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에 핀 독
5화
적산 폐사 지하 독실은 썩은 약초 냄새로 가득했다. 강휘는 무너진 제단 앞에 서서 손톱 밑이 검게 변색되는 것을 확인했다. 전생보다 빠른 독의 확산 속도에 눈을 가늘게 뜨고 소매 안 사혈독침을 꺼내 피 한 방울로 독액을 확인했다. 부식성 독기였다.
“역시 왔군요, 사제.”
장한걸이 청성파 도포 차림으로 걸어나왔다. 뒤로 석중원이 흑색 망토에 얼굴 반을 가린 채 따랐다. 장한걸이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어째서 사형이 여기에 있는지 묻지 않으시는군요.”
“궁금하지 않아.”
강휘의 담담한 대답에 장한걸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 독은 내공을 갉아먹습니다. 반 시진이면 검을 쥘 힘도 없을 거예요.”
장한걸이 걸음을 멈췄다. 여섯 걸음 거리였다. “석가 협객, 우리 사제의 마지막 모습을 가까이서 보시지요.”
석중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망토 자락에서 화상 흉터가 드러났지만 손은 단검으로 향하지 않았다.
“네가 파문당한 진짜 이유를 알고 있나, 강휘.” 장한걸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청성파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어. 더 큰 흐름이 있었지. 정파와 사파의 경계 너머에...”
그 순간, 석중원의 단검이 번득였다. 장한걸의 왼쪽 어깨가 열린 틈으로 정확히 파고들었다. 장한걸이 몸을 비틀었지만 검이 어깨를 스치며 피를 냈고, 오른쪽 어깨 칼집 끈이 끊어져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게...” 장한걸이 뒤로 물러서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석중원은 단검을 재정비하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지막 기회다.”
망토가 흘러내리며 왼쪽 쇄골이 드러났다. 푸른 등불 아래 청회색 문신이 선명하게 빛났다. 세 개의 뱀이 꼬인 형상. 독문의 추적자였다.
“네가... 네가 감히 나를...” 장한걸이 상처를 감싸며 물러났다.
강휘는 왼손을 들어 손등을 보였다. 손톱 밑 변색이 손목까지 오지 않았다. 전생의 지식으로 독기 흡입을 의도적으로 제한한 결과였다.
“장한걸.” 강휘가 사형의 이름을 불렀다. 검날이 느릿하게 왼쪽 옆구리를 가리켰다. “좌측이 비었다.”
장한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군가 가르쳐줬을 리 없는 약점을 강휘가 정확히 짚었다. 석중원이 파고든 왼쪽 어깨 허점에 오른쪽 어깨 부상까지 겹쳐 검을 쥘 수 없는 형국이었다. 그가 왼손을 품 속으로 넣으며 물러섰다.
“내가 질 것 같습니까, 사제. 독문의 수장께서 직접 내려주신 물건입니다.”
장한걸의 손이 품에서 무언가 꺼내는 순간, 석중원이 다시 움직였다. 단검의 평면이 정확히 손목을 쳐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작은 옥병이 바닥으로 굴렀다. 석중원이 발로 밟아 멈춰 세웠다. 장한걸이 무릎을 꿇었다.
“죽이지 않겠다.” 석중원이 옥병을 강휘 쪽으로 굴리며 말했다. “해독약이다.”
강휘가 처음으로 석중원과 시선을 마주했다. “왜 지금.”
석중원이 왼쪽 쇄골의 문신을 짚었다. “독문에 속아서. 오래전에.”
장한걸이 고개를 들었다. “석중원, 네놈은 독문의 개다!”
석중원은 듣지 않았다. “청성파 파문은 독문이 설계했다. 네 사형이 혼자 꾸민 일이 아니야. 독문은 정파 내부를 잠식하고 있다. 청성파에만 열둘, 구파일방 전역에 수십 명의 첩자가 퍼져 있어.”
“네 임무는.”
“추적자다. 배신자를 제거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이 문신은 독문, 추적, 처단을 뜻한다.”
“그런 네가 독문을 배신한 이유.”
석중원의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무언가 스쳤다. 이내 사라졌다. “전생에 우리는 만난 적 있나.”
확신에 가까운 어조였다. 강휘는 숨을 내쉬고 옥병을 집어 들었지만 마시지 않았다. “없다.”
“네 행동은 설명이 안 돼. 파문당한 지 하루 만에 내가 장한걸의 첩자인 걸 간파했고, 이 함정도 사전에 파악했으며, 장한걸의 왼쪽 약점도 알았다. 청성파 제자 수준이 아니야.”
강휘는 대답 대신 옥병의 약을 냄새만 맡았다. “네가 독문 추적자라면, 나를 감시한 이유도 설명되겠군.”
“처음에는 감시. 나중에는 제거.” 석중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한걸이 고용했다. 독문의 명령과는 별개로.”
장한걸이 바닥에서 신음했다.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죽이지 마라. 아직 쓸모 있다. 독문 수장의 정체를 아는 몇 안 되는 자다.”
강휘는 피를 흘리는 장한걸을 내려다봤다. 전생의 파문 장면이 스쳤다. 사혈독침 다섯 개를 꺼내던 손. “살려두겠다. 하지만 정보는 지금 받아내야 해.”
석중원이 장한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독문 수장. 누구지.”
장한걸이 피 섞인 침을 흘리며 말했다. “몰라도 돼요.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독문은 이미 네놈들의 뒤통수를...”
석중원이 옷깃을 놓고 강휘를 향했다. “독문 수장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청성파 내부 고위층과 연결된 자가 있다. 추적자 신분은 일반 첩자가 접근할 수 없는 정보를 열람할 권한이 있다. 장한걸이 그걸 몰랐던 게 유일한 우위였다.”
강휘는 해독약을 한 모금 삼켰다. 손끝 마비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너를 믿을 이유는 아직 없다. 하지만 써먹을 순 있겠군.”
석중원의 눈이 좁아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휘는 폐사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처를 지혈해라. 죽기 전까지는 살려두겠다.”
계단을 향해 멈춰 서서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네 문신. 그게 전부냐.”
석중원이 장한걸의 어깨에 압박을 가하며 대답했다. “아니. 더 있다.
독문의 내부 구조도, 비밀 거점도. 그리고 한 가지 더. 독문이 노리는 건 청성파가 아니다.
구파일방 전체의 재편이다. 네 파문은 그 시작일 뿐이었다.“
강휘의 등이 잠시 굳었다. 전생에서 보지 못한 그림이 희미하게 연결됐다. 자신의 파문이 단순한 사형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죽음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 뒤에 석중원이 독문에 의해 제거당했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추적자가 배신했기 때문이다.
강휘는 계단을 오르며 한 마디를 던졌다. “석중원. 앞으로 네가 아는 모든 정보를 내놔라.”
“이미 그럴 생각이었다.”
폐허가 된 본당으로 들어서자 적산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밀려들었다. 손톱 밑 검은 흔적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강휘의 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배후가 명확해졌다. 적도, 아군도. 전생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전쟁의 윤곽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동굴 안은 약초 찐내와 핏내가 뒤섞였다. 등잔불이 강휘의 검푸른 입술과 자주색으로 부풀어 오른 왼손 핏줄을 비추었다. 고월의 해독환으로 버텨왔으나 한계였다.
“누웠다.”
석중원의 말에 강휘는 대꾸 없이 거친 돌바닥에 숨을 골랐다. 시야가 흐려졌다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짚신 소리. 회색 도포에 흰머리를 땋은 노인이 의약함을 들고 들어섰다. 자오였다. 전생에서 강휘를 살렸던 인물. 강휘는 표정 없이 그를 바라봤다.
자오가 손목을 집자 눈썹이 올라갔다.
“독이 두 가지야. 하나는 맹독, 다른 하나는 지속성 쇠약독. 누가 이런 걸 아낌없이 퍼부었냐.”
혼잣말이었다. 강휘가 답하지 않자 자오는 손등 혈관을 누르고 눈꺼풀을 뒤집었다. 동작에 망설임이 없었다. 석중원은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섰다.
“침 놓는다.”
침포가 펼쳐지고 바늘이 반짝였다. 강휘의 팔뚝 안쪽으로 검은 실핏줄이 독이 팔꿈치 아래까지 올라와 있었다. 첫 침이 팔뚝 중앙에 박혔다. 손목, 손등, 어깨 관절 부근으로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했지만 신음은 새지 않았다.
“오래 참았구나.”
바늘 하나가 더 꽂히자 검은 핏물이 손등에서 스며 나왔다.
“낯익다, 이 독.”
자오가 멈칫했다. 스민 핏물을 코에 대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전에 본 적이 있어. 아주 오래전에.”
강휘는 천장을 바라봤다.
“꽤 내성이 있군.” 자오의 시선이 옮겨갔다. “이런 독에 노출된 적이 있다는 건데. 자네, 독문 쪽이랑 얽힌 적 있나.”
“모른다.”
자오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고개를 저었다. 사기 약병의 내용물을 강휘 입에 털어 넣자 쓴맛이 퍼졌다. 전생과 똑같은 맛이었다.
“한 시진 안에 열이 내린다. 오늘 밤까진 누워 있고.”
자오는 손등에서 흐른 핏물을 유리병에 밀봉했다. 강휘는 못 본 척했다.
석중원이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다. 자오가 손을 쬐며 말했다.
“이제 설명 들어도 되겠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강휘가 상체를 일으켰다. 손끝의 저린 감각이 걷히고 있었다.
“장한걸. 청성파 사형. 지금 폐사에 함정을 깔아뒀다.”
“그만하면 됐네. 내가 아는 그 장한걸 맞군.”
“알아?”
“오래전에 잠깐.” 자오는 불을 바라봤다. “독문 쪽 물건을 구하려고 나를 찾아온 적이 있지. 청성파 장로 명의로 왔는데, 거짓이었을 거야.”
석중원의 손이 멈추고 나뭇가지가 불에 떨어져 튀었다.
“독문.”
강휘가 낮게 되뇌자 자오가 고개를 들었다.
“장한걸에게 독을 공급한 곳이 분명해. 사혈독침도 거기서 나왔고.”
“사혈독침?” 자오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거라면 확실하군. 독문 내에서도 극소수만 다룬다.”
“규모는.”
“잘 모르는 눈치네. 독문은 하나의 문파가 아니야. 수장 밑으로 몇 개의 파가 갈려 있고, 각 파마다 주력으로 쓰는 독이 달라. 장한걸이 받은 물건들은 아마 은밀하게 빼돌린 것들일 거다.”
석중원이 소매에서 접힌 문서를 꺼냈다.
“여기 지령이 있다. 청성파 장문인 암살. 시기는 추후 통보.”
강휘는 문서를 받아 읽으며 전생의 기억을 눌렀다.
“독문이 장문인을 노리는 이유가 있다. 청성파가 구파일방의 맹주를 맡으면 거래 경로가 막힌다. 장한걸은 그걸 빌미로 협력하고 있고.”
“자네, 어떻게 그런 걸...” 자오가 말을 걸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네. 묻지 않지.”
“두 마리 토끼다.”
강휘가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덜 돌아왔지만 설 수는 있었다.
“장문인 암살 계획을 청성파에 흘린다. 동시에 장한걸이 독문과 결탁했다는 증거를 퍼뜨린다. 장문인은 경계를 강화할 테고, 장한걸은 두 쪽에서 압박받는다.”
“독문은.” 석중원이 물었다.
“장한걸을 버릴 거다. 쓸모를 잃은 거래처는 위험 부담일 뿐.”
자오가 킥킥 웃었다.
“재밌군. 한 놈은 정보로 찔러대고, 한 놈은 침묵으로 받아치고. 궁합 한번 기막히네.”
석중원이 동굴 입구 쪽으로 가다 멈췄다. 등을 보인 채 몸을 반쯤 돌렸다.
“내 과거에 대해...”
“말하지 마.”
강휘가 잘랐다. 석중원의 어깨가 미세하게 긴장했다.
“묻지 않는다. 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상관없다. 네 선택이 이제부터 중요할 뿐.”
석중원은 말이 없었다. 화상 흉터 난 오른손이 소매 안에서 움직였다. 정적이 무거웠다.
“이런 꼴은 처음 보네. 한 놈은 묻지 않고 한 놈은 말하지 않고. 그런데도 통하는 게 신기하군.”
자오의 혼잣말에 석중원이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등잔불이 흔들리며 그의 눈매를 스치고 지나갔다.
“간다. 폐사 주변을 정찰한다.”
석중원이 망토를 여미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어둠 속으로 잦아들었다.
자오가 의약함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저 친구, 화상 흉터만큼이나 깊은 게 있군, 속에.”
강휘는 입구로 걸어가 바깥을 내다봤다. 동녘이 옅은 회색으로 밝아오고 있었다. 먼 산등성이 너머 청성파 산봉우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기다려라, 사형.”
나지막한 목소리가 동굴 안에 똑똑히 들렸다.
“네 덫이 곧 네 무덤이 될 것이다.”
뒤에서 의약함 닫는 소리가 났다. 자오는 혈액 샘플이 든 유리병을 베주머니에 감싸 의약함 구석에 밀어 넣었다.
강휘는 손끝의 저림이 마지막 남은 독을 밀어내는 것을 느끼며 청성파를 바라보았다. 석중원의 발걸음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