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꽃잎은 독을 머금고
5화
북소리가 바위산을 울렸다.
조운휘는 품 안의 서찰을 한 번 더 눌렀다. 당예린의 쪽지는 촛불이 삼켰지만, 임시 해독약이 든 죽통은 아직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미세한 진동이 왼쪽 갈비뼈 아래로 전해졌다.
“가자.”
우대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가짜 보석 반지들이 한꺼번에 빛을 잃었다.
“대협, 잠깐….”
“길에서 해라.”
조운휘는 벌써 돌계단을 세 칸 올랐다. 좁은 석실 출구로 찬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바깥은 아직 해가 중천에 닿지 않았는데, 바위산 그림자가 통로 전체를 덮고 있었다.
두 사람은 대연무장 쪽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걸었다. 청운검문 본전 방향에서 두 번째 북소리가 퍼졌다. 이번엔 더 컸다. 삼백 문도가 일제히 자리로 모이고 있다는 신호였다.
우대협이 조운휘의 오른쪽 어깨 너머로 말을 붙였다.
“추대식 경호 배치는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소인이 아까 장내 순서를 좀 봤는데, 장로회 셋째 어른이 직접 배치를….”
“그 셋째가 ‘또 다른 눈’이다.”
우대협의 걸음이 반 박자 느려졌다.
“서찰에 그렇게 적혀 있었소?”
조운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찰 원본에서 얼룩에 가려졌던 두 글자. 장로회. 그리고 경호 배치를 쥔 자가 경호의 구멍을 알고 있다는 논리.
우대협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럼 소인이 증인석에 서기도 전에….”
“그 자가 널 못 건드리게 만들 거다.”
“어떻게.”
조운휘는 걸음을 멈추고 우대협을 돌아봤다.
“네 증언을 장내 모두가 듣기 전에 내가 그를 지목한다. 그러면 그가 널 막는 순간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는 셈이다.”
우대협의 입이 벌어졌다. 콧수염이 떨렸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대연무장 입구가 보였다. 높은 기둥들 사이로 청색 비단 휘장이 바람에 부풀어 올랐다. 추대식 본전 안에서는 이미 개회 북소리가 울린 지 오래였다. 장내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합송 소리가 복도까지 닿았다.
조운휘는 품에서 임시 해독약 죽통을 꺼내 손에 쥐었다. 마개를 열자 푸르스름한 김이 올랐다. 냄새는 없었다. 당예린의 약은 언제나 냄새를 지웠다.
죽통을 기울여 액체를 삼켰다.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감촉은 뜨거웠다. 식도에서 위까지 한 줄기 불길이 이어졌다. 좌측 견정혈 부근에서 잠룡독이 꿈틀댔다. 파문 낙인의 잔류 기운이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당예린의 약이 그 경계를 따라 벽을 쳤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의 굳은살이 저려왔다. 감각 둔화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할 때마다 기가 검집 쪽으로 흐르는 방향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우대협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지금 뭘 드신 겁니까.”
“해독약의 일부.”
“일부요?”
조운휘는 빈 죽통을 품 속에 밀어 넣으며 대연무장 입구로 몸을 돌렸다.
“완전 해독의 대가는 이미 지불했다. 이 약은 오늘을 위한 임시 처방이다.”
북소리가 멎었다.
본전 안의 합송도 끊겼다. 대연무장 문 앞에서 두 명의 수호 도사가 조운휘의 앞을 가로막았다. 왼쪽 도사는 중년의 문도였고, 오른쪽은 이제 막 검을 든 지 얼마 안 된 젊은이였다. 둘 다 청운검문의 수련복을 입고 있었다.
“문주 추대식 중입니다. 출입은 문파 관계자만 가능합니다.”
조운휘는 왼손으로 검집을 들어 수호 도사의 가슴 높이에 내밀었다. 낡은 검집의 끝이 도사의 왼쪽 가슴께를 향했다.
“이 검을 아느냐.”
중년 수호 도사의 눈이 검집을 훑었다. 익숙한 물건을 더듬듯 시선이 느려졌다. 검집 밑동에 새겨진 청운검문의 옛 문양을 발견한 순간, 수호 도사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매화검결의 사부님께서 직접 하사하신….”
“길을 비켜라.”
중년 수호 도사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십 년 전 파문된 자입니다. 제가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조운휘는 검집을 내리지 않았다.
“그럼 장로회의 비상 소집을 요구한다.”
“무슨 근거로….”
조운휘는 빈 죽통을 꺼내 수호 도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 안에 든 독을 장로회로 가져가라. 청운검문 내 독공 침투가 의심된다고 전해라.”
죽통 안쪽에 남은 푸르스름한 잔여물이 도사의 손바닥에 닿았다. 독기 반응에 민감한 수호 도사의 손끝이 순간 떨렸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곳에… 독공이….”
“내가 직접 증명하겠다. 그 전에 이 죽통을 들고 장로회 셋째 어른을 제외한 모든 장로에게 보여라.”
“셋째 어른만 왜….”
“지금 가라. 늦으면 이 안의 독이 증발한다.”
중년 수호 도사는 더 묻지 않았다. 젊은 도사에게 문 수호를 맡기고 긴 복도 쪽으로 사라졌다.
조운휘는 곧장 본전 안으로 들어섰다.
대연무장은 침묵에 쌓여 있었다. 삼백 명의 문도가 중앙 통로 양옆으로 정렬해 있었고, 통로 끝에는 대리석으로 된 사제단이 놓여 있었다. 사제단 위에 이재혁이 있었다.
이재혁은 흰색 바탕에 청색 구름 문양이 수놓인 긴 도포를 입고 있었다. 왼손 약지의 청옥 반지가 태양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문주 인장이 든 비단 보자기가 그의 오른손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장내 합송은 끝났지만 아직 분위기는 경건했다. 맨 앞줄에는 장로회 네 명이 자리했고, 그 뒤로 청운검문 각 분원의 책임자들이 서 있었다. 우대협은 기둥 뒤편에 몸을 숨긴 채 조운휘가 들어서는 모습을 주시했다.
조운휘의 걸음은 통로 중앙을 따라 곧게 뻗었다. 검은 무복이 움직일 때마다 양옆 문도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얼굴을 알아보는 자는 없었다. 파문된 지 십 년, 소년의 얼굴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제단 앞 열 걸음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재혁의 시선과 마주쳤다.
순간 이재혁의 왼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른쪽은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착각할 만큼 빠르게 돌아왔지만, 조운휘는 보았다.
“이 자리, 청운검문의 문주 추대식에 무례하게….”
장로회 첫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조운휘는 품에서 서찰 원본을 꺼내 높이 들어 올렸다.
“십 년 전 청운검문에서 파문당한 조운휘다.”
장내의 공기가 바뀌었다. 이름을 기억하는 장로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이 서찰은 차기 문주 이재혁 대사형이 독왕곡주와 주고받은 밀서 원본이다. 파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재혁은 이미 독왕곡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재혁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군요. 그런 서찰을 어디서….”
조운휘는 서찰을 접어 첫째 장로에게 던졌다.
“필체를 확인하라. 마지막 획마다 왼쪽으로 기우는 버릇. 이재혁의 글씨다.”
첫째 장로가 서찰을 받아 펼쳤다. 둘째 장로가 옆에서 함께 읽었다. 셋째 장로는 손을 내밀었지만, 첫째 장로가 막았다.
“셋째는 보지 마시오.”
“무슨 소리요?”
첫째 장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 수호 도사에게서 보고를 받았소. 독공 침투가 의심되는데, 이 자가 당신만 제외하고 장로회에 알리라고 지시했다 하오.”
셋째 장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재혁이 손을 들어 장내를 진정시키려 했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저 분은 십 년 전 파문된 자입니다. 청운검문에 원한을 품고….”
“원한은 있다.”
조운휘의 목소리는 무표정했다.
“원한은 있으나 서찰은 거짓이 아니다.”
첫째 장로가 서찰에서 고개를 들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 서찰에 ‘약속한 약재는 청운검문 경비로 조달한다’는 문장이 있다. 뒷장에는 이재혁 대사형이 조운휘의 검술 시간표를 넘겼다는 기록도….”
“날조된 것입니다!”
이재혁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십 년 동안 기다린 조작극에 불과합니다.”
“증인이 있다.”
조운휘가 뒤를 돌아보았다. 우대협이 기둥 뒤에서 걸어 나왔다. 손이 콧수염을 움켜잡았고, 가짜 반지들이 덜컥거렸다.
“우대협. 정보상이 이곳에서 무슨 증언을….”
장로회 둘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우대협은 허리를 숙였다.
“소인은 십 년 전 이 문파 후원 서고 바깥을 청소하던 하인이었사옵니다.”
우대협의 숨소리가 떨렸다.
“그날 밤 대사형 이재혁이… 누군가와 밀담하는 걸 직접 봤습니다. 조운휘 소협의 검술 연습 시간표를 건네는 것도 봤고, ‘처리’니 ‘잔여’니 하는 말들도….”
“거짓말!”
이재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도포 자락이 사제단을 쓸었다.
“이 자는 돈만 밝히는 정보상일 뿐입니다. 이런 자의 증언을….”
첫째 장로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대사형, 잠시 물러서시오. 증거가 명백합니다.”
“명백하다고요?”
이재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온화했던 눈매가 일그러졌다. 담청색 눈동자가 얼음처럼 굳었다.
“명백하다고 하셨습니까.”
오른손이 청옥 반지를 만졌다.
조운휘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옥 반지 안쪽에 독왕곡 증표가 새겨져 있다는 소문이 있다. 반지 주인이 독왕곡과 어떤 관계인지 증명하는 물건이다.”
“그 소문을 네가 퍼뜨렸구나.”
이재혁의 입에서 처음으로 반말이 흘러나왔다.
“역시 사형님다운 치밀함이야. 십 년이 지나도 한결같구나.”
장내가 술렁였다. 대사형의 존대가 무너지는 광경을 삼백 문도가 목격했다. 장로회 셋째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첫째 장로가 팔을 뻗어 그 소매를 붙잡았다.
이재혁은 반지의 청옥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푸른 기운이 반지 표면을 스쳤다.
“맞아. 이건 독왕곡의 물건이야. 그런데 그게 왜? 문주가 되기 위해 인내한 내 시간을 증명하는 증표일 뿐인데.”
“인내.”
조운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네가 인내한 것은 협력이다. 독왕곡에 내 검술 시간을 넘기고, 그 대가로 문주 자리를 약속받았다.”
“네놈의 쌍극합일 체질은 처음부터 버그였어!”
이재혁의 목소리가 대연무장 전체에 울렸다. 장내 어디선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사부가 너에게만 매화검법 오의를 전수하려 했을 때, 내가 뭘 느꼈는지 알기나 해? 청운검문을 위해 피나는 수련을 한 건 나야! 네놈은 그저 체질이 특별하다는 이유 하나로….”
왼손으로 청옥 반지를 빼내 공중으로 던졌다. 반지가 사제단 위에서 회전하며 푸른 빛을 뿜었다.
“이걸로 끝이다.”
반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재혁의 두 손에서 어두운 연기가 피어올랐다. 푸른 기운이 도는 잿빛 독기였다. 맹독이라기보다 수십 년 수련한 독공의 경지에 가까웠다. 연기가 이재혁의 손가락 사이를 흐르며 손바닥 전체를 덮었다.
“조운휘! 십 년 전 모자랐던 건 네놈의 실력이다!”
이재혁이 바닥을 박찼다. 사제단을 한 번에 뛰어넘어 조운휘의 앞으로 쇄도했다. 오른손이 독기를 두른 채 조운휘의 안면을 향해 뻗어왔다.
조운휘는 왼손으로 검집을 들어 그 손목을 쳐냈다. 낡은 가죽 겉면에 독기가 스쳤다. 순간 검집이 검게 변색되며 겉면이 일어났다. 하지만 조운휘의 손은 이미 검을 뽑고 있었다.
날이 빠져나왔다. 매화검법 다섯 번째 초식. 검 끝이 공중에 매화 한 송이를 그린 듯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이재혁은 그 궤적을 읽었다. 같은 문파에서 같은 검법을 익힌 자였다.
“그게 네 한계야!”
이재혁이 왼손으로 독기를 방출했다. 매화검식의 환영이 독기에 닿자, 꽃잎을 본뜬 검의 잔상들이 허물어졌다. 검기로 유지되던 매화가 독기에 부식되었다.
조운휘의 오른손이 떨렸다. 감각 둔화가 아직 남아 있었다. 검을 쥔 손의 감촉이 흐릿해질 때마다 독기는 매화를 좀먹었다.
이재혁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보법을 바꾸며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오른손이 조운휘의 목을 향해 독기를 방출했다. 낙인의 흉터가 있는 왼쪽이다.
“그 흉터, 내가 줬어야 했는데!”
조운휘는 바닥을 굴렀다. 왼쪽 어깨를 사제단 모서리에 부딪치며 일어났다. 호흡이 거칠어졌지만 표정은 그대로였다.
“네가 독공을 익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재혁은 웃지 않았다. 눈만 부릅떴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조운휘는 검을 팔뚝 높이로 내리며 검 끝을 이재혁의 발 방향으로 향했다. 매화검법이 아니었다. 청운검문의 기본 보법도 아니었다.
그가 독왕곡에서 곡주와 대면했을 때 보았던 선대 사숙의 왼손 검술을 오른손으로 재현한 자세였다. 독공이 매화검법을 녹이는 상성이라면, 매화검법을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이재혁의 손가락에서 독기가 다시 분출되었다. 푸른 연기가 두 팔을 타고 흘러내려 손아귀 전체를 덮었다.
“그 검술도 독 앞에서는 마찬가지다!”
이재혁이 두 손을 모았다.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독기가 하나로 합쳐져 굵은 기둥을 이루었다. 독공의 정수였다. 그 기둥이 조운휘의 전신을 향해 쏟아졌다.
조운휘는 피하지 않았다. 검을 앞으로 내민 채 두 발을 바닥에 붙였다.
임시 해독약이 가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아니라 감각이었다. 위에서부터 식도와 경맥을 따라 내려간 약의 벽이 잠룡독을 가두자, 반대편 혈도에서 전혀 다른 기운이 솟아올랐다.
쌍극합일.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던 두 개의 기가 견정혈 부근에서 충돌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그 흐름이 오른쪽 팔을 타고 검으로 전해졌다.
이재혁의 독기 기둥이 조운휘의 검 끝에 닿았다.
순간 검의 날이 흔들렸다. 하지만 부러지지 않았다. 독기가 검을 타고 조운휘의 손으로 전이되려는 찰나, 쌍극의 기가 독기를 뒤집었다. 독공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듯 검에서부터 매화 향이 섞인 기운이 역류했다.
이재혁의 눈이 커졌다.
“말도 안….”
독기가 역전되었다. 이재혁의 양손에서 조운휘에게로 흐르던 독은 방향을 바꾸어 이재혁 자신에게로 되돌아갔다. 독기의 색마저 푸른빛에서 짙은 먹빛으로 변했다. 이재혁의 독공이 스스로를 찔렀다.
이재혁이 비명을 질렀다. 두 팔을 움켜쥐고 사제단 쪽으로 나뒹굴었다. 독기가 팔뚝 안쪽 경맥을 타고 어깨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온몸이 경련했다.
조운휘는 검을 내렸다. 걸음을 옮겨 쓰러진 이재혁의 앞에 섰다. 검 끝이 그 가슴께를 향했다.
“끝이다.”
이재혁이 숨을 몰아쉬며 조운휘를 올려다보았다. 입가에 검은 피가 흘렀다. 독공이 경맥을 찢은 자국이었다.
“꼴좋구나… 조운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른쪽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십 년 전 네가 가진 걸 부쉈던 게… 내 유일한 실수다.”
“실수가 아니다.”
조운휘는 검을 조금 더 내렸다.
“너는 네가 가질 수 없는 걸 부쉈다. 그게 시작이었고, 이게 끝이다.”
“검술 시간을 넘긴 것도… 네놈의 체질을 실험한 것도… 모두 내 의지였다….”
이재혁의 숨이 끊어질 듯 가빠졌다.
“단 한 가지 후회가 있다면… 네놈을 파문만 시키고 살려둔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이재혁은 정신을 잃었다.
조운휘는 검을 거두어 검집에 꽂았다. 장내는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첫째 장로가 먼저 걸어 나왔다.
“서찰과 증언은 검증됐습니다. 이재혁 대사형의 독공 사용도 목격했고….”
“그 독공은 청운검문의 것이 아닙니다.”
대연무장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당예린이었다. 자주색 당삼에 은실 독충 문양이 선명했다. 허리춤 약통들이 걸을 때마다 부딪혀 경쾌한 소리를 냈다.
당예린은 이재혁의 옆에 쪼그려 앉아 손목을 집었다. 황금빛 눈이 손끝을 따라 흐르는 독기의 잔류를 읽었다.
“이 독공의 기운… 삼십 년 전 청운검문에서 파문된 선대 사숙의 왼손 검술을 기반으로 변형했군요. 제 꼬리를 무는 독사 문양까지 남아 있어.”
장로회 첫째가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당예린은 이재혁의 반지가 떨어진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청옥 반지 안쪽에 새겨진 독문을 보세요. 이건 제조자가 독왕곡주 자신임을 증명하는 표식이에요. 독공으로 만든 신물이란 뜻이죠.”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둘째 장로가 집어 들었다. 안쪽을 비춰 보더니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독왕곡주가 청운검문 선대 사숙이라면….”
“맞아요.”
당예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가락에 묻은 이재혁의 독기 잔여물을 약통 틈새에 있는 작은 침에 묻혔다.
“이런 독공 변형은 같은 계열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절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잔류 기운을 보니 최근까지 직접 대면하며 배운 흔적이 있어요.”
셋째 장로가 뒤로 물러나려다 첫째 장로의 손에 다시 잡혔다. 첫째 장로는 셋째의 소매를 놓지 않은 채 선언했다.
“장로회 셋째는 즉시 직위 정지. 추후 심문을 통해 서찰 속 ‘또 다른 눈’과의 연관성을 확인한다.”
셋째 장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항변도 못 하고 두 명의 수호 도사에게 끌려 나갔다.
첫째 장로가 목소리를 높여 장내에 알렸다.
“이재혁 대사형은 파문 및 무공 폐기에 처한다. 문주 추대식은 중단하며, 모든 권한은 장로회가 임시 수습한다.”
기절한 이재혁은 수호 도사들에게 들려 본전 밖으로 옮겨졌다. 독공에 찢긴 경맥이 푸른 멍으로 번져 있었다.
우대협은 기둥 옆에 주저앉아 콧수염을 움켜쥐었다. 손이 떨렸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조운휘는 당예린을 보았다.
당예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거래대로야. 네 체질 데이터는 전부 내 것이 됐어. 잠룡독 완전 해독은… 지금 여기선 무리지만, 어차피 네 체질 데이터 없이는 불가능한 거였으니까.”
“해독은 뒤로 미루겠다.”
조운휘는 품속에서 빈 죽통을 꺼내 당예린에게 건넸다.
“네 약이 없었으면 독공 역전은 실패했다.”
“그건 약이 아니라 표식이야. 네 체질 반응을 실시간으로 읽으려고 심어둔 거. 근데 그걸 역으로 이용해서 내 처방 없이도 쌍극을 제어했어. 이건 네 몫이야.”
당예린은 빈 죽통을 받아 허리춤 약통 사이에 끼웠다. 시선이 조운휘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잠시 머물렀다.
“데이터는 충분히 얻었어. 역상 해독술도 완성할 수 있겠지. 오늘 일로 실전 데이터까지 생겼으니….”
당예린은 말을 마치지 않았다. 황금빛 눈이 조운휘의 목 왼쪽을 스쳤다. 붉은 흉터가 이제는 더 이상 붓지 않았다. 파문 낙인도, 잠룡독도 모두 힘을 잃은 듯 조용했다.
조운휘는 몸을 돌렸다. 대연무장을 가로질러 입구로 걸어갔다.
당예린이 그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살아서 돌아오라 했더니 진짜 살아서 끝냈잖아.”
조운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연무장 문을 나서자 바깥 공기가 차갑게 밀려왔다. 해는 아직 중천에 있었지만 바위산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장내에선 장로회가 수습 체제를 논의하는 소리가 낮게 울렸고, 복도 저편으로 이재혁이 끌려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청운검문 정문을 나설 때쯤, 당예린이 뒤따라 나왔다.
“기다려.”
조운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당예린이 보폭을 좁혀 옆으로 따라붙었다.
“완전 해독은 언제 받을 거야.”
“필요할 때.”
당예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약 올리려는 미소가 아니었다.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좋아. 나도 네 체질 데이터 정리할 시간이 좀 필요했어. 다 정리되면 전서를 보내지. 대가는 그때 다시 정해.”
조운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대가는 이미 지불했다.”
“아니, 그건 독왕곡 데이터까지 포함한 값이고. 완전 해독은 별도야.”
조운휘의 눈이 깊어졌다.
“흥정하자는 거냐.”
“흥정이 아니라 거래지. 다음 번에도 같은 조건으로….”
당예린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팔짱을 꼈다. 약통들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네 체질이 주는 데이터는 역상 해독술의 마지막 퍼즐이야. 그러니까… 또 만나자, 조운휘.”
조운휘는 답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길을 걸었다. 검은 무복이 바람에 흔들렸다. 정문 밖 길은 황토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고,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당예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낀 작은 침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등을 바라봤다. 품속에서는 옥패가 조운휘에게 심은 추적 표식의 마지막 신호를 약하게 내보내고 있었다.
당예린의 입술이 움직였다.
“다음 거래까지… 데이터 망가뜨리지 말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조운휘는 지평선 쪽으로 걸어갔다.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복수는 끝났다. 독은 아직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품은 비었고, 검집은 낡았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청운검문의 흰 담장이 점점 작아지고, 바위산의 그림자도 옅어졌다. 길은 홀로 이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