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두 번 피다
5화
서문경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왼쪽 어깨 붕대가 팽팽해졌다. 탁자 위의 자필 증언서를 접어 가슴께에 넣었다.
“먼저 화소월이다.”
옥기린이 고개를 돌렸다.
“네 몸 상태로 흑시루에 들어가겠다는 거냐.”
“철호가 배수구 쪽 시선을 뺄 동안이 유일한 기회다.”
서문경은 검집을 허리에 찼다. 만독지환 병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여기 두고 간다. 혹시 내가 못 돌아오면.”
옥기린이 병을 서랍에 넣었다.
“돌아와야 할 이유를 하나 더 만든 셈이군.”
흑시루 외곽 담장은 빗물 자국이 세로로 번져 있었다. 서문경은 서쪽 담장 아래 웅크렸다. 배수구 쇠창살은 철호가 약속한 대로 세 개의 볼트가 풀려 있었다.
지하 통로로 내려서자 곰팡이 섞인 습기가 숨을 조였다. 복도 끝 횃불 빛이 벽의 이끼를 붉게 물들였다.
감금실은 복도에서 오른쪽으로 꺾인 곳이었다. 화소월이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두 손목은 쇠사슬에 묶여 머리 위로 당겨져 있었다. 오른쪽 광대뼈 아래로 핏물이 말라붙어 검은 선을 그렸다.
“늦었네.”
서문경은 검집 끝으로 자물쇠 핀을 비틀었다. 쇠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걸쇠가 풀렸다.
“일어설 수 있느냐.”
화소월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한쪽 발목이 조금.”
서문경이 화소월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둘이 복도로 나온 순간, 맞은편 어둠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사파 전사 세 명이었다. 그 뒤로 백무영이 걸어나왔다. 오른손 검은 장갑 위로 검은 반지가 손가락을 조이고 있었다.
“역시 배수구로 올 줄 알았다.”
서문경은 화소월을 벽 쪽으로 밀었다. 사파 전사 한 명이 단도로 옆구리를 노리자, 서문경이 검을 수직으로 세워 밀어내고 역수로 손목을 쳤다. 두 명이 동시에 달려들자 오른쪽 전사의 발등을 밟으며 상체를 숙였다. 왼쪽 발차기가 어깨를 스쳐 붕대가 찢어졌다. 서문경이 검을 휘둘러 첫째의 허벅지를 베고 둘째의 검을 쳐 올렸다.
백무영이 움직였다. 서문경의 왼쪽 사각으로 파고들며 독지환 반지에서 가느다란 침이 튀어나왔다. 서문경이 몸을 비틀었으나 오른쪽 다리의 무게감이 반응을 늦췄다.
철호의 몸이 옆구리에서 튀어나왔다. 상의 왼쪽 가슴께가 이미 젖어 있었고, 바닥에는 핏방울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독침이 철호의 오른쪽 어깨를 뚫고 들어갔다. 철호가 무릎을 꿇었다. 백무영이 침을 뽑아내고 뒤로 물러섰다.
“정문 쪽에 붙은 불이 번지고 있다.”
전사 한 명의 보고에 백무영의 얼굴이 굳었다.
“물러난다.”
백무영과 전사들이 복도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계단을 오르며 멀어졌다.
서문경이 철호를 받아 안았다. 독침이 박힌 자리에서 검은 핏줄이 목 쪽으로 뻗고 있었다. 철호의 숨소리가 가늘게 끊겼다 이어졌다.
“약속한 경로대로… 왔습니다.”
철호의 오른손이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세 번 접힌 가장자리가 해어진 낡은 종이였다.
“십 년 전… 장문인께서 직접 쓰신 서찰입니다. 제 파문 건의 조작을 지시한….”
철호가 기침했다. 검은 피가 입술을 넘었다.
“빚은… 이걸로.”
서문경이 서찰을 받아 쥐었다. 철호의 손이 서문경의 손목을 잡았다가 미끄러져 바닥에 닿으며 물을 튀겼다. 호흡이 세 번 더 이어졌다. 네 번째 숨은 들어오지 않았다.
서문경은 철호의 눈을 손바닥으로 감겼다. 서찰을 펼치자 장문인의 필체가 횃불 아래 드러났다. 파문 조작 지시와 함께 백무영의 요청이 있었음이 적혀 있었다. 접은 자리마다 종이가 닳아 구멍이 뚫릴 듯 얇아져 있었다.
서문경은 서찰을 접어 증언서와 함께 가슴께에 넣었다. 철호의 시신을 벽에 기대 눕혔다.
“가야 한다.”
화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배수구를 빠져나와 담장을 넘을 때, 흑시루 정문 쪽에서 화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다음 날 정오. 검봉대.
눈이 녹은 매화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구파일방의 증인들이 석좌에 다시 자리했다.
백무영이 먼저 도착해 매화나무 앞에 서 있었다. 오른손의 검은 반지가 햇살에 반짝였다. 서문경이 검봉대 입구에 나타났다. 왼쪽 어깨 붕대가 도포 밖으로 비쳤다. 뒤따르던 화소월이 다리를 절며 석좌 쪽으로 향했다.
청성파 진장로가 일어났다.
“어젯밤 의례는 중단되었다. 오늘 소집된 이유가 무엇이냐.”
서문경이 매화나무 앞에 멈춰 섰다.
“매화검법 의례를 다시 연다.”
백무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파문된 자가 무슨 자격으로.”
서문경이 검을 뽑았다. 칼날이 햇살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자격은 의례의 증거가 증명한다.”
서문경이 왼쪽 손등을 들어 증인들에게 보였다. 손등 중앙에 매화 낙화 흉터가 꽃잎 다섯 장처럼 퍼져 있었다.
“매화검법 오 초식을 첫눈 아래서 수련한 자만이 이 흉터를 남긴다. 의례 없이 초식을 익히면 흉터가 생기지 않는다. 백무영. 네 왼손을 보여라.”
백무영이 움직이지 않았다. 청성파 진장로가 다가갔다.
“좌측 수배를 보이시오.”
백무영이 천천히 왼쪽 소매를 걷었다. 손등에는 아무 흉터도 없었다. 증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흉터가 없다고 검술이 불완전하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백무영이 검을 뽑았다. 서문경이 검을 오른손에 쥐고 칼끝을 땅에서 한 치 띄웠다.
백무영이 먼저 들어왔다. 검날이 왼쪽 목을 찔러 들어오자 서문경이 칼등으로 받아내며 밀었다. 이어 반보 앞으로 나가며 검을 비스듬히 올려 매화 가지의 휨을 따라 초식을 바꿨다.
백무영이 물러서며 검을 찔렀다. 서문경이 피하지 않고 칼끝을 백무영의 검 중간쯤에 맞췄다. 쇳소리와 함께 백무영의 검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서문경이 연속으로 세 합을 몰아쳤다. 백무영의 검이 매번 같은 자리에서 힘을 잃고 떨어졌다. 마지막 초식이 들어가자 백무영의 검에서 금이 갔다. 서문경이 칼끝을 백무영의 목 앞 한 치에 세웠다.
“의례 없이 초식을 반복해도 속도는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칼날의 각도가 마지막 초식에서 어긋난다. 십 년 전 네가 의례를 방해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백무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 검봉대 입구에서 옥기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술만이 아니다.”
옥기린이 문서 뭉치를 들고 증인들 앞으로 걸어왔다. 하급 조제사 두 명이 작은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옥기린이 첫 번째 문서를 펼쳤다.
“백무영이 사파 독문 세력 흑연방과 주고받은 통신문이다. 만독지환의 제조법과 중독자 생존 데이터를 넘기는 조건으로 희소분 재료를 공급받는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문서를 펼쳤다.
“십 년 전, 화소월의 가족이 몰살당한 사건의 원본 기록이다. 청성파 내부에서 이 기록을 은폐하도록 요청한 자의 친필 서명이 남아 있다.”
옥기린이 백무영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그가 끼고 있는 검은 반지는 흑연방의 신표다. 만독지환의 진행을 늦추는 향의 재료가 내 주점에 숨겨져 있었는데, 배합 비율이 백무영이 사파로부터 받은 희소분 배합과 정확히 일치한다.”
옥기린이 상자를 열었다. 비급 해독본과 숯가루로 드러낸 일람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독 검술 실험 기록. 백무영이 흑시루에서 사파 포로들에게 행한 불법 실험의 전모다. 비급 기록과 사파 통신문의 수치가 같은 자리에서 합쳐진다.”
화소월이 석좌에서 일어나 다리를 절며 백무영에게 다가갔다.
“내 가족 열한 명 모두 같다. 네가 문을 열고 들어와, 한 명씩 확인하며 찔렀다. 내가 옷장 속에서 그 소리를 전부 들었다.”
백무영이 뒤로 물러섰다. 등이 매화나무 껍질에 닿았다. 검은 반지가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눈 녹은 흙 위에서 반지가 검게 빛났다.
청성파 진장로가 백무영 앞에 섰다.
“백무영. 매화검법 의례 방해, 사파 내통, 불법 독검 실험, 가족 몰살. 구파일방 증인으로서 자네를 체포한다.”
진장로의 손짓에 두 명의 무장한 문도들이 백무영의 양팔을 잡아 등 뒤로 돌렸다. 왼손의 붕대가 풀리며 말라붙은 상처가 드러났다. 백무영은 저항하지 않았다.
증인석의 화산파 인물이 낮게 말했다.
“이것으로 가문에 남을 치욕이다.”
백무영이 끌려가는 동안 매화나무 가지에 바람이 불었다. 서문경은 검을 거두어 검집에 꽂았다. 옥기린이 다가와 찢어진 어깨 붕대를 살폈다.
“다시 감아야 한다.”
화소월은 매화나무 아래 떨어진 검은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발로 흙을 덮어 묻었다.
서문경이 가슴께에서 철호의 편지를 꺼내 펼쳤다. 바람에 펄럭이는 서찰을 다시 접어 옥기린에게 건넸다.
“이것도 첨부해라.”
청성파 무인들이 백무영을 검봉대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발소리가 돌계단에 부딪혀 울리다가 점차 작아졌다. 매화나무 가지가 바람에 한 번 더 흔들렸다.
옥기린의 손끝이 어깨 붕대를 감싸쥐는 사이, 발소리는 돌계단을 벗어나 검봉대 입구의 굳은 흙바닥 위로 떨어졌다. 매화 향 대신 먼지 냄새가 서문경의 숨 끝에 닿았다.
구파일방 증인들이 석좌에서 일어났다. 청성파 진장로가 검을 뽑자 화산파와 점창파 인물들도 뒤를 이었다. 옥기린이 비급 해독본과 사파 통신문을 들어 숯가루로 떠낸 이면 글자까지 횃불에 비추었다.
“십 년 전 흑시루에서 포로들에게 독 검술을 시험한 기록이다. 백무영의 친필이다.”
웅성거림이 번졌다. 백무영이 한 걸음 물러서며 주위를 훑었다. 도주로를 재는 눈빛이었다. 그 순간 매화나무 뒤에서 검은 복면의 인영들이 솟아올랐다. 사파 조직원 다섯이었다.
“사영.”
서문경이 입을 열었다. 사영은 대답 없이 절룩이며 백무영에게 다가갔다. 백무영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늦었군. 이쪽 증거를 먼저 처리해라.”
사영이 멈춰 섰다. 허리춤에서 꺼낸 것은 서찰이 아닌 단도였다.
“흑연방의 명령이다. 모든 연루 증거는 제거한다. 너도 포함이다.”
백무영의 눈이 커졌다. 한마디 더 내뱉기 전에 사영의 단도가 왼쪽 갈비 아래로 들어갔다. 이어 다른 조직원 둘이 검을 찔러 넣었다. 백무영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고, 무릎이 꺾여 눈밭에 주저앉았다.
증인들이 경악하며 진형을 정비했다. 사파 조직원들은 백무영의 품을 뒤져 문서를 꺼내 횃불에 던졌다. 마지막 한 장이 타오르기 직전, 서문경이 쇄도했다. 사영이 방해하려 했지만 옥기린이 뿌린 흑혈산 가루에 조직원들의 움직임이 둔해져 있었다.
서문경은 타는 문서 옆으로 떨어진 쪽지를 낚아챘다. 동시에 백무영이 손목을 붙잡았다. 피투성이 손아귀였다.
“너… 네놈이….”
목에서 피가 꾸르륵 끓었다. 눈동자에 마지막 증오가 담겼으나 입술만 움직였을 뿐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백무영이 옆으로 쓰러져 얼굴을 눈에 박았다.
서문경은 쪽지를 펼쳤다. 만독지환의 향 제조에 필요한 약재와 배합 비율이 적혀 있었다. 품에 접어 넣었다.
사영이 단도를 거두고 손을 올리자 조직원들이 일제히 물러나 검봉대 난간 너머로 사라졌다. 바닥에는 피가 눈과 섞여 얼어붙고 있었다.
철호의 시신은 흑시루 쪽 돌계단에 누워 있었다. 목과 가슴에 검상을 입은 채였다. 흑시루 정문에서 미끼 노릇을 하며 시간을 벌다 사파 전사들의 손에 쓰러진 것이었다. 서문경은 무릎을 굽혀 철호의 눈을 쓸어 내리고, 옆에 놓인 검을 집어 가슴 위에 올렸다.
청성파 진장로가 다가왔다.
“백무영의 죄상은 구파일방 전체에 알리겠다. 네 누명도 공식적으로 벗겨질 것이다.”
서문경은 대답 없이 철호의 시신을 들쳐 업었다. 왼쪽 견갑의 상처가 찢어졌으나 입술을 깨물고 걸었다.
검봉대 입구에서 화소월과 옥기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소월의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서문경이 철호의 시신을 옥기린 앞에 내려놓았다.
“장례를 부탁한다.”
옥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경은 산길 쪽으로 발을 돌렸다.
“서문경.”
화소월이 불렀다. 걸음이 멈추지 않자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었다.
“어디로 갈 거지.”
“낭인의 거점이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마지막 음절이 독기 탓에 갈라졌다. 화소월이 더 따라가려 하자 옥기린이 팔을 잡았다.
“함께 가지 않겠나.”
화소월은 등에 번진 검은 핏자국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는 정보망으로 그를 지키겠다.”
옥기린이 천천히 손을 놓았다. 화소월은 더 이상 따라가지 않았다.
서문경은 산길에서 멈춰 서 만독지환의 향 제조법 쪽지를 꺼냈다. 가장자리에 백무영의 피가 묻어 있었다. 약재 중 절반은 이 지역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낭인의 거점에서 정보를 모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쪽지를 접어 품에 넣자 손끝이 떨렸다. 만독지환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걸었다.
검봉대 입구에서 화소월이 등을 돌리며 말했다.
“철호의 장례가 끝나면, 사파 통신문 사본을 낭인 정보망에 흘리겠다. 백무영의 사례를 경고 삼아.”
옥기린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서문경에게 연락할 생각인가.”
“아니. 나는 내 방식으로 그가 움직이는 판을 닦아둘 뿐이다.”
서문경의 발걸음이 산길로 접어들었다. 만독지환의 향은 한두 달 버티게 해 줄 뿐이다. 그다음을 위해서는 서쪽 만독곡까지 가야 할지도 몰랐다. 길은 멀었지만 가야 할 방향은 처음으로 분명했다. 그는 쪽지를 쥔 손을 품 안에서 놓지 않은 채 걸음을 이었다.
얼어붙은 눈길 위로 발자국이 한 줄로 남았다. 화소월은 그 발자국을 보다가 옷깃을 여미고 옥기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