됐을 겁니다. 박중호 자문역님의 보고서, 아버님의 보고서, 현장 검수원 47명의 증언이 한 줄로 이어졌기에 가능했죠.”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든 초안을 한 장 넘겼다.
“앞으로 그 줄을 끊지 않는 것이 TF의 역할입니다.”
그녀가 초안의 한 페이지를 펼쳐 신우진에게 건넸다. ‘현장 자문역 정기 검토 회의 운영 규정’이라는 소제목이 인쇄되어 있었다.
“월 1회 정기 회의에 참여해주셔야 합니다. 검토 대상은 현장 검수 기록 중 보존 가치가 있는 문서의 선별과 등록입니다.”
신우진이 페이지를 훑었다. 참석자 구성, 회의록 작성 방식, 문서 등록 기준이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페이지를 접어 상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지원이 초안을 서류 가방에 도로 넣었다.
“신우진 자문역님.”
“예.”
“선임님 노트를 TF에 기증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신우진은 잠시 침묵했다. 유도로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차량 한 대가 천천히 검수고로 진입하고 있었다.
“원본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후배들을 가르칠 때 필요합니다.”
이지원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변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사본은 TF 기록으로 등록되어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신우진이 난간에서 손을 떼었다. 이지원이 옥상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 회의 일정은 추후 공문으로 보내겠습니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왔다. 본사 로비에서 이지원이 TF 사무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우진은 정문을 나서 차량기지 방향으로 향했다.
저녁 6시 10분. 차량기지 정비고 플랫폼.
신우진은 플랫폼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검수복 상의를 입고, 목에는 확대경을 걸었다. 오른손에는 유성 매직 한 자루를 쥐었다.
플랫폼 건너편으로 B4 계열 차량 두 대가 정차했다. 오후 정비를 마친 차량들이었다. 각 차량의 측면에는 점검 완료 태그가 붙었다. 태그의 서명란에는 검수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레일이 미세하게 울렸다. 북쪽 방향에서 열차 진입을 알리는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신우진은 시계를 보지 않았다. 레일의 진동 주기로 속도를 알 수 있었다. 정속이었다.
열차가 플랫폼을 통과했다. 무정차 통과.
차량 하부에서 제동 장치가 작동하는 특유의 공압음이 균일하게 들렸다. 인장강도 기준을 충족한 부품의 소리였다. 패킹 재질이 설계 기준대로 EPDM일 때만 나는 마찰음이 뒤따랐다.
“선배님!”
최명식의 목소리였다. 신우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최명식이 안전조끼를 입은 채 뛰어왔다. 오른손에는 클립보드가 들려 있었다.
“오늘 첫 독립 측정 일지 작성했습니다.”
최명식이 클립보드를 내밀었다. 신우진이 클립보드를 받아 들었다. 일곱 개 항목의 점검 결과가 최명식의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지막 칸에는 ‘측정자: 최명식’이라고 기입되어 있었다.
신우진이 클립보드를 돌려주었다.
“내일 첫 점검은 오전 7시. B4 계열 제동 밸브 교체 주기 도래 차량이다.”
최명식이 클립보드를 접어 겨드랑이에 끼웠다.
“알겠습니다. 준비해놓겠습니다.”
“측정값은 전자문서와 실물 일지 양쪽에 기록하라.”
“네, 선배님.”
열차의 마지막 차량이 플랫폼을 지나갔다. 공기가 플랫폼 가장자리를 따라 한 차례 밀려왔다가 가라앉았다.
신우진이 작업장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최명식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정비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책상 위에는 강재호의 조사 노트 원본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TF 자문역 참여 동의서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동의서 옆으로 최명식이 방금 작성한 정비 일지 사본이 놓였다.
창문 너머로 저녁 햇살이 밀려들었다. 사무실 벽면의 화이트보드에 내일 첫 점검 스케줄이 적혀 있었다. ‘0700 B4-2287 제동 밸브 교체 주기 확인. 측정자: 최명식. 확인자: –’.
신우진이 유성 매직을 꺼내 확인자 칸에 서명했다. 매직을 가슴 주머니에 다시 꽂았다.
의자에 앉지 않고 책상 앞에 선 채로 노트의 표지를 손끝으로 한 번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