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버려진 공녀는 잊힌 신전의 마지막 사제와 계약 결혼한다

5화

지팡이 소리가 사라진 복도에 문장의 방 문고리가 남아 있었다. 알릭이 잡았던 자리였다.

리에나는 열린 문을 밀지 않았다. 품 안의 해독 기록이 숨을 쉴 때마다 옷깃에 닿았다. 그녀는 뒤돌아 보지 않고 회의장 안으로 되짚어 들어갔다.

늦은 아침의 빛이 북쪽 창을 얇게 밀고 있었다. 벨테인 가문 문장의 방은 오전의 소음 없이 가라앉아 있었고, 탁자 위에는 알릭이 남긴 금장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서기 두 명이 회의록을 정리하다 일어섰다.

“공작님을 모셔야 해요.”

리에나가 탁자 앞에 섰다.

“여기서, 지금요.”

서기들이 멈칫했다. 그녀는 어머니 기록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종이는 습기를 먹어 한쪽 귀가 뒤집혀 있었다.

“대심의장으로 가기 전에 확인할 게 있습니다.”

잠시 뒤 발소리가 복도 쪽에서 되돌아왔다. 느리고, 마룻바닥을 끌 듯한 걸음이었다. 알릭이 문간에 멈춰 섰다. 딸을 보자 손가락이 완장 끝을 한 번 당겼다.

“무슨 일이냐.”

리에나가 기록 위에 손을 얹었다.

“아버지께 묻겠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얼마 동안, 약제실 출입을 결재해 주셨어요.”

알릭의 시선이 종이로 갔다가 천천히 돌아왔다.

“오래된 일이다. 회의에서 다 끝났다.”

“아뇨. 회의에서 카시우스가 소환장을 남겼을 뿐, 답은 안 끝났어요.”

리에나가 기록을 조금 밀어 보였다.

“이 기록은 치료 기록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조제한 약이 독약에 반응하는지 검사한 감시 기록이에요. 수선화 뿌리와 사리풀을 섞으면 벨라돈나 계열 독약 앞에서 잿빛으로 변합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서기 한 명이 회의록 모서리를 접었다.

“결재 기록은 아버지가 갖고 계셨어요. 오늘 오전에 금고에서 직접 대조하라고 하셨죠.”

리에나가 알릭을 똑바로 보았다.

“그럼 지금 대조하면 됩니다. 어머니가 남긴 조제 기록과, 아버지가 결재한 약제실 출입 기록을요.”

알릭은 대답 대신 탁자 끝에 손을 짚었다. 손등의 혈관이 붉게 도드라졌다.

“리는.”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너는 그날 밤을 묻는 거냐.”

“묻는 게 아니라 확인하려는 겁니다. 어머니가 독약을 쓰고 있었다는 의심이 틀렸다는 걸요.”

리에나가 어미를 정확히 끊었다.

“아버지께서 그 의심을 언제부터 가졌는지, 그리고 왜 지금까지 숨기셨는지.”

알릭의 턱이 미세하게 당겨졌다. 그는 리에나를 보지 못하고 지팡이가 놓인 쪽으로 손을 뻗는 듯했다. 손끝이 흔들렸다.

“대심의장에서 증언하시죠. 어머니 조제 기록과 약제실 출입 결재 기록을 함께 제출하고, 그날 밤 별관에 드나든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건…….”

알릭의 목소리가 부서졌다.

“가문의 이름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네가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거냐.”

“이미 가문 회의록에 헤이즐의 증언이 남았어요. 이제 아버지가 말한 것만이 부족해요.”

리에나가 기록을 접었다. 종이가 마르는 소리가 방 안을 긁었다.

“선택하세요. 대심의장에서 진실을 말씀하시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고르지 않으신 채로 저희가 그곳으로 걸어가거나.”

알릭이 딸을 보았다. 회색 눈이 핏기가 없는 채로 반짝였다.

“그 아이는…… 네 어미가 마지막 밤에 약제실 문을 연 걸 봤다고 했다. 나는 문 앞에서 물러나 있는 걸 본 줄 알았다.”

그가 턱을 문질렀다.

“카시우스 심부름꾼 얘기를 듣고도 나는 회의록에 넣는 것만으로 막았다. 묻지 않으려고 그랬다.”

리에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증언하겠다.”

알릭이 지팡이를 집었다. 금장이 땅을 짚으며 둔하게 울렸다.

“내가 묵인해 온 모든 것을 회의록이 아니라 내 입으로 말하겠다.”

귀족회 대심의장은 공개 회의가 열릴 때와 달리 어두웠다. 벽을 따라 선 청동 촛대에 불이 반쯤 옮겨졌고, 의장석 뒤의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리에나가 먼저 걸음을 멈췄다.

이드리스가 그녀의 왼쪽에서 반 보 앞에 섰고, 헤이즐은 한 걸음 뒤에서 약초 가방을 왼쪽으로 돌려 멨다. 알릭은 지팡이를 짚은 채 다른 문으로 들어왔다. 의장이 착석하며 손을 들었다.

“벨테인 공작가 계승 서약과 혼인 서약 무효 확인 심리를 계속합니다. 증거 제출과 증언은 오늘 안으로 마무리하십시오.”

카시우스가 방청석 쪽에서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왼손 장갑을 고쳐 끼는 대신 검지를 가볍게 굽힌 채였다.

“먼저 말씀드리지요. 지난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전부 낡은 소문에 가까워요. 헤이즐이라는 시녀의 목격담은 밤중이라 누구 얼굴을 봤다는 근거도 없고요.”

그가 의장석을 향해 서류를 들어 보였다.

“저는 벨테인 가문의 현재 후계자로서, 인장 반납과 이 혼인 서약의 무효 처리를 요청합니다. 무효가 아니라면 리에나 공녀께서 결혼 서약만으로 가문에 남으실 근거가 없어요.”

리에나가 손바닥으로 품을 짚었다.

“그 서류, 오늘 아침 가문 회의에서 제가 기각당한 복귀 청원을 근거로 만들었을 텐데요. 귀족회가 보신 그 문서의 결재 경로부터가 다릅니다.”

그녀가 앞으로 나갔다.

“복귀 청원 기각은 알릭 벨테인 공작의 서명과 가문 인장 날인이 있어야 효력이 있어요. 그런데 그 서류에는 날인이 찍힌 날짜와 서명 위치가 어긋나 있어요.”

카시우스의 옅은 미소가 사라졌다.

“공녀께서 인장을 갖고 도망친 상태에서 무슨 날인을 확인하신답니까.”

“인장을 누가 갖고 있는지가 문제가 아니에요. 문서가 위조됐는지가 문제죠.”

리에나가 어머니 기록을 꺼냈다.

“그리고 여기,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약제실에서 쓰신 조제 기록입니다. 저는 이 기록을 가문 회의에서 이미 공개했어요.”

그녀가 기록을 의장석을 향해 펼쳤다.

“벨라돈나 계열 독약에 반응하는 수선화 뿌리와 사리풀 조합. 어머니는 독약을 만들어 드시려던 게 아니라, 몸에 남은 독이 어디에서 오는지 좁혀서 남기신 거예요.”

카시우스가 손을 올리려는 순간, 헤이즐이 리에나 옆에서 한 걸음 나섰다. 그녀의 손목 약초 화상 자국이 불빛에 얼룩졌다.

“그날 밤, 별관 약제실 복도에서 카시우스 도련님의 심부름꾼을 봤습니다. 왼손에 작은 통을 들고 있었어요.”

헤이즐은 떨지 않았다. 목소리만 평소보다 낮았다.

“사람 얼굴은 멀어서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 통은 약제실 서랍 어디에도 없는, 약국 도장이 없는 민무늬 통이었어요.”

카시우스가 비웃듯 고개를 갸웃했다.

“심부름꾼을 봤다는 것 하나로 독살을 뒤집어씌우실 셈이세요? 시녀의 기억이라는 건 법정에서 무슨 증거가 됩니까.”

“기억이라면 아버지의 결재 기록과 합치는지 보면 됩니다.”

리에나가 알릭을 돌아봤다. 알릭은 천천히 의장을 향해 섰다. 지팡이 소리가 한 번 났다.

“벨테인 부인이 마지막으로 약제실 출입을 요청한 날, 나는 그 출입을 결재했다. 그날 밤 별관 약제실 통로에는 가문 직속이 아닌 발길이 한 번 더 찍혔다는 기록이 있다.”

알릭의 어투가 공식 존대로 옮겨졌다.

“그리고 나는 아내가…… 독약에 조금씩 노출되고 있다는 의심을 가졌음에도, 공식 조사를 미뤘습니다. 그 의심을 지금 여기서 밝힙니다.”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는 대신, 방청석 어딘가에서 서기가 붓을 놓치는 소리가 났다. 카시우스가 의장을 향해 반 걸음 다가갔다.

“공작께서 지금 심정이 불안정하셔서 망언을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는 낮게 덧붙였다.

“아버님은 벨테인 후계 구도를 원하신 적이 없어요. 저를 약점으로 문인 것뿐입니다.”

“카시우스.”

리에나가 그를 불렀다. 그는 천천히 돌아봤다. 그녀는 기록을 접어 쥔 채 그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내미는 논리를 뒤집으려면 어렵지 않아요. 어머니 조제 기록 앞에, 가문 결재 기록 앞에, 헤이즐의 목격 진술 앞에……”

그녀가 한 박자 사이를 두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의 왼손 장갑 앞에 대면 되죠.”

카시우스의 검지가 살짝 굽어졌다. 그 움직임을 의장보다 먼저 이드리스가 읽었다.

“의장.”

이드리스가 발언권을 구했다. 의장이 손짓하자 그가 한 걸음 나섰다.

“테미르 신전은 몰락했고, 레반 가문이 그 재산을 옮겼다는 장부 기록이 귀족회에 남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방청석 쪽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이드리스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그 신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제는 저고, 속죄는 제 몫입니다.”

그가 리에나를 보았다. 옅은 금색 눈이 어두운 회의장에서 가까이 옮겨붙듯 빛났다.

“하지만 이 서약은 속죄나 계약 때문이 아닙니다.”

이드리스는 천천히 왼발을 앞으로 옮겼다. 검은 예복 아래에서 신관 휘장이 촛불을 받았다.

“나는 리에나 벨테인을, 그녀가 위협받는 한 지킬 겁니다. 그게 무엇을 요구하든.”

그가 오른손을 들어 서약서 제출 방향으로 손바닥을 향했다. 낡은 검은 장갑 너머로 약지의 신관 반지가 은빛으로 번졌다. 그러자 리에나의 쇄골 아래에서 열이 퍼졌다. 기록을 쥔 손끝부터 팔 안쪽까지, 단단한 빛의 무늬가 옷 위로 은색 그물처럼 스며 나오고 있었다.

대심의장 전체가 환해졌다. 촛불이 아니라 리에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신성력이 벽을 때리고 서류를 밀고 카시우스의 눈을 찌푸리게 했다. 의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 축복이 발현됐다. 이 장소에서, 공개 심리 중에.”

누군가 웅성거리는 소리보다 먼저, 카시우스가 비웃음을 섞어 내뱉었다.

“축복을 흉내 내는 신전이라는 게 얼마든지……”

“그대신 왼손 장갑을 벗게 하시죠.”

리에나가 빛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정확했다.

“신전 증인 서약 등본에 마지막 거래 증인 기록이 있어요. 증인은 왼손 장갑을 벗지 않았고, 서명은 오른손으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관례라고 넘겼죠.”

그녀가 이드리스가 갖고 있던 등본을 의장에게 건네 받았다.

“독약 반지를 감추기 위해서라면, 장갑을 벗지 않을 이유가 됩니다. 그 반지 안쪽에 남은 벨라돈나 흔적을 확인해 주십시오.”

카시우스가 뒤로 물러서며 왼손을 몸 뒤로 감췄다.

“과하다, 공녀께서.”

“이번엔 의장님께서 명하실 일입니다.”

리에나가 물러서지 않았다. 의장이 근위병 둘을 불렀다.

“카시우스 벨테인 경. 왼손 장갑을 벗어 증거로 내십시오.”

카시우스는 어깨로 숨을 들이쉬며 방청석을 훑었다. 그 순간 헤이즐이 벽 쪽에서 대각선으로 움직였다. 그가 문으로 발을 돌리려는 것을 그녀가 먼저 자리로 막았다.

“비켜라. 상것이.”

카시우스가 처음으로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나 근위병이 그의 팔을 붙들었고, 왼손 장갑이 벗겨졌다. 검지 반지에서 빛도 없이 거무스름한 때가 감돌았다.

“약제를 대조하겠습니다.”

의장이 서기에게 명했다. 서기가 달려 나갔고, 회의장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카시우스는 잡힌 팔을 처음에는 빼려다가 곧 웃음을 지었다. 그 눈에 푸른빛이 사납게 꺾였다.

“압수하라.”

의장이 선언했다.

“카시우스 벨테인을 서약 위조와 벨테인 부인 독살 혐의로 구속한다.”

근위병들이 그를 회의장 밖으로 이끌었다. 카시우스는 저항하지 않고 리에나를 한 번 돌아봤다.

“네 어미가 그걸 남기지 않았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었다.”

리에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말이 사라지자, 대심의장은 완전히 밝았다.

의장이 중앙으로 내려서며 판결문을 받아 들었다.

“벨테인 후계권은 정식 혈통인 리에나 벨테인에게 귀속된다. 혼인 서약은 테미르 신전 마지막 사제가 집행했고, 공개 축복 증명으로 신성적 효력을 인정한다.”

알릭이 지팡이에서 손을 놓았다. 금장이 옆으로 조금 기울었지만 그는 바로 세우지 않았다. 헤이즐은 리에나 곁으로 돌아와 가방을 고쳐 멨다.

“끝났네. 이제 진짜.”

“아직 한 가지 남았어.”

리에나가 속삭이듯 답하고 이드리스 앞으로 걸어갔다. 광휘는 사라졌고, 이드리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른팔 소매 안의 붕대가 하얗게 비쳤다.

“서약을 재확인하고 싶어요.”

리에나가 똑바로 말했다.

“계약 해지를 부르려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다시, 가문의 이름이 아니라 제 이름으로요.”

이드리스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옅은 금안은 빛은 잃지 않았지만 피로로 어두워져 있었다.

“계약 조항은 이미 목적을 다했습니다.”

그가 한 번 멈췄다.

“그래도 이 맹세를 유지하는 건, 저에게도 남은 일입니다.”

그가 장갑을 낀 손을 뒤집어 내밀었다. 리에나가 겹쳐 잡자,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맥박 위로 조용히 얹혔다. 살갗이 아니라 장갑 너머의 악력만이 그대로 남았다.

“리에나.”

이드리스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본문처럼 말했다. 그것은 부르는 소리라기보다 서약을 마무리하는 어조였다.

“어디에 있든, 신전이 없어도 사람을 지키는 편에 서겠습니다. 당신 쪽에.”

리에나는 대답 대신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가슴 언저리에 났던 수호 문양이 더는 타오르지 않았지만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손끝으로 누른 채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헤이즐이 뒤에서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리에나에게만 들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제 저택 갈 수 있겠다.”

리에나가 피식 웃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의장이 퇴장을 알렸다. 근위병들이 먼저 나가고, 서기들이 회의록을 덮었다.

카시우스는 문 밖에서에서 사슬 소리를 내며 멀어지고 있었다.

벨테인 인장은 귀족회 보관함에서 리에나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차갑고 무거웠다. 그녀는 그것을 품에 넣지 않고 손에 쥐었다. 이드리스가 그 옆에 섰고, 헤이즐이 한 발 뒤를 따랐다.

대심의장 문이 활짝 열렸다. 오전의 흰 빛이 계단 아래까지 쏟아졌다. 리에나는 가문 밖으로 나가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의 기록과 서약서, 그리고 벨테인의 이름을 한 손에 쥔 채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의 걸음은 빨랐다. 마차에 오르기 전 한 번, 이드리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리에나는 그 손아귀 속에서 인장을 다시 확인했다. 그 위로 첫 햇빛이 닿아 금박이 반짝였다.

버려진 공녀는 잊힌 신전의 마지막 사제와 계약 결혼한다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