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라이넨의 느린 여관

15화

린이 뒷마당에서 허브 화분을 살피다가 유하람에게 “정말 여기 살아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유하람이 “이미 살고 있잖아”라며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자, 린의 어깨에서 힘이 쑥 빠졌다.

린의 팔이 천천히 올라와 유하람의 등을 감쌌다. 처음엔 살짝, 이내 조금 더 힘을 주어. 로즈메리와 레몬밤, 흙냄새가 두 사람을 감쌌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린이 먼저 팔을 풀고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둘은 손을 잡고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 후, 유하람과 린은 베른의 대장간으로 감사 인사를 갔다. 대장간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이어졌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어깨가 좁고 먼지 낀 가방을 멘 스무 살쯤의 젊은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구겨진 종이를 손에 쥔 채 베른에게 허리를 굽혔다.

“서부 길드에서 왔습니다. 대장간 도제 자리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베른은 한참 말없이 젊은이의 손과 어깨, 가방을 차례로 훑었다. 젊은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 달.”

“네?”

“한 달 시험. 견디면 받는다.”

젊은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종이를 재빨리 가방에 넣으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베른이 고개를 돌려 유하람과 린을 보더니, 바구니와 포장지를 확인하고 눈썹을 한 번 까딱했다. 유하람이 말린 과일을 내밀자 베른은 작업대 옆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린이 바구니를 작업대 위에 올리며 “도제가 생겼네” 하고 말했다. 베른의 입가가 아주 살짝 움직였다. 미소라고 부르기엔 희미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젊은이는 이미 가방을 내리고 풀무 옆 석탄 통을 점검하고 있었다. 유하람은 작업대에 과일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여기도 이제 두 명이네.”

베른이 고개를 까딱했다. 대장간 안의 쇠를 달구는 불이 평소보다 조금 더 밝았다. 굴뚝에서 바람에 실린 불티 몇 개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대장간을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머리 위였다. 베른은 견습생에게 풀무질을 가르치느라 인사도 짧았다. 린이 내 옆에서 손을 털었다.

“쇳가루. 옷에 묻었어.”

“대장간에서 그 정도면 양호한 거지.”

광장 쪽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기도 전에 릴라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유하람 씨! 린 언니!”

릴라가 종이 한 장을 흔들며 달려왔다. 바구니가 등에서 덜컹거렸다. 숨을 몰아쉬며 종이를 내 얼굴 앞까지 들이밀었다.

“봐요, 봐요! 약국 개업 허가서예요!”

종이 위에는 마을 회의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린이 고개를 기울여 한 번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네! 마르타 의원님이 오늘 아침에 직접 전해주셨어요! 이제 진짜 약국이 생기는 거예요!”

릴라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바구니에서 마른 캐모마일 향이 풍겼다. 나는 종이를 돌려줬다.

“축하해. 진작 될 자격 있었잖아.”

“에헤헤…… 아, 맞다!”

릴라는 바구니를 앞으로 돌려 작은 천 주머니를 꺼냈다. 손바닥 두 배 크기였다. 내 손에 쥐여주며 말을 쏟아냈다.

“여관에 비치할 약초 세트예요. 캐모마일, 레몬밤, 페퍼민트 기본에 소화용 블렌드도 조금 넣었어요. 지난번 일 때문에 여관 손님들 불안할까 봐…… 앞으로도 계속 공급할게요! 가격은 그대로고!”

“고마워. 잘 쓸게.”

주머니를 받자 린이 내 손에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블렌딩 비율이 좋아졌어.”

“알아봐 주시다니 역시 린 언니!”

릴라가 다시 빙글 돌았다. 이번에는 제자리를 떠날 채비였다.

“약국 정리하러 가야 해요! 개업 첫날에 늦을 순 없으니까!”

뛰어가다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다.

“저녁에 차 마시러 들를게요!”

광장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등에 바구니가 통통 튀었다. 린이 주머니를 내게 도로 건넸다.

“얘, 정말 약초가 천직이야.”

“그러게.”

광장을 지나 여관으로 돌아가려는데, 발이 멈췄다. 린이 내 시선을 따라갔다.

“……묘지 쪽.”

“잠깐 다녀올게. 혼자.”

린이 잠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주머니를 받아 들고 먼저 여관 쪽으로 걸어갔다.

마을 공동묘지는 광장에서 남쪽 샛길로 십 분쯤 걸어 들어간 곳에 있었다. 낮은 돌담이 둘러져 있고, 안에는 오래된 묘비들이 성글게 흩어져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무성한 풀잎 사이로 길게 늘어졌다.

들어서자마자 마르타 의원이 보였다.

하얀 머리가 바람에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한 묘비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손에는 작은 들꽃 한 묶음. 내 발소리에 어깨가 살짝 움직였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유하람 씨.”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함께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옆에 서니 묘비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십 년의 풍화에도 정성껏 손질된 돌이었다. ‘라이넨을 사랑한 이, 여기에 잠들다’라는 글귀만 또렷했다.

마르타가 천천히 묘비 앞에 무릎을 굽혔다. 들꽃을 돌 앞에 내려놓고, 손끝으로 비문을 한 번 쓸었다.

“오늘 아침…… 의원 배지를 만지다가 깨달았습니다. 죄책감이 아니라 습관으로 만지는 제 자신을요. 처음이었어요.”

바람이 풀잎을 흔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끝이 약간 떨렸다.

“당신이 물려준 여관은 이제 마을의 공식 숙소예요. 당신이 꿈꾸던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두 젊은이가 지키고 있어요.”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눌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묘비 앞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르타가 내 쪽으로 돌아섰다. 눈가는 붉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있었다.

“보세요. 이제 여관은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타 의원님 덕분입니다.”

“아니에요. 당신과 린 양이 만들어낸 거예요.”

그녀가 옷깃을 여몄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오늘은 빵을 좀 더 구워야 해서요. 저녁에 여관에 들르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마르타가 묘지를 나서는 뒷모습은 등이 곧았다. 배지를 만지는 손동작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가벼웠다. 여관 문을 열자 로비에 은은한 허브 향이 퍼져 있었다. 린이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나를 돌아봤다.

“차 마실래?”

“목말랐어.”

린이 찻잔 두 개를 탁자에 올렸다. 김이 오르는 연한 황금빛 차. 마주 앉아 찻잔을 집어 들었다. 첫 모금을 넘기자 어깨가 풀렸다.

“릴라는?”

“아직이야. 해 질 무렵쯤 올 거야.”

린이 내 표정을 한 번 살피고는 시선을 찻잔으로 내렸다. 캐모마일과 레몬밤이 섞인 익숙한 향이 로비에 가득 찼다. 두 번째 잔을 따랐다. 통유리창 밖으로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발걸음 소리가 문밖에서 멈췄다. 나는 린과 눈을 마주쳤다.

“릴라?”

린이 고개를 저었다. 발소리는 한 사람분. 무거운 가죽 신발이 흙바닥을 디디는 소리.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간 너머, 여관 1층 로비 입구에 낯선 여행자 크레스가 서 있었다. 어깨에 여행용 배낭을 메고, 진한 갈색 코트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얼굴은 반쯤 노을에 가려져 있었지만 표정은 피곤해 보이면서도 온화했다. 크레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빈 방이 있나요?”

라이넨의 느린 여관1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