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예외의 온도

12화

그날 밤은 길었다.

서지오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휴대폰은 책상 위에 엎어두었다. 이재윤의 메시지가 아직 그 안에 있었다. 지워지지 않은 채.

한다윤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등을 기대지 않았다.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노트북 화면만이 그의 얼굴을 푸르스름하게 비췄다.

서지오가 돌아누웠다. 이불 스치는 소리가 작게 났다.

거실에서 한다윤의 손끝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일정한 간격이었다. 멈추지 않았다.

서지오는 눈을 감았다. 손목 안쪽 흉터가 욱신거렸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한다윤이 고개를 들었다.

“잠이 안 와요.”

서지오가 말했다.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었다. 한다윤이 노트북을 옆으로 밀며 자리를 만들었다. 그녀는 소파 끝에 앉았다. 무릎을 세워 팔로 감쌌다.

한다윤은 그녀에게서 30센티미터 거리를 두고 앉았다.

“내일 오후 3시.”

서지오가 입을 열었다.

“거기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밤새 생각했는데.”

한다윤이 그녀를 바라봤다.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서지오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을 쥐었다 놓았다. 흉터 위를 반복해서 문질렀다.

“대학 때 헤어질 때, 이재윤이 그랬어요. 너는 내가 알아야만 하는 시야, 라고.”

그녀의 손가락이 흉터 한가운데서 멈췄다.

“그 말이 오랫동안 날 따라다녔어요. 내 모든 문장과 숨이 결국 누군가의 감시 대상이어야만 하는 것처럼.”

한다윤의 눈빛이 움직였다. 그의 손이 무릎 위에서 살짝 움켜졌다.

“근데 오늘 밤에 깨달은 게 있어요.”

서지오가 한다윤을 향해 몸을 약간 틀었다.

“당신은 내 시야가 아닌 걸, 나와 함께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란 걸.”

한다윤의 호흡이 한 박자 느려졌다.

“내 시계를 기억하고 있었죠. 일부러 오늘 안 차고 왔어요. 그 시계.”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 체였다.

“네 손목에 있던 게 아니었으니까.”

서지오의 손가락이 흉터 위에서 완전히 멈췄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2년 전, 네 첫 시를 읽었을 때부터.”

한다윤이 말했다. 문장이 짧았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서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물을 한 잔 따랐다. 식탁에 손을 짚고 잠시 서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 떨어졌다.

한다윤은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서지오가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손에 든 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시계…… 이사할 때 잃어버렸어요. 네가 살던 동네 골목에서.”

한다윤이 시선을 내렸다.

“찾아서 갖고 있었어.”

“왜 돌려주지 않았죠.”

“돌려주면 그걸로 끝날까 봐.”

서지오의 손이 물잔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이상한 사람.”

그녀가 중얼거렸다. 한다윤의 입가에 아주 작은 웃음이 스쳤다. 처음이었다. 그날 밤 그가 웃은 것은.

“내일 내가 이재윤에게 할 말을 정했어요.”

서지오가 말했다.

“듣고 싶어요?”

한다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거기 있을 거니까. 내 뒤에.”

서지오가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목울대가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래서 나 혼자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 날, 오후 2시 52분.

출판사 옆 카페는 평소보다 한산했다. 평일 오후의 짧은 틈. 유리문을 열자 커피 향과 함께 차임벨이 울렸다.

서지오가 먼저 들어갔다. 한다윤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강민혁과 정시현은 길 건너편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시현의 가방에는 녹취 파일이, 강민혁의 태블릿에는 분류된 데이터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이재윤은 이미 와 있었다. 통유리창 옆 좌석. 그는 서지오를 보자 손을 살짝 들었다.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오랜만이야, 지오야.”

서지오는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한다윤은 그녀의 뒤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재윤과 시선이 마주쳤다. 인사는 없었다.

“네 시 말이야.”

이재윤이 말을 꺼냈다. 커피잔을 손가락으로 빙글 돌리며.

“계속 읽었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넌 여전히 글을 참…… 숨기면서 쓰더라.”

서지오의 손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떨리지 않았다.

“근데 말이야, 그걸 혼자만 알고 있긴 아깝잖아.”

이재윤이 미소를 깊게 했다.

“사람들이 네 시를 알면 좋아할 거야. 특히 출판사 사람들은 더.”

서지오가 눈을 들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이재윤의 얼굴에 정확히 멈췄다.

“그 얘기는 그만 할게요.”

목소리가 깔끔하게 떨어졌다. 완전한 존대였다.

이재윤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응?”

“그동안 제 시를 몰래 읽고, 캡처하고, 메시지로 보내고, 전화한 거요.”

서지오의 손가락이 하나씩 접혔다.

“이제 그만하시죠. 이재윤 씨.”

이재윤이 천천히 등을 의자에 기댔다. 미소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눈가가 좁아졌다.

“지오야, 내가 왜 이러는지 알잖아. 넌 원래부터 혼자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어. 내가 알아줘야 하는 사——”

“그게 바로 문제예요.”

서지오가 끊었다. 손목 안쪽 흉터가 따끔거렸다. 그러나 더 이상 뻐근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알아야만 하는 시가 아니에요.”

그녀의 손등에 핏줄이 살짝 올라왔다.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내 시야는 내 거예요. 내가 누구에게 보여줄지, 언제 말할지, 어떻게 살아갈지.”

이재윤의 입술이 열렸다.

“그걸 네 입으로 정한다고?”

“네.”

한 글자. 서지오의 대답이 카페 안에 가볍게 울렸다.

“이제 내 삶의 주인은 나예요. 당신이 내 세계를 정의할 자격은 없어요. 예전에도, 지금도.”

이재윤의 턱 근육이 긴장했다. 그가 커피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계정이랑 시가 전부 공개돼도?”

“공개하세요.”

서지오의 대답이 지연되지 않았다.

“그걸로 내가 무너질 거라 생각했다면…… 당신은 나를 한 번도 몰랐던 거예요.”

이재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한다윤이 그 옆으로 걸어왔다.

“이제 그만 하시죠.”

한다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애교는 전혀 없었다.

“당신이 가진 모든 협박 수단은 이미 무력화됐습니다.”

이재윤이 그를 노려봤다.

“뭐?”

“계정 공개요? 지금 이 순간부터 불가능합니다. 법적 증거가 필요한 모든 게시물은 데이터 보호 프로토콜로 묶여 있습니다. 당신이 유포하는 순간 IP 추적이 시작되고, 이미 대기 중인 법적 절차가 개시됩니다.”

한다윤이 태블릿을 들어 이재윤 앞에 놓았다. 강민혁이 건넨 분류 보고서였다. 화면에는 이재윤의 모먼트 계정 활동 로그, 서지오에게 보낸 메시지 발신 기록, 그리고 무단 캡처 파일의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변호사가 대기 중입니다.”

한다윤이 덧붙였다.

이재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에 닿지 않았다.

“이게 다…… 뭐야.”

“당신이 서지오에게 한 모든 일의 기록입니다.”

이재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가, 그리고 무력감이 동시에 올라왔다. 입술이 달싹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출판사와 모멘토에 알리겠다는 것도 의미 없습니다. 이미 양측 모두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고, 당신의 연락을 차단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한다윤이 태블릿을 접었다.

“이제 그만 가시죠. 그리고 다시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마십시오.”

이재윤이 천천히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그의 손이 테이블 가장자리를 짚었다.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서지오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느리게 기울고 있었다.

이재윤이 돌아섰다. 발걸음이 한 번 멈칫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카페 문이 열리고, 차임벨이 다시 울렸다. 길 건너편 벤치에서 정시현이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강민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을 가방에 넣었다.

이재윤의 뒷모습이 골목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지오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다윤이 그녀의 앞자리로 와서 앉았다. 말없이 커피잔을 정리했다. 이재윤이 남긴 잔에는 커피가 식어 있었다.

서지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손목 안쪽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한다윤이 그녀의 손을 보았다. 닿지는 않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끝났어.”

서지오가 그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날,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당신 덕분이에요.”

“아니.”

한다윤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한 거야. 전부.”

서지오가 가방을 열었다. 손을 넣어 작은 카드 한 장을 꺼냈다. 흰색 종이에 검은 펜으로 쓰인 시였다. 제목은 없었다. 첫 줄만 보였다.

‘나는 이제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억되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녀가 카드를 한다윤의 손에 올려놓았다.

“내 이름으로 쓴 첫 시예요.”

한다윤이 카드를 받아들었다. 그의 시선이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라갔다. 읽는 속도가 느렸다. 마지막 줄에 다다랐을 때, 그의 손가락이 종이 가장자리를 살짝 눌렀다.

“네 모든 순간을 내가 지켜보고 있었어.”

한다윤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애교도, 농담도, 장난기도 전혀 없었다. ‘다’ 체로 맺는, 차분한 단문들.

“이제는 네 곁에서 함께 읽게 해줘.”

서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한다윤의 손등 위로 올라갔다. 아주 가볍게. 스치듯이.

한다윤이 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가락을 감쌌다. 온기가 천천히 손바닥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가 고개를 숙여 카드를 다시 한 번 읽었다. 서지오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카페 안은 고요했다. 커피 머신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창밖 거리에는 오후 3시 반의 햇살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한참 뒤, 한다윤이 카드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났다. 서지오가 가방을 챙기고, 한다윤이 계산대 쪽을 가리켰다.

“출판사까지 걸어갈까. 같이.”

“좋아요.”

카페를 나서는 그녀의 가방 안에는 시 카드의 사본이 한 장 더 들어 있었다.

자신의 실명으로 완성한 첫 시 원고.

이제 출판사로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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