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서찰의 비밀, 일곱 개의 밤

12화

불당 안은 촛불 세 개만이 어둠을 떠받치고 있었다.

불단 밑 흩어진 구슬 몇 알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 채 굴러다녔다. 대비는 불단을 등진 채 서 있고, 날리상궁 한씨는 무릎을 꿇은 채 품에서 한지 봉투를 빼내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윤소하였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허리춤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체크리스트. 열한 번 접힌 종이가 대비의 발치로 떨어졌다. 저절로 펴지지 않았다.

“소녀는 글을 읽을 줄 아옵니다.”

반말이었다.

대비의 손이 염주를 찾다 허공에서 멈췄다.

“네가…….”

“마마께서 중전마마를 죽이려 쓰셨던 그 거짓 편지의 필체도,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대비의 얼굴 근육이 움찔했다. 눈꼬리에 핏발이 비쳤다. 한 걸음 물러서며 불단 모서리를 짚었다.

“이것이 무슨…… 감히 어디서 나부랭이가……”

말을 잇지 못했다.

윤소하는 이미 허리를 굽혀 바닥의 체크리스트를 펼친 뒤였다. 마지막 줄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손톱으로 긁자 종이가 찢어졌다. 대비의 이름 한 획이 지워졌다.

“네 년이…… 중전의 계집애가 글을 읽다니…….”

목소리가 잠기다가 찢어지듯 높아졌다. 붉어진 눈으로 날리상궁을 돌아보았다.

“한 최상궁! 네가 저것을 여기 들인 것이냐?”

날리상궁은 봉투를 가슴에 안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손가락이 봉투 모서리에 닿자 미세하게 떨렸다.

“마마께서 그 옛날 가락지의 사연을 내세워 소신을…….”

“입을 다물어라.”

한 걸음 다가서며 손을 올렸다가, 문 밖 발소리에 동작을 멈추었다.

철판 부딪히는 소리. 여섯 개의 발이 동시에 멈추는 기척.

“내금위다.”

이겸의 목소리가 불당을 가득 채웠다. 문이 활짝 열리고 그가 먼저 들어섰다. 뒤로 병사 둘이 따라붙었다.

“마마, 더는 피할 곳이 없사옵니다.”

대비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손이 불단 위의 불경으로 향했다—낡은 표지의 경전 한 권. 책등을 움켜쥐었다.

이겸이 검지로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불경 보관대 전면 수색.”

병사 하나가 다가서자 대비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책등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변했다.

“내 불당을 능멸하는 자는…….”

“이미 능멸당했사옵니다.”

이겸이 한 걸음 다가서며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대비전 전용 삼합청명사 잘린 조각.

“이 종이에 쓰인 필체는, 신의 부친을 모함했던 바로 그 서찰과 같소. 하물며 십 년 전 그 사건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획이오. 오늘 밤 대비전 불경 보관소에서 이 중간자 쪽지를 옮기던 자도 이미 확보했소.”

대비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불경이 불단 아래로 미끄러졌다.

날리상궁이 그 틈에 몸을 일으켰다. 두 손으로 봉투를 이겸에게 내밀었다. 봉투 모서리에는 낡은 호박 가락지 자국이 눌려 있었다. 손을 내밀고 나서야 처음으로 대비를 올려다보았다.

“이 봉투 안에는…… 중전마마께서 친히 쓰신 서찰이 들어 있사옵니다. 침방 나인 강빛나 앞으로 보내신.”

대비가 돌아보았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네가…… 네가 결국……”

“마마께서 그때 소신에게 말씀하셨사옵니다. 호박 가락지를 돌려받고 싶거든 불경 속 쪽지를 전달하라 하셨사옵니다.”

날리상궁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소신은 그 가락지가 무서워 대비전의 편이 되었사옵니다. 중전마마를 지키고 싶었으나, 방법은 언제나 마마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었사옵니다.”

“거짓이다!”

대비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이미 병사 하나가 불단 뒤 불경 보관대에서 경전 서너 권을 꺼내 펼친 뒤였다.

“종사관님.”

경전 한 권을 펼쳐 들었다. 책갈피처럼 끼워진 쪽지의 붓자국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다. ‘밀자 이관은 자정 이후. 불경 세 번째 칸.’

이겸이 쪽지를 받아 들었다. 왼손잡이 필체. 과거 부친의 사건 기록과 정확히 동일한 획의 방향.

“서대감으로부터 이미 이 필체의 주인을 확인했소. 대비전 문서를 전담하던 차 씨.”

대비의 몸이 굳었다. 시선이 허공에 멈추었다. 바닥에 흩어진 염주 알 하나가 병사의 발에 밟혀 부서졌다.

“모르는 일이다…… 나는 모르는…….”

“마마.”

윤소하가 일어섰다. 손바닥 안에는 찢긴 체크리스트 조각이 말려 있었다. 불빛이 눈동자 가장자리를 스쳤다.

“소녀를 구해 준 이는 침방 나인 강빛나였사옵니다. 중전마마의 서찰은 그녀가 품에 안고 죽었사옵니다.”

찢긴 종잇조각을 촛불 받침 밑으로 굴러간 구슬 곁에 내려놓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마지막 글자를 지우겠나이다.”

촛불 하나가 심지 끝에서 타며 꺼졌다. 연기가 가늘게 올라 불단 위로 흩어졌다.

불당 안 촛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대비의 염주가 쏟아진 쪽으로 병사들이 마지막 구슬까지 수거했다. 날리상궁은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 호박 가락지가 빠진 자리에 흰 살이 눌려 있었다.

“둘째 쪽지는 신유월 스무하룻날, 셋째는 계축월 초이레. 모두 불경 밑판에 끼웠사옵니다.”

이겸이 불경 더미에서 꺼낸 쪽지 세 장을 차례대로 펼쳤다. 왼손잡이의 삐친 획이 촛불 아래서도 선명했다.

“차씨는 어디 있느냐.”

날리상궁이 불당 서쪽 벽감을 돌아보았다.

“대비전 지밀 최상궁의 밀실 뒤편입니다. 피신하기 전, 거기서 마지막 쪽지를 작성했사옵니다.”

이겸이 고개를 돌리자 부관 둘이 즉시 벽감 뒤로 향했다. 잠시 후, 붓과 먹통을 든 채 웅크린 사내가 끌려나왔다. 왼손 손가락의 먹물이 아직 채 마르지 않았다.

이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네놈이 쓴 것이, 과거 이현우 장군의 역모 서찰과 같다. 인정하느냐.”

차씨가 왼손을 움켜쥐었다.

“……그 서찰은 이곳에서 작성하지 않았소.”

“어디서 썼느냐.”

“대비전 별채 문서고. 지밀 최상궁이 시켰소.”

이겸이 품에서 필체 대조 문서를 꺼내 병사에게 건넸다.

“이 자의 자백을 모두 기록하라. 이현우 장군 역모 사건과 이번 가짜 서찰, 그리고 모든 쪽지의 작성 일시와 장소까지.”

불당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선전관이었다.

“승전색이 대전에서 오셨소이다. 전하의 친필 교지가 내려왔습니다.”

이겸이 몸을 돌렸다. 병사들이 도열하는 사이, 승전색이 검은 칠함을 받쳐 들고 불당 안으로 들어왔다. 교지가 펼쳐졌다.

“대비 민씨는 중전을 모함하고 왕실의 비밀을 왜곡한 죄로, 오늘부로 수강궁 별당에 유폐한다. 중궁전 복권의 교지는 삼일 내에 반포하며, 내금위 종사관 이겸은 이현우 장군 역모 사건을 재조사하라.”

대비가 불단을 짚고 일어섰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이 나라의 대비다. 너희가 나를……”

두 명의 최상궁이 다가와 대비의 양팔을 받쳐 들었다. 대비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문밖으로 끌려나가며 마지막으로 돌아본 것은 이겸이 아니라 윤소하였다.

“네 어미도…… 나를 속였다.”

윤소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비의 시선이 문밖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겸이 품에서 중전의 진짜 서찰을 꺼냈다. 봉인은 이미 뜯겨 있었다. 그가 서찰을 내밀었다.

“이것이 중전마마께서 네 출생의 어머니, 강빛나 최상궁에게 쓴 서찰이오.”

윤소하가 받아 들었다. 첫 줄을 읽는 손끝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네가 지킨 그 아이는, 나의 아들이다’.”

촛불이 한 번 일렁였다. 눈이 다음 줄로 내려갔다.

“ ‘그 아이의 이름을, 네가 지어다오. 내 아비가 지어준 그 이름 대신, 너의 말로’.”

호흡이 얕아졌다. 서찰의 마지막 구절이 촛불 아래 드러났다.

“ ‘빛나, 이 모든 것을 네게 맡기니, 그 아이를 나의 아들로 살게 하지 말고, 너의 아들로 살게 하라’.”

손이 서서히 내려갔다. 종이가 허리춤까지 내려와 멈추었다. 이겸을 올려다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강빛나 최상궁이 지은 것이옵니까.”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윤소하가 서찰을 접었다. 제 손의 온기가 종이를 상하게 할까 두려운 듯, 아주 천천히 접었다. 접힌 서찰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불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촛불이 어깨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이름 그대로, 살아내겠나이다.”

목소리는 작고 조용했으나 불당의 적막을 깨뜨리기엔 충분했다. 이겸이 곁에 서서 불단을 올려다보았다. 차씨가 끌려나간 문밖으로 새벽의 첫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화로의 불씨를 바라보며 이겸이 말을 이었다. 윤소하는 한 걸음 다가서서 그의 손에 든 종이 조각들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자선당 후원의 매화나무 가지가 동트기 직전의 푸른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차령 최상궁의 발소리가 회랑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윤소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소매 안에서 체크리스트의 종이 끝이 손가락에 닿았다.

이겸이 정자 기둥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품 안에는 중전의 진짜 서찰과 대비의 지령 쪽지, 필체 대조 증거 문서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차령 최상궁께서 무사히 퇴궐하셨소.”

윤소하가 정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작별 인사를 받았사옵니다.”

목소리는 평온했다. 복수를 완수한 자의 그것이라기보다, 긴 밤을 지나 이제 막 날이 밝는 것을 지켜보는 이의 어조였다. 정자 한쪽에는 내금위에서 가져온 작은 화로가 놓여 있었다.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이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중전의 서찰은 아니었다. 대비가 불경 사이에 숨겨둔 지령 쪽지들과, 가짜 서찰의 초본 조각들이었다.

“이것들만 남았소.”

윤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매 안에서 체크리스트를 꺼내 잠시 들여다보았다. 일곱 칸의 이름이 모두 지워진 종이. 마지막 이름 위로 획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종이를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었다.

“내일이면 내금위 청사에 정식으로 보관될 증거들이오. 하나는——”

이겸이 지령 쪽지 한 장을 집어 화로 위로 내밀었다.

“오늘, 여기서 끝내고 싶소.”

종이의 모서리가 불씨에 닿자 작은 불꽃이 일었다. 윤소하가 접은 체크리스트를 그 불꽃 위에 올렸다. 두 종이가 함께 타들어 갔다.

“다시는 신뢰하지 못할 줄 알았사옵니다.”

입술이 움직였다. 불타는 종이를 바라보며, 종이가 재로 변하며 오그라드는 모양을 눈으로 좇았다.

“돌아왔을 때, 저는 모두가 거짓이라 생각했사옵니다.”

이겸이 가짜 서찰 초본을 한 장씩 화로에 넣었다. 불빛이 얼굴에 어른거렸다.

“나리께서도, 차령 최상궁께서도, 결국 저를 버릴 것이라 여겼사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소.”

이겸의 목소리가 반 톤 낮았다.

“당신이 내게 아버님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말해 주었을 때, 나는 알았소.”

마지막 쪽지를 불에 떨어뜨렸다. 불꽃이 마지막으로 치솟았다가 잦아들었다.

“당신은 나를 속이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윤소하가 시선을 들었다. 화로의 잔열이 눈동자에 옅은 호박빛으로 번졌다. 서늘하던 눈매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 체크리스트를 쥐고 있던 손가락 사이가 비어 있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겸이 손을 내밀었다. 정확히 그녀 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친 채.

“내가 믿겠소.”

동쪽 하늘이 옅은 남색에서 푸르스름한 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매화 가지 끝에 맺힌 이슬이 떨어지기 직전의 무게로 반짝였다.

윤소하가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내금위 종사관의 굳은살 박인 손. 십 년 전 아버지의 편지를 쥐었을 그 손이, 지금은 그녀를 향해 있었다.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손끝이 먼저 닿고, 손바닥이 포개졌다. 왕복 한 번처럼 작고 정확한 동작이었다.

“고맙사옵니다.”

목소리는 한결 더 낮고 정중했다. 침묵 사이에 날이 서지 않고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이겸이 그 손을 가볍게 감싸쥐었다. 검 굳은살이 바늘 굳은살 위로 포개졌다.

동녘 하늘이 완전히 열렸다. 첫 햇살이 자선당의 기왓골을 넘어 후원으로 쏟아져 내렸다. 화로의 재가 바람에 흩어졌다. 증거도, 체크리스트도, 복수도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마주잡은 두 손의 온기만이 남았다.

윤소하가 천천히 일어섰다. 손은 놓지 않았다. 이겸도 함께 일어났다. 정자 밖으로 나란히 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발밑으로, 봄볕이 길을 만들고 있었다.

서찰의 비밀, 일곱 개의 밤1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