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독문복수전

12화

안개가 묘역 전체를 덮고 있었다. 돌계단은 이끼 낀 채였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서리한이 맨 아래 계단에서 걸음을 멈췄다. 왼쪽 소매는 빈 채 바람에 움직이지도 않았다.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를 더듬었다.

백서린이 세 발짝 뒤에서 멈춰 섰다. 품속에서 천 주머니를 꺼내 조심스럽게 풀었다. 사마독의 반지, 나한철의 팔찌, 소연화의 비녀가 차례로 손바닥 위에 놓였다.

서리한이 고개를 돌려 증표들을 내려다봤다. 오른손을 내밀자 백서린이 그 위에 하나씩 얹었다.

첫 번째는 반지였다.

계단을 올랐다. 열일곱 계단. 숨이 차지 않았다. 사흘 전보다 걸음이 나아졌다. 묘비 앞에 이르러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반지를 묘비 받침돌 위에 올려놓았다. 금속이 돌에 닿는 작은 소리.

“사마독.”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잠시 묘비를 올려다봤다. 비문에는 ‘독문 제십삼대 문주 현천명’이라 새겨져 있었다. 이끼가 획 사이에 끼어 글자를 더 깊게 보이게 했다.

“금독단으로 스승님을 몰래 중독시켰다. 네 탐욕이 첫 번째였다.”

말을 끊고 두 번째 증표를 집었다. 나한철의 팔찌. 쇠사슬이 서로 부딪혀 가볍게 울렸다.

반지 옆에 내려놓았다.

“나한철.”

오른손 검지가 돌바닥을 한 번 쓸었다. 마른 흙이 손톱 밑에 꼈다.

“쇄골착으로 스승님의 뼈를 부쉈다. 받은 대로 돌려줬다.”

팔찌 안쪽 가죽 사이에 숨겨져 있던 비취 조각을 떠올렸지만 꺼내지 않았다. 때가 아니었다.

세 번째 증표는 소연화의 비녀였다. 허리띠에서 뽑을 때 바늘 끝이 손바닥을 살짝 긁었다. 아무 감각 없었다.

비녀를 반지와 팔찌 사이에 가지런히 놓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안개가 묘비 뒤 소나무 가지를 반쯤 지웠다. 백서린은 계단 아래에서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소연화.”

더 낮은 소리였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뱉었다.

“신경 마비독으로 스승님을 마지막 순간까지 괴롭혔다. 남은 숨조차 네 것이 되길 바랐다.”

오른손을 천천히 목 안쪽으로 가져갔다. 옷깃을 젖히자 푸른빛 비취 조각이 가느다란 가죽 끈에 매달려 드러났다. 스승의 목걸이에서 떼어낸 한 조각.

손가락으로 끈을 풀었다. 조각을 손바닥에 올리자 체온이 이미 남아 있었다.

묘비 아래, 세 증표가 정렬된 곳으로 손을 내밀었다. 비취 조각을 세 증표 바로 앞에 내려놓으려던 그 순간.

빛이 새어나왔다.

비녀가 먼저 반응했다. 은빛 바늘과 장식 사이, 이미 갈라져 있던 틈새로 옅은 녹색 빛이 흘러나왔다. 서리한의 손바닥에 있는 비취 조각도 같은 빛으로 답했다.

반지에서도 빛이 났다. 금반지 안쪽에서 숨겨져 있던 두 번째 비취 조각이 분리됐다. 금이 스스로 벌어지며 반지가 두 토막 났다.

팔찌는 마지막이었다. 가죽을 뚫고 세 번째 조각이 솟아올랐다. 쇠사슬이 저절로 풀어지며 바닥에 흘러내렸다.

서리한이 손바닥을 그대로 유지했다. 세 조각이 허공에서 천천히 회전하며 서리한의 손 위에서 합쳐졌다. 금이 간 자리에 빛이 흐르고, 모든 틈새가 메워졌다.

하나의 완전한 비취 목걸이.

백서린이 계단을 두 칸 올라왔다. 입술을 깨물며 그 빛을 응시했다.

“목걸이 안쪽에 뭔가 있어요.”

서리한도 보았다. 비취가 완성되자 목걸이 안쪽에서 얇은 금속판이 미끄러져 나왔다. 손톱 두께만 한 은백색 판금.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문자가 아니라 약재 배합도와 경락의 흐름.

백서린이 계단을 다 올라왔다. 숨을 죽이고 금속판을 들여다봤다. 서리한은 오른손에 목걸이를 쥔 채 금속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칠절마독공의 해독법이 아니에요.”

목소리가 떨렸지만 침착하게 이어졌다. 손가락은 떨리지 않고 금속판의 무늬를 따라 움직였다.

“모든 독의 작용 기전을 무효화하는 혈청이에요. 독을 머금은 피를 중화하는 게 아니라… 아예 독이 침투할 경락을 닫아버려요.”

서리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바닥을 감싼 목걸이의 온도가 식지 않았다.

“면역 혈청을 만들려면 여섯 가지 희귀 약재가 필요해요.”

백서린이 금속판을 들어 빛에 비췄다. 안개 사이로 스민 아침 햇살이 은백색 판에 반사됐다.

“독문의 진정한 유산은… 칠절마독공도, 만독귀원도 아니었어요. 모든 독을 무효화하는 혈청. 스승님께서 제자들 모두가 아니라 독을 극복한 자만이 찾도록 이 조각들을 나누신 거예요.”

서리한이 천천히 일어섰다. 오른손에 목걸이를 쥔 채 묘비를 마주했다. 빈 왼쪽 소매가 몸통 옆으로 흘러내렸다.

백서린이 금속판을 조심스럽게 약재 주머니에 넣었다. 발걸음을 한 걸음 물렸다.

서리한이 목걸이를 두 손처럼 모아 쥔 오른손으로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다. 묘비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두 무릎이었다.

돌바닥이 차가웠다. 감각은 왼쪽에만 없었다. 오른쪽 무릎으로 땅의 온도가 올라왔다.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묘비 받침돌에 가볍게 닿았다. 숨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스승님.”

목이 잠겼다. 목걸이를 묘비 앞에 내려놓았다. 완성된 비취가 안개 낀 빛 속에서 조용히 제 위치를 찾았다.

“돌아왔습니다.”

세 증표와 목걸이가 한 줄로 묘비 앞에 놓였다. 반지, 팔찌, 비녀, 그리고 이제 완전해진 목걸이.

백서린은 눈물을 닦지 않았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리한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왼쪽 어깨가 비어 있고, 오른손이 돌바닥을 짚은 채 떨리지 않았다.

안개가 조금씩 걷혔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아침 햇살이 묘비를 길게 비췄다.

묘지에서 숲길로 접어드는 동안 어깨에 걸친 약재 주머니가 금속판의 무게로 둔하게 움직였다. 백서린은 왼쪽으로 치우친 서리한의 걸음을 반 보 후방에서 지켜보며 걸었다. 흙길이 끝나고 독무 숲 바깥으로 나오자 어느새 해가 더 올라 있었다.

숲길은 고요했다. 독무 숲을 벗어나자 아침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졌다. 이슬이 마르기 전이라 흙냄새가 짙었다.

백서린이 걸음을 늦추며 서리한의 왼쪽 어깨를 살폈다. 붕대 아래 절단 부위가 깨끗했다.

“부기는 거의 가라앉았네요. 염증도 없고요.”

손을 떼며 한 박자 머뭇거렸다.

“혀의 감각은…… 아직인가요.”

서리한이 고개를 저었다. 침을 삼키는 목젖이 움직였다.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신경이 재생되는 부위가 아니라서.”

백서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음 낮았다. 서리한이 앞서 걷던 보폭을 늦추지 않고 대답했다.

“상관없다.”

백서린이 옆얼굴을 올려다봤다. 서리한의 시선은 길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약재 손질은 할 수 있다. 한 손으로도 절구질은 된다.”

백서린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연구소로 오실 생각이에요?”

“필요한 일이다.”

서리한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백서린은 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 숲길을 메웠다.

언덕을 넘어서자 작은 계곡 안에 연구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돌담에 감긴 칡넝쿨이 한겨울에도 푸르렀다.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가늘게 올랐다.

백서린이 대나무 문을 밀자 약초 냄새가 흘러나왔다. 감초와 당귀, 말린 지네가 섞인 냄새였다. 서리한은 문지방을 넘기 전에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냄새를 맡을 수는 있었지만, 혀끝으로 전해지는 감각은 없었다.

연구소 안은 정갈했다. 벽면을 따라 약장이 빼곡했고, 중앙에는 널찍한 연구대가 놓여 있었다. 창가 쪽 작업대에는 절구와 약탕기, 칼과 도마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백서린이 품에서 금속판을 꺼내 연구대 위에 올렸다. 금속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창으로 든 햇빛에 반사됐다.

“차부터 끓일게요.”

백서린이 화덕에 불을 붙였다. 주전자가 데워지는 동안 서리한은 작업대 앞에 섰다. 왼쪽 소매가 빈 채 대롱대롱 매달렸다.

약장에서 마른 약초를 한 움큼 꺼냈다. 백출과 복령을 손끝으로 구분해 도마 위에 올린 뒤, 오른손으로 칼을 잡았다. 한 번에 익숙하게 칼날이 내려갔다. 백출이 얇게 썰려 도마 옆에 쌓였다.

백서린이 차를 우려내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서리한의 손은 느렸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다. 칼날이 멈출 때마다 손가락으로 두께를 확인했다. 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의 속도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찻잔을 작업대 옆에 내려놓으며 백서린이 말했다.

“절구는 왼쪽 선반 아래에 있어요.”

서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썰어둔 약재를 절구에 옮겨 담았다. 공이가 내려앉을 때마다 절구통이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백서린은 연구대로 돌아갔다. 금속판을 펼치자 네 조각의 비취가 이음새에 박혀 있었다. 사마독의 반지, 나한철의 팔찌, 소연화의 비녀에서 나온 조각들. 그리고 스승의 목걸이에서 마지막 네 번째 조각.

손끝으로 금속판의 첫 줄을 더듬었다. 독문 고유의 암호문이었다.

종이와 붓을 꺼내 옆에 펼쳤다. 금속판의 첫 문장은 일곱 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암호를 하나씩 풀 때마다 붓끝이 종이 위를 짧게 스쳤다.

‘만독…… 제…… 혈청……’

붓이 멈췄다. 마지막 두 글자가 낯선 배열이었다. 백서린이 독경통해를 옆에 펼쳐 비교하기 시작했다.

절구질 소리가 멎었다. 서리한이 절구에서 빻은 약재를 체에 걸렀다. 고운 가루가 약지 위에 포슬포슬 쌓였다. 옆에서 차가 식어가고 있었다.

백서린이 붓을 내려놓고 목을 좌우로 풀었다. 종이에는 금속판의 첫 번째 문장이 완성되어 있었다.

“만독에 대한 면역은 독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혈이 독을 받아들여 스스로 순환시키는 것…….”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서리한이 고개를 들었다. 백서린의 손가락이 금속판의 다음 줄로 옮겨가는 것을 잠시 바라봤다.

작업대 위의 약지에는 백출 가루가 세 무더기, 복령 가루가 두 무더기 정리되어 있었다. 서리한이 손을 뻗어 찻잔을 감쌌다. 손끝으로 온도를 확인했다. 미지근했다.

찻잔을 들고 화덕으로 걸어갔다. 주전자를 다시 올리며 말했다.

“차, 다시 우리겠다.”

백서린이 고개를 들었다. 붓을 든 손이 멈췄다. 서리한을 바라보는 눈빛이 차분했다.

처음으로, 말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백서린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 작고 조용한 미소였다. 서리한은 대답 대신 주전자를 불 위에 얹었다.

물이 끓기 시작했다. 남만의 평화로운 오후, 연구소 안에는 절구 소리와 붓 소리가 번갈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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