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탑의 실패한 천재는 정령의 말을 듣는다
12화
아린의 망치가 보수파 마법사의 마력 장벽을 깨부쉈다. 파편이 복도 바닥에 쏟아졌다.
「지금이야!」
망치를 든 채로 아린이 외쳤다. 왼쪽 어깨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루안이 미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쟤, 꽤 쓸 만하네.」
미르가 입구 쪽을 힐끗 보며 말했다.
「인간치고는.」
“원래 그랬어.”
루안은 이미 걸음을 옮겼다. 열두 기둥이 빛나는 중앙을 향해.
무영자 열 명이 아린의 뒤에서 마력 억제구를 던졌다. 보수파 마법사 셋이 뒤로 물러섰다. 하급 정령 두 개가 통로 천장에 붙어 적대 정령의 시야를 가렸다.
「루안! 가!」
아린이 다시 망치를 휘둘렀다. 금속과 마법진이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케인의 마력 장벽이 좁아졌다. 팔의 붉은 문신이 괴사하며 검게 번지고 있었다. 그래도 장벽은 버티고 있었다.
「카이젤.」
케인이 입구 너머를 향해 말했다.
「이쪽은 내가 한다.」
카이젤의 검은 아우라가 한 번 수축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아우라가 복도 입구 전체를 덮었다. 적대 정령 하나가 비명 비슷한 파동을 내며 뒤로 밀려났다.
루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심판의 방 안. 열두 기둥의 빛이 정중앙 원반 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미르가 먼저 원반 위로 올라섰다. 반투명한 발이 검은 돌에 닿았다.
「루안, 여기.」
“알아.”
루안도 원반 위에 섰다. 미르의 맞은편. 왼쪽 가슴의 낙인에서 백금색 빛이 새어 나왔다. 통증은 없었다. 오히려 따뜻했다.
기둥들의 빛이 동시에 방향을 바꿨다. 네 가지 색이 원반 가장자리를 따라 회전하기 시작했다. 흰색, 푸른색, 금색, 은색. 빛의 띠가 두 사람 주위로 원을 그렸다.
「이거, 옛날 거야. 내가 태어나기 전에 쓰던 방식.」
“기억이 나.”
「전부는 아니야. 파편들만.」
미르가 원반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검은 돌 표면에 고대 문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루안의 낙인과 같은 모양이었다.
「300년 전. 처음 계약이 맺어졌을 때. 그때도 이 방을 썼어. 시벨라가 에르다리온을 가둔 곳.」
목소리가 낮아졌다. 비꼬는 말투가 사라지고 무언가 다른 것이 스며들었다.
「내 선조가 죽은 곳이야.」
원반 위의 빛이 갑자기 멈췄다. 네 가지 색이 분리되며 각기 다른 기둥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모였다. 미르의 발밑에서만.
「루안. 나는 에르다리온의 후계자야. 그런데 이름이 없어. 300년 동안 후계자마다 이름을 빼앗겼으니까.」
루안은 숨을 내쉬었다. 길게, 천천히.
“이제는 다르다.”
「그래. 네가 그걸 증명했지.」
미르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너는 나한테 묻지 않았어. 이름을. 계약을. 아무것도.」
“물어야 하는 거였어?”
「아니.」
미르가 손을 내렸다. 손끝에서 백금색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이 루안의 낙인에 닿았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말할게.」
원반 아래 문양이 완전히 떠올랐다. 열두 기둥의 빛이 모두 백금색으로 변했다. 방 전체가 그 빛으로 가득 찼다.
「내 진명은.」
미르의 형체가 순간적으로 투명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키가 조금 자란 듯했다. 145센티였던 실루엣이 160센티 가까이로 늘어났다.
「세리니아. 에르다리온의 마지막 핏줄.」
빛이 루안의 낙인 속으로 스며들었다. 금이 갔던 자리가 완전히 갈라지며 떨어져 나갔다. 천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루안은 왼쪽 가슴을 내려다봤다. 낙인은 없었다. 대신 백금색 문양이 피부 위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세리니아.”
입 밖으로 내자 목소리가 떨렸다.
「……뭐야, 그 표정.」
미르— 세리니아가 피식 웃었다. 눈가에 빛 입자가 맺혔다.
「네가 그렇게 쳐다보니까 이상하잖아.」
“당연한 거 아냐.”
루안이 손을 들어 문양이 있던 자리에 얹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문양이 다시 한 번 빛났다. 방 전체가 아니라 마탑 전체로 퍼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발밑이 울렸다.
「계약. 완성.」
세리니아가 선언했다. 목소리에 비꼼은 없었다. 단호했다.
「강제 계약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거야.」
그 순간, 심판의 방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놀람이었다.
시벨라가 움직였다.
300년 동안 땅에 닿지 않던 발이 바닥을 밟았다. 대리석 위로 맨발이 한 걸음, 두 걸음. 검은 돌 원반 앞에서 멈췄다.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왼쪽 금색 눈과 오른쪽 은색 눈이 동시에 세리니아를 향했다.
「에르다리온의 후계자. 나는 당신의 선조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알아.」
세리니아가 짧게 대답했다. 머리카락이 푸른색에서 옅은 백색으로 변했다.
「기억 났어. 300년간 네가 한 짓도. 10년 전 내가 왜 모든 계약을 거부했는지도.」
「그렇다면——」
「사과는 듣지 않을 거야. 대신 물을게. 이 의식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지.」
시벨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고 담담한 미소였다.
「300년간 이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누군가 내 죄를 끝내러 오는 순간을.」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손끝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심판의 방 전체가 진동했다. 열두 기둥의 백금색 빛이 회전을 멈추고 하늘로 솟구쳤다. 천장을 뚫고 마탑 전체로 퍼져 나갔다.
마탑 최하층에서 무영자 하나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천 조각 아래 낙인이 뜨거워졌다가 갑자기 식었다. 천을 들추자 피부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무영자도 같았다. 또 다른 무영자도.
중앙 광장에서 마법사 하나가 자신의 문신을 내려다봤다. 강제 계약의 증표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통증은 없었다. 그저 사라지고 있었다.
심판의 방에서 케인의 팔에서 검게 괴사하던 문신이 멈췄다. 붉은 빛이 식고 흉터만 남았다.
「……끝난 건가.」
케인이 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력 장벽이 천천히 사라졌다.
카이젤의 아우라가 수축했다. 검은 형체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카이젤.」
「……알고 있다.」
진홍색 눈이 시벨라를 향했다.
시벨라의 발끝이 빛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발목, 정강이.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루안. 너는 한 번도 내게 절하지 않았지.」
“습관이 없어서.”
「그래서 좋았습니다.」
무릎까지 빛이 올라왔다. 실크 로브의 끝자락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이 탑은 이제 당신들 것입니다. 부수든, 다시 세우든——」
허리까지 빛이 번졌다. 목소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닙니다.」
가슴께까지 빛이 닿았다. 시벨라는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 300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반박당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리고.」
빛이 목까지 올라왔다.
「미안합니다.」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시벨라 레온하르트의 형체가 완전히 흩어졌다. 백금색 빛 입자들이 잠시 공중에 머물다가 열두 기둥의 빛과 함께 천장 너머로 사라졌다.
심판의 방이 조용해졌다.
루안은 원반 위에 서 있었다. 세리니아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키가 자란 만큼 시선의 높이가 가까워졌다.
「……끝났네.」
비꼬는 말투로 돌아왔지만, 조금 느렸다.
“그래.”
「너, 지금 우는 거야?」
“아니.”
루안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다크서클 아래로 얇은 선이 번졌다.
「거짓말.」
세리니아가 손을 들어 루안의 뺨 근처 허공에 멈췄다. 반투명한 손가락이 닿지 않은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
「하. 계약 완성하자마자 거짓말하다니. 별로 안 믿음직한데.」
“……그러게.”
루안이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손톱 주변의 잉크 얼룩이 조금 번졌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망치를 질질 끄는 소리.
「끝났어? 다 끝난 거야?」
아린이 심판의 방 입구에 기대서서 물었다. 왼쪽 어깨의 피가 팔꿈치까지 흘러내렸다.
“끝났어.”
루안이 대답했다.
「……아, 진짜 끝났구나.」
아린이 망치를 내려놓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무영자들이 하나둘 가슴의 천 조각을 만지고 있었다. 낙인이 없는 피부를 확인하며.
케인이 심판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팔의 흉터를 감추지 않은 채.
「마탑 전체에 파동이 퍼졌다. 모든 무영자의 낙인이 소멸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어.」
“보고받을 자격, 있는 거냐.”
루안이 물었다. 건조한 어투 그대로였다.
「……지금은 없다고 본다.」
케인이 짧게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이제 내 계약도 끝났으니까.」
카이젤이 케인의 어깨 위에서 형체를 드러냈다. 검은 아우라는 사라지고 작은 어둠의 형태만 남았다.
「계약은 끝났다. 하지만——네가 원한다면, 새로운 계약을 맺어도 좋다. 진짜 계약을.」
케인이 눈을 깜빡였다. 대답 대신 팔에 남은 흉터를 손으로 덮었다.
루안을 포함한 마탑 내부의 인물들은 이미 낙인 소멸을 인지했고, 케인과 카이젤은 계약 종료를 확인한 상태다. 그러나 복도에서의 격렬한 전투 흔적과 케인의 심각한 부상은 앞 꼬리에서 제시되지 않은 새로운 정보이므로, 이 상태로 심판의 방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 경과와 그로 인한 육체적 손상을 연결해야 한다. 또한 앞 꼬리에서는 카이젤이 작은 어둠의 형태였으나 다음 머리에서는 절며 걷는 구체적 형상을 드러내므로,재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DRECT
입구에서 폭음이 멎었다. 마지막 마법진이 깨지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아린의 망치가 바닥에 떨어졌다.
심판의 방 문이 열렸다.
케인이 먼저 들어왔다. 왼쪽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고, 걸음마다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오른손은 여전히 마력 장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손가락 끝이 검게 괴사해 있었다. 목의 붉은 문신 띠가 맥박에 맞춰 수축하며 괴사한 살이 문신을 따라 번지고 있었다.
그 뒤로 카이젤이 걸어 들어왔다. 왼쪽 앞다리를 절고 있었고, 등에서 흘러나오던 연기 같은 빛이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늦었다.」
카이젤이 으르렁거렸다.
「시벨라는 끝났다.」
루안이 원반 위에서 말했다. 미르는 원반 중앙에 선 채, 네 가지 빛이 기둥을 타고 천장까지 번진 상태로 정지해 있었다.
케인이 원반 앞에서 멈춰 서서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붉은 문신이 빛을 뿜었다.
“카이젤.”
갈라지지 않은 낮은 목소리였다. 카이젤이 진홍색 눈을 돌렸다.
“아버지가 너를 포획하는 데 7년을 썼다. 나는 그걸 물려받았을 뿐이다. 내가 네 진명을 아는 건 강제 계약의 증표 때문이다.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다.”
케인이 숨을 들이쉬었다. 목의 문신이 다시 수축하며 손톱 밑이 검게 변해갔다.
“이름을 묻지 않을 거다. 대신——”
그가 오른손을 들어 카이젤 쪽으로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피와 재가 섞여 있었다.
“케인 아르겔. 그게 내 진명이다.”
카이젤의 진홍색 눈이 커졌다. 등에서 끊어지던 아우라가 한순간 완전히 멎었다.
「인간이 진명을 먼저 내밀다니.」
낮고 거친 목소리 끝에 감정이 묻어 있었다.
“네가 거부해도 좋다. 강제 계약은 끝났으니까.”
케인의 손이 떨렸다. 괴사가 팔꿈치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카이젤이 한 걸음 다가왔다. 목의 붉은 문신이 한 번 크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목을 길게 빼서 케인의 손바닥에 이마를 댔다. 검은 털이 핏물에 젖었다.
「발키온. 내 진명이다, 케인 아르겔.」
방 안의 공기가 멎었다. 그 순간 목의 붉은 문신이 갈라졌다. 금이 간 자리에서 푸른빛이 새어나왔다.
케인의 팔에 번지던 괴사가 멈추고, 검게 죽은 살이 손끝부터 정상 색으로 돌아왔다. 문신 전체가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파트너의 증표였다.
케인이 무릎을 꿇고 오른손으로 카이젤의 목을 감싸 안았다. 푸른 문신이 두 사람 사이에서 빛났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카이젤이 말했다. 미르는 원반 위에서 아무 말 없이 그 둘을 내려다보며 빛 입자를 가라앉혔다.
루안이 원반에서 내려와 케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계약은 처음부터 이래야 했어.”
케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마탑을 바로잡을 거다.”
제자리로 돌아온 목소리였다.
다음 날 아침. 무영자 은거지 입구.
밤새 은거지 안은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은 체념의 고요가 아니었다. 무영자들이 벽에 기대지 않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지나갔다.
루안은 입구 바위에 앉아 있었다. 왼쪽 가슴의 천 조각을 뗀 자리에는 깨끗한 피부만 남아 있었다. 미르가 그 옆에 섰다. 빛이 부드러워지고 몸의 윤곽이 선명해졌으며, 등 뒤에서 희미한 날개 형상이 아른거렸다.
「상급 정령이 된 기분이냐.」
「하. 기분? 내가 원래 이런 존재였어, 멍청아.」
“자랑이냐.”
「사실이다.」
무영자들이 하나둘 입구 쪽으로 모여들었다. 아린이 망치를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오른쪽 눈썹이 갈라졌지만 웃는 얼굴이었다.
“선배. 진짜 안 갈 거예요? 마탑에서 연락 왔어요. 케인 선배가 지금 마탑을 재정비 중이래요. 선배한테 오라는——”
“안 가.”
루안이 바위에서 일어나 무영자들 쪽으로 돌아섰다. 그들의 가슴에도 낙인은 없었다.
“여기에 남는다. 마탑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다. 대신——”
그가 은거지 입구의 돌벽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여기에 새 마을을 만든다. 정령과 계약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곳.”
무영자들 사이로 낮은 웅성거림이 퍼졌다.
「너 혼자 할 수 있겠냐. 네가 실패하면 나도 웃음거리가 되는데.」
미르가 비꼬았다.
“같이 하면 되잖아.”
루안의 건조한 대답에 미르가 한 박자 늦게 눈을 깜빡였다. 빛 입자가 한 번 튀었다.
「……당연하지. 내가 안 도우면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아린이 웃으며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좋네요! 나도 여기 있을래요. 어차피 낙인 없어졌으니까 마탑에 돌아가도 할 일 없고.”
“정령 없는 인간과 정령이 같이 사는 데라……”
하급 조제사 한 명이 약초 가루 묻은 손을 내밀며 앞으로 나왔다.
“해볼 만한데요.”
여기저기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때 입구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케인이었다. 마탑의 회색 로브 대신 짙은 청색 외투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푸른 문신이 선명하게 빛났다. 카이젤이 옆에 나란히 섰다. 절뚝거림은 사라져 있었다.
“마탑이 정리됐다. 시벨라의 뒤를 이을 후임은 선출 중이다. 강제 계약 기록은 모두 폐기했다.”
케인이 루안에게 다가왔다.
“네게 자리를 제안하려고 왔다.”
“거절한다.”
케인이 짧게 웃었다.
“거절할 줄 알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건넸다. 루안이 열자, 무영자 은거지의 지도와 마탑의 공식 인장이 찍힌 문서가 들어 있었다.
“은거지 일대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서류다. 마탑은 앞으로 이곳에 간섭하지 않는다. 정령과의 계약은 각자의 자유 의사로——”
「길다.」
카이젤의 으르렁거림에 케인이 한숨을 쉬었다.
“요컨대, 우리가 마탑을, 너희가 이곳을 맡는다. 서로 필요할 때 돕는 관계다.”
루안이 문서를 접어 품에 넣었다. 미르가 팔짱을 꼈다.
「인간치고는 꽤 낫군.」
「그대도 마찬가지다. 발키온.」
「……세리니아.」
두 정령이 서로의 진명을 한 번씩 부르고 시선을 거뒀다. 빛 입자가 공기 중에서 부딪히며 작은 불꽃을 만들었다.
케인이 돌아서며 말했다.
“한 달 뒤에 다시 오겠다. 그때까지 마을 좀 만들어둬라.”
그가 카이젤의 등을 짚자 전송 마법진이 발밑에서 푸르게 빛났다. 루안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보였다. 케인이 마지막으로 아린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린이 망치를 들어 화답했다. 마법진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푸른 섬광이 걷히자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루안은 은거지 입구를 돌아보았다. 무영자들이 손에 횃불, 연장, 빗자루를 쥐고 서 있었다. 아린이 망치로 땅을 한 번 두드렸다.
“자, 뭐부터 할까요, 선배.”
루안이 입구 바위를 가리켰다.
“이거 치우는 것부터.”
「치우는 건 저 덩치한테 시켜.」
미르가 아린을 턱짓했다.
“이름으로 불러라.”
“괜찮아요! 선배 정령이니까!”
아린이 이미 망치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무영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루안은 그 모습을 한순간 바라보다가 바위 쪽으로 걸어갔다. 미르가 옆에 붙어 따라왔다. 등 뒤의 날개 형상이 아침 햇살에 희미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