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잊힌 신전의 계약 결혼

5화

촛농이 식으며 날카로운 냄새를 풍겼다. 봉인실 공기가 그 냄새에 눌려 움직이지 않았다. 리에타는 서약석 앞에 선 채 칼로스가 서류를 쥔 손을 보았다. 인장 반지가 촛불을 받아 붉게 번뜩였다.

“비키지 않으면 후견인으로서 강제 집행을 시작한다.”

칼로스가 말했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로 향했다.

“상속 심사 중인 공녀에게 강제 집행을 들이대면, 그 현장이 곧 체포 영장이오.”

리에타가 혈인장을 품에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체포는 밖의 사병이 먼저야. 네 사제는 아직 문도 못 열었고.”

칼로스의 손이 멈칫했다. 돌문 너머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넬라의 비명이 아니라 짧은 숨이 들려왔다.

“그 문은 안쪽에서 열지.”

테오도르의 목소리가었다. 돌문 아래 틈으로 그림자가 길게 들어왔다. 칼로스가 뒤를 돌아봤다.

“네가 여길 어떻게.”

“벨루스 저택과 잊힌 신전을 잇는 옛 통로가 있다. 넬라가 열었다.”

테오도르가 돌문 밖에서 말했다. 쇠가 돌에 긁히는 소리와 함께 문틈이 조금 벌어졌다. 칼로스가 서약석 위 서류를 한 움큼 그러쥐었다.

“들어오면 이 청구서가 먼저 서약석에 접수된다. 사제가 막을 권한은 없어.”

“그 청구서는 내가 기각했다. 배우자 자격으로.”

테오도르가 문틈 사이로 손을 넣었다. 손등을 덮은 검은 천이 보였다. 칼로스가 낮게 코웃음 쳤다.

“기각은 심사장 안에서만 통하는 소리지. 여기는 신전 기록보다 강제 집행이 빨라.”

칼로스가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안쪽에서 얇은 칼날과 빈 유리관이 꺼내졌다. 리에타의 오른손에 난 상처가 그 빛에 드러났다.

“그 피는 이미 가문의 것이라고 증명됐소.”

리에타가 한 걸음 물러서며 혈인장을 두 손으로 감쌌다.

“강제로 뽑은 피는 문양이 일그러진 것도 봤을 텐데.”

칼로스가 유리관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네 손이 더러워서 그런 거지.”

테오도르가 문틈으로 어깨를 밀어 넣었다. 돌문이 버거운 소리를 냈다. 칼로스가 칼날을 들어 리에타를 향했다.

“오지 마. 사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야.”

“아니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손등의 천이 문틈에 걸려 벗겨졌다. 오른손등 문양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칼로스가 칼날을 반쯤 내렸다.

“그 문양은.”

“잊혀 버린 신전의 기록이다. 공녀님.”

테오도르가 리에타를 보지 않고 말했다.

“신탁문은 벨루스의 핏인장이 잠긴 축복을 열고, 계약한 배우자의 서약이 침묵을 끝낸다고 적었다.”

리에타의 손끝이 저렸다. 혈인장이 손바닥 안에서 뜨거워졌다.

“그 문장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소.”

“알았다.”

테오도르가 문을 더 밀었다. 돌문이 반쯤 열렸다. 그가 봉인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나를 고른 거요.”

리에타가 물었다. 목소리가 평평했다.

“혈인장이 계기였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칼로스가 끼어들었다.

“들었냐. 너는 신전의 도구였다. 그런 서약을 상속 심사에서 배우자라고 쓸 수는 없지.”

“배우자는 서약으로 성립한다. 목적과 사정은 효력을 가르지 않아.”

테오도르가 한 발 다가섰다. 칼로스가 유리관을 높이 들었다.

“그러면 여기서 피를 더 뽑아서 재검증하면 되겠네.”

“그 피로는 안 된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신탁의 조건은 자발적인 피다. 강제로 낸 피는 문양을 일그러뜨린다. 공녀님이 스스로 올리지 않으면 혈인장도 서약석도 열리지 않는다.”

칼로스가 이를 갈았다.

“일그러진 것도 반응은 했어. 정통이면 통과야.”

“왕실 상속 심사는 반응이 아니라 신탁 등본으로 판정한다. 그 등본은 내가 원본을 보관한다.”

테오도르가 품에서 서약 증서 원본을 꺼내 보이지 않고 손으로 짚었다. 칼로스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갔다.

“서명은 이미 했고, 이제 서약만 다시 세우면 된다.”

리에타가 말했다. 칼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신탁 때문에 골랐다면, 갱신 이유도 신탁이오?”

테오도르가 잠시 멈췄다.

“시작은 그랬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녀님이 나를 도구로 여기지 않도록, 나도 공녀님을 도구로 쓰지 않을 조건을 묻고 싶다.”

리에타가 혈인장을 품에서 내렸다.

“계약 조건을 지우고 다시 서약하겠소.”

칼로스가 소리쳤다.

“그게 뭐가 된다고! 이 청구서는 이미 접수됐어!”

“그 청구서는 위조 인영이오.”

리에타가 칼로스의 왼손을 보았다. 인장 반지가 여전히 끼워져 있었다.

“당신이 서류에 찍은 인영과 그 반지의 문양을 대조해 보면, 가운데 줄기가 반대로 꺾여 있소. 검지에 남은 자국이 그 반지와 같다는 것도 심사장에서 증언할 수 있소.”

칼로스가 반지를 감추듯 주먹을 말았다. 리에타가 오른손 검지를 들었다.

“강제 채혈할 때 이 자국이 생겼소. 같은 방향으로 눌렸소.”

칼로스가 반지를 빼려 움직였다. 리에타가 그 앞을 막았다.

“늦었소.”

그녀가 서약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칼로스가 칼날을 휘둘렀다. 테오도르가 그 팔을 쳐냈다. 유리관이 돌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지금 새 서약을 세운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공녀님의 피를 한 방울 주십시오.”

리에타가 혈인장을 쥔 손을 폈다. 강제 채혈로 막혀 있던 상처가 벌어지며 붉은 선이 손금을 따라 번졌다. 그녀는 피를 서약석 위에 올렸다. 테오도르가 오른손등 문양을 긋고 그 위에 피를 겹쳤다.

칼로스가 달려들었다.

“서명 안 된 서약은 계약이 아니야!”

리가 아니라, 그가 위조 서류를 서약석에 내리찍었다. 그 순간 서약석이 은빛으로 밝아졌다. 위조 서류가 닿은 자리부터 종이가 재처럼 일어났다. 유리관 조각과 가죽 주머니도 그 빛에 닿아 타올랐다.

칼로스가 뒷걸음질 쳤다. 인장 반지가 손가락에서 벗겨져 돌바닥을 굴렀다.

“이건 신전 기록으로 접수한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서약석에서 은빛 선이 뻗어 나와 칼로스의 발앞에 멈췄다. 그는 비틀거리며 문 쪽으로 물러섰다.

“서약석에 금도 안 갔어. 이건 갱신이 아니라 원계약 유지다. 이의 제기하겠다.”

칼로스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가 물러선 자리에 그가 꽂은 위조 서류 재만 남았다. 통로 밖에서 넬라가 다급히 말했다.

“공녀님, 무사하십니까. 밖에 왕실 호송 관리들이 왔습니다.”

리에타는 서약석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손등 문양이 은빛을 받아 뚜렷해졌다. 그녀가 가까이 서자 문양의 빛이 더 번졌다.

“이것이 새 계약이오.”

리에타가 말했다.

“조건 없이 나를 배우자로 두는 것. 신탁 때문이 아니라 내가 고른 것.”

테오도르가 그녀를 바라봤다. 은빛이 두 사람의 발밑까지 내려와 돌틈을 메웠다.

“확신해?”

그가 물었다.

“물을 게 아직 남았소. 다만 이 서약만은 내가 냈소.”

리에타가 말했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자발적으로 올려졌다. 서약은 신전 기록으로 남는다.”

그가 품에서 새 계약 등본을 꺼내 두 장으로 나눴다. 한 장을 리에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받아 혈인장 위에 포갰다.

“이걸로 벨루스 저택과 작위는 공녀님 명의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리에타가 등본을 만 손에 힘을 줬다.

“칼로스 벨루스는 위조 서류와 감금, 강제 채혈 혐의다.”

통로 밖으로 왕실 호송 관리들이 들어섰다.

“벨루스 후견인을 우리가 인계받겠습니다.”

칼로스가 문 앞에서 팔을 붙잡혔다. 그는 리에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지만, 호송 관리가 그를 통로 밖으로 밀었다.

“끝이 아닐 거야.”

칼로스가 말했다. 리에타는 그를 보지 않고 서약석 앞에 섰다.

“아니. 여기서 당신은 끝났소.”

칼로스가 끌려 나가며 문 밖에서 한 번 저항했다. 호송 관리의 팔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통로 끝으로 사라진 뒤에도 그의 발소리가 한동안 울렸다.

넬라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정말, 작위를 되찾으신 겁니까.”

“저택도 함께.”

리에타가 새 계약 등본을 넬라에게 보였다. 넬라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지만 말을 삼켰다.

“수고했소.”

리에타가 넬라에게 말했다. 넬라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공녀님 곁에서 저택 문을 다시 열 날을 기다렸습니다.”

넬라가 말했다. 리에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이 내일이오.”

테오도르가 서약석 앞에 남은 칼로스의 인장 반지를 집었다. 반지는 손에 닿자 검게 그을렸다. 그가 리에타에게 내밀지 않고 돌 위에 놓았다.

“왕실 법정에 제출할 유품이다.”

“이미 제출할 것만으로 충분하오.”

리에타가 말했다. 그녀는 혈인장과 상속 증서, 새 계약 등본을 나란히 들었다. 은빛이 세 가지 위에 고르게 내려앉았다.

“이제 벨루스 저택으로 돌아가면 되오.”

리에타가 테오도르를 보았다.

“사제는 신전에 남겠소.”

“아니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계약한 배우자가 저택에서 첫날을 여는 동안, 나도 서약한 자로 함께 있겠다.”

리에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신탁의 다음 문장이오?”

“아니다.”

테오도르가 그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내가 정한 것이다.”

서약석의 은빛이 테오도르의 손등 문양에서 리에타의 손끝으로 번졌다. 그녀는 손바닥을 펴 보지 않았다. 대신 새 계약 등본을 더 단단히 쥐었다.

넬라가 통로 입구에서 돌아보며 말했다.

“저택 가는 길목에 왕실 호송차가 한 대 더 기다립니다. 칼로스는 이미 앞차로 출발했습니다.”

“가자.”

리에타가 말했다. 그녀가 서약석에서 물러서려는 순간, 테오도르가 그녀의 오른손을 잡았다. 강제 채혈로 남은 상처가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그는 말없이 피 묻은 손가락을 마주 쥐었다.

“지는 아물 때까지 놓지 않을 거라면, 걸을 수가 없소.”

리에타가 말했다. 테오도르가 손을 약간 풀며 걸음을 맞췄다.

“그렇게 잡지. 공녀님이 걸을 수 있게.”

그가 말했다. 리에타는 뒤를 돌아 서약석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돌에는 금 한 줄 없었다. 칼로스가 꽂은 자리만 재로 덮였다. 그 위로 은빛이 아직 남아, 그녀와 테오도르가 나란히 선 자리를 환하게 물들였다.

통로를 따라 저택 방향으로 걸었다. 어둠 속에서도 혈인장이 품 안에서 은은하게 붉은 빛을 냈다. 넬라가 앞에서 횃불을 들었다.

“저택에는 저와 함께 가신 지 얼마 안 된 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넬라가 말했다.

“이제 그들을 내 사람으로 다시 세워야 하오.”

리에타가 대답했다.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테오도르가 그 속도에 맞춰 반 보자 앞을 걸었다.

잊힌 신전 밖은 달빛이 희었다. 왕실 호송차 한 대가 신전 입구에 멈춰 있었다. 칼로스가 실린 앞차는 이미 저택 쪽 도로를 벗어나고 있었다.

리에타가 멈춰 서서 그 호송차의 등을 보았다. 테오도르가 그 시선을 가리지 않고 함께 바라봤다.

“체포장은 서약석 은빛 아래에 남았소.”

리에타가 말했다.

“그걸 보러 다시 신전에 올 일은 없겠소.”

테오도르가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 봤다.

“서약을 다시 세웠다.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걷지 않는다.”

그가 말했다. 리에타가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면 나란히 서시오.”

리에타가 말했다. 테오도르가 그녀의 상처 난 오른손을 다시 받쳐 쥐었다. 두 사람은 잊힌 신전을 등지고, 달빛 아래 벨루스 저택으로 향하는 길을 나란히 걸었다.

넬라가 뒤에서 횃불을 낮추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 환하네요.”

밤바람이 신전의 재 냄새를 걷어냈다. 리에타는 품 안의 혈인장에 손을 얹은 채 앞을 보았다. 그 위로 새 계약 등본과 벨루스 상속 증서가 함께 눌려 있었다.

잊힌 신전의 계약 결혼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