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서점
5화
재개발 조합 직원이 떠난 뒤에도 이여름은 한동안 바닥에 흩어진 전단지를 줍지 못했다.
철거 확정.
그 말이 귀에 맴돌았다. 서진우가 보고서에 이상한 소리를 적고 있다는 말도.
이여름은 천천히 허리를 굽혀 전단지 한 장을 집었다. 30년간 이 거리에 책을 두었습니다. 그 문장이 손끝에서 낯설게 느껴졌다.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진우의 번호를 찾았다.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멈췄다.
뭐라고 물을 건데.
보고서에 뭘 적었냐고? 철거 확정이라던데 당신은 뭐 하는 거냐고?
이여름은 전화기를 테이블 위에 엎어 놓았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오전 10시, 안전 진단 업체 임시 사무실.
서진우는 김 부장의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안전 진단 보고서 초안과 보존 대안 데이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김 부장이 보고서 초안을 한 장 넘겼다.
“서 대리, 이게 뭡니까.”
“서점의 문화적 가치에 관한 보완 자료입니다.”
“그걸 왜 안전 진단 보고서에 넣습니까.”
서진우의 손이 옆구리에서 살짝 움직였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딱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건축물 안전 진단 기준에 문화적 가치는 포함되지 않는 건 압니다.”
“알면서?”
“하지만 해당 건물은 1985년 이 거리 최초의 문화 공간이었고, 30년 이상 지역 주민의 독서 모임과 어린이 무료 교실을 운영해 왔습니다. 이 수치들은——”
“서 대리.”
김 부장이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우리 일은 숫자로 말하는 겁니다. 외벽 균열 4mm, 실리콘 노후화, 습도 기준치 초과. D등급 이하. 그게 전부예요.”
“숫자만으로 못 적는 것도 있습니다.”
김 부장이 보고서를 덮었다.
“조합과 이미 약속한 마감이 오늘 오후 두 시입니다. 지금 이 자료를 넣으면 결론이 바뀝니까. 바뀔 근거가 있습니까.”
두 사람 사이로 복사기 소리만 흘렀다.
서진우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철거 권고 자체를 뒤집을 근거는 아닙니다.”
“그럼 왜.”
“시간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김 부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서진우가 태블릿을 켜서 책상 위에 놓았다. 화면에는 건축법 시행령 일부 조항이 떠 있었다.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는 건축물은 안전 진단 결과와 별개로 보존 대안 검토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재개발 조합과 구청 양측에 동시 제출하면 최소 2주, 길면 한 달의 검토 기간이 확보됩니다.”
김 부장이 태블릿을 바라봤다. 입가가 굳어졌다.
“그게 당신한테 무슨 상관인데.”
서진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김 부장은 한숨을 쉬었다.
“공식 보고서는 예정대로 제출합니다. 철거 권고로.”
“네.”
“당신이 따로 내는 건 개인 소견입니다. 회사 이름은 뺍니다.”
“알고 있습니다.”
김 부장이 보고서 초안을 서진우 쪽으로 밀었다.
“본사에 보고하겠습니다. 이 경력 리스크, 돌이킬 수 없어요.”
서진우가 보고서를 집었다. 한 번 가볍게 목례하고 돌아섰다.
문을 나서기 직전, 김 부장이 낮게 말했다.
“그 서점, 당신한테 뭡니까.”
서진우는 발을 멈췄다. 세 초쯤 침묵이 흘렀다.
“비 오는 날에도 책이 젖지 않는 곳입니다.”
문이 닫혔다.
오전 11시, 종이비 서점 1층.
테이블 위에 서명 용지가 펼쳐진 채였다. 이여름과 고은숙, 윤지혜가 각자 한쪽에 앉아 분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구청 제출용 서류 봉투 세 개가 테이블 구석에 쌓여 있었다.
고은숙이 서명 용지를 한 장씩 넘기며 숫자를 세었다. 손놀림이 정갈했다.
“빵집 이 사장님은 가족 이름까지 다 적으셨네. 네 명.”
윤지혜가 옆에서 봉투에 라벨을 붙이며 말했다.
“약국 김 약사님은 약 봉투 뒷면에 서명하셨어. 이거 원본으로 내도 되는 거지?”
이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북 화면을 보며 기록물 목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역 신문 기사 사본 세 건, 단골손님 편지 여덟 통, 1997년 어린이 독서교실 사진 두 장.
목록이 길어질수록 손이 느려졌다. 이 모든 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서류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고은숙이 서명 용지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름아.”
“네.”
“예전에, 그러니까 진우 어머니……”
이여름의 손이 멈췄다.
“병환으로 급히 이사하셨다는 소문 있었거든. 그때 진우가 고등학교 삼학년이었는데,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고은숙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사이에 가족들이 여길 뜬 거야. 진우는 혼자 상경 준비하느라 학교도 며칠 쉬었고.”
이여름의 시선이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다. 기록물 목록 마지막 줄에서 커서가 깜빡였다.
열아홉 겨울. 진우가 떠나던 날을 기다리던 밤. 연락 한 통 없던 사흘. 그리고 버림받았다고 믿었던 십 년.
이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지난 일이야.”
목소리가 지나치게 평온했다. 고은숙이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멈췄다. 윤지혜가 라벨을 붙이던 손을 내려놓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이여름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서류 다 됐어. 점심 먹고 구청 간다.”
오후 1시, 재개발 조합 사무실.
서진우는 박중섭의 책상 앞에 서류 봉투를 내려놓았다. 박중섭은 땀에 젖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봉투를 집었다.
“이게 뭡니까, 서 대리님.”
“종이비 서점 보존 대안 보고서입니다. 본사 공식 채널로도 이미 제출했고, 조합 측에도 사본을 전달드립니다.”
박중섭이 봉투를 열어 속지를 꺼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첫 장을 훑었다. 두 번째 장까지 넘기고 나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측정 수치로만 보면 철거가 맞는데, 이걸 보니 딱 잘라 말하기가…… 참.”
“이사회 안건으로 올려주실 수 있습니까.”
박중섭이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서 대리님이 원하시는 게 뭡니까.”
“시간입니다. 검토 기간 최소 2주.”
“어렵지요. 조합은 이미 철거 쪽으로 기울었어요.”
서진우가 서류 봉투를 살짝 밀어 책상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그 기간 동안 구청에 문화재 등록 가치 검토를 신청할 겁니다. 이미 주민들이 서명 운동을 시작했고요.”
박중섭의 눈이 약간 커졌다.
“벌써요? 누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수건을 다시 꺼내 이마를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시라요. 이사회 안건으로 올려볼 테니까.”
서진우가 허리를 숙였다. 박중섭이 손을 내저었다.
“고맙다는 말은 이르요. 이게 통과될지는 나도 장담 못 하니까.”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박중섭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 서점, 여름이…… 이선희 할머니 손녀 말이오. 어제 내가 철거 권고 통보한다고 전화했을 때,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데요. 완전히 무너진 거.”
서진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중섭이 덧붙였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전화 왔었어요. 구청에 낼 서류가 뭐가 필요하냐고 묻데요. 무너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그런 사람이야.”
서진우가 문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압니다.”
짧은 목례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오후 3시, 구청 도시재생과.
접수 창구 앞에 이여름과 고은숙이 서 있었다. 담당 공무원이 서류 봉투를 하나씩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서명 용지 묶음을 넘기며 숫자를 세고, 신문 기사 사본을 훑고, 손님 편지를 한 통씩 펼쳐 봤다.
“서명 인원이 287명이네요. 이 정도면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공무원이 컴퓨터 화면에 무언가 입력하며 말을 이었다.
“다만 재개발 절차 자체를 중단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조합이 철거 권고를 수용하면 구청이 막을 권한은 없어요.”
이여름의 손가락이 접수증 모서리를 꼭 집었다.
“그럼 아무 소용이……”
“문화재 등록 가치 검토 신청은 가능합니다.”
공무원이 서류 봉투를 한쪽으로 모으며 말했다.
“제출하신 기록물이 꽤 구체적이어서요. 1985년 개업, 지역 최초 문화 공간, 30년 운영. 이 세 가지는 검토 요건에 부합합니다.”
“얼마나 걸리나요.”
“보통 2주. 길면 한 달입니다.”
이여름이 고은숙을 돌아봤다. 고은숙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무원이 접수증을 출력해 건넸다.
“공식 접수 완료됐습니다. 자료는 보관하고, 검토 일정이 나오면 연락드릴게요.”
이여름이 접수증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두 사람이 구청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빗방울이 몇 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전에 잠시 소강됐던 비가 다시 올 기미였다.
고은숙이 우산을 펴며 말했다.
“서명 더 받을까? 일주일만 더 돌면 오백은 넘을 텐데.”
“필요하면 다시 돌자. 일단은……”
이여름의 목소리가 작게 가라앉았다.
“십 년 동안 원망만 했던 게, 부끄럽다.”
고은숙이 걸음을 멈추고 이여름을 돌아봤다. 이여름은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다.
“원망하는 건 당연했어.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잖아.”
“그래도.”
빗방울이 굵어졌다. 이여름이 손등으로 이마에 닿은 물기를 닦았다.
“진우가 왜 연락 안 됐는지, 왜 떠났는지, 나는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어. 그냥 나만 버려졌다고.”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게 제일 쉬웠으니까.”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올라타지 않았다. 서점까지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우산 속에서 고은숙이 이여름의 팔짱을 살짝 꼈다. 이여름은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서점으로 돌아왔을 때 비는 그쳐 있었다.
고은숙이 1층 카운터에 우산을 말리며 말했다.
“나는 차라도 한잔 끓일 테니까, 너는 좀 앉아 있어.”
이여름은 대답 없이 계단을 올랐다.
2층은 조용했다. 양동이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세 방울 떨어지고 정적. 또 세 방울.
구석 책장 앞에 섰다. 1987년판 김춘수 시집이 꽂혀 있었다. 손을 뻗어 책등을 살짝 만졌다. 꺼내지 않았다.
창가로 걸어갔다. 흐린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서쪽 방향으로 옅은 빛이 조금 비쳐들고 있었다.
눈물이 한 방울 뺨을 타고 흘렀다. 손등으로 닦았다. 또 한 방울.
열아홉 겨울, 편지를 쓰고 기다리던 밤.
진우가 문 앞에 서서 들어오지 못했다는 밤.
아팠을 거고. 무서웠을 거고. 아무한테도 말 못 했을 거다.
이여름은 창턱에 이마를 기댔다. 어깨가 떨렸다. 소리는 없었다.
몇 분쯤 지났을까. 1층에서 고은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름아, 차 식어!”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숨을 두 번 들이쉬었다. 거울을 보지 않고 손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내려갈게.”
늦은 오후, 비가 완전히 그친 거리.
이여름은 서점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고은숙이 먼저 가게로 돌아간 뒤였다. 바람이 약간 서늘했다. 젖은 아스팔트에서 비 냄새가 올라왔다.
발소리가 멀리서 다가왔다. 익숙한 구두 소리. 이여름이 고개를 들었다.
서진우였다. 서류 가방을 든 채 길 건너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여름을 발견하자 걸음이 살짝 느려졌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여름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나왔다.
“조합 사람이 오늘 아침 왔었어요. 철거 확정이라고.”
서진우가 벤치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보고서 제출됐습니다. 공식 결론은 철거 권고.”
“근데.”
이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보고서에 이상한 소리가 있다던데.”
서진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여름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뭐 적었냐고요. 그 이상한 소리라는 게.”
“보존 대안 보고서입니다.”
“……”
“건물의 문화적 가치를 근거로 검토 기간을 요청했습니다. 구청과 조합 양쪽에.”
이여름의 손이 허벅지 옆에서 살짝 떨렸다.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게…… 통합니까.”
“모릅니다. 최소 2주 검토 기간을 확보했지만, 결과는 장담 못 합니다.”
이여름이 다시 벤치에 앉았다. 서진우는 여전히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옅은 햇살이 하나 내려앉았다. 서쪽 하늘에 장마가 잠시 물러난 자리였다.
침묵이 길어졌다.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진우였다.
“그날 밤.”
이여름의 숨이 살짝 멎었다.
“서점 문 앞까지 갔습니다. 들어가려고 했고요.”
서진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근데 문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여름이 벤치에 놓인 손을 꼭 쥐었다.
“그 말. 지금 왜 하는 거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이여름 스스로도 놀랄 만큼.
“십 년 동안 아무 말 없었다가. 이제 와서 왜.”
서진우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벤치 옆에 섰다. 앉지는 않고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사실은 그동안 당신——”
말을 멈췄다. 주머니 속 손이 움직였다.
몇 초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존댓말이 아니었다.
“내가 너를 부르지 못해서, 그동안 몸짓으로만 남아 있던 게 나였다.”
이여름이 움찔했다.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의 손이 더 세게 쥐어졌다.
그 말은 편지 속 어떤 문장을 닮아 있었다. 시집 속 어떤 구절의 반대편 같은 말. 여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답하지도 않았다.
다만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서진우가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서점이…… 비를 막아주는 곳이길 바란다.”
서진우가 뒤돌아섰다. 구두 소리가 서너 걸음 멀어졌다.
이여름은 벤치에 앉은 채 고개를 들었다. 진우의 뒷모습이 거리 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서쪽 하늘 옅은 살빛에 등이 길게 드리워졌다.
눈가가 붉어졌다. 깨물지 않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손등을 눈가로 가져가려다 멈췄다.
참아냈다.
서점 앞 거리에는 젖은 아스팔트와 가로등과 책 냄새가 흘러나오는 낡은 문이 있었다.
그 문 위로 '종이비' 간판이 전등을 켜기 전의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구름 사이로 실낱 같은 햇살이 한 번 더 비쳐들다 곧 희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