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공녀의 이번 생은 약혼자의 형과

5화

왕실 증거 보관소 문이 닫힌 뒤 한참이 지나서야, 복도에 남은 것은 관리가 내려놓은 촛불과 서로의 걸음 수뿐이었다.

“빈 공간이 있다.”

카이우스가 낮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리에나가 손에 든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기록으로 남겼다. 법정까지 개봉은 불가능하다.”

“그걸 노린 겁니다. 봉인된 채로 제시하면, 개봉 여부를 재판부가 직접 결정해야 하니까요.”

카이우스가 돌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걸음을 세웠다.

“내일 아침까지 에스텔라가 가만히 있을까요.”

“움직이면 좋습니다. 팔찌를 빼낼 움직임은 곧 배심 관리의 기록이 되니까요.”

“팔찌는 이미 압수됐다. 움직이지 못한다.”

존댓말이었다. 단정하되 무심한 어조는 이 남자의 공식 태도와 같았다.

“그 쪽은 제가 법정에서 맡겠습니다.”

리에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둘은 보관소 밖으로 나와 별도의 마차를 타지 않고 벨티르 저택으로 향했다. 늦은 밤의 바람이 돌계단 사이로 밀려와 옷단을 쳤다.

“내일이면 끝납니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짧게 읊었다.

아침이 오기 전에 벨티르 저택 서재에서는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증거 목록을 맞춰 보았다.

리에나는 위조 약병이 제출될 순서를 추렸다. 에스텔라가 지시서로 몰아올 때, 먼저 받아칠 것은 약병의 남부 공방 표식이 아니라 팔찌 안쪽의 출하 표기였다.

“헬레나 증언서는 어디에 뒀습니까.”

“제 가방 안쪽 주머니에 있습니다.”

“법정에서는 절대 먼저 내지 마라. 에스텔라가 약병을 올린 뒤다.”

카이우스가 서류 봉투를 넘기며 말했다. 리에나가 손끝으로 증인 서약서 사본을 만졌다.

“시간이 되면 제가 직접 요청합니다.”

“목숨을 건 요청이 되겠군.”

그녀의 눈동자가 창밖을 향했다. 동쪽 하늘이 벨티르 정원 너머로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라벤티움 중앙 법정 대심리원은 아침부터 사람의 온기에 젖어 있었다. 석제 바닥이 낮게 울리고, 등불이 꺼진 자리에 금속제 촛대가 광택을 잃고 서 있었다.

리에나는 피고석으로 걸어갔다. 카이우스는 동행인석에 섰다.

테오도르 린드 재판장이 중앙석에서 자세를 바로 했다.

“대심리원, 개정합니다.”

서기관이 개정 선언을 기록하고, 봉인 상자 두 개가 탁자 위에 놓였다.

“위조 약병과 피의자 문장 기록부터 해제하겠습니다.”

관리들이 봉인 밀랍을 끊고 반투명한 관을 꺼냈다. 약병 하나가 붉은 천 위에서 검은 상자에서 나왔다.

그 표면에는 아르젠트 가문 문장이 찍혀 있었다. 아니, 찍힌 것처럼 보였다.

“해당 약병은 연회장 테이블 아래에서 발견되었고, 문장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제조 시기의 산화 흔적은 없습니다.”

테오도르가 손짓하자, 관리가 흰 장갑을 벗지 않고 약병을 탁자 위에 눕혔다.

“밀서 봉인도 해제합니다.”

남색 원본이 나란히 놓였다. 벨티르 가주의 인장 밀랍은 여전히 어두운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피고석을 바라보았다.

“리에나 아르젠트 공녀. 공녀는 지금부터 오늘의 선서 없이 발언하지 마십시오.”

“예, 재판장님.”

리에나는 두 손을 모으고 시선을 재판석에 두었다.

곧 소공녀 에스텔라 마르샤와 디온 벨티르가 각각 청중석 뒤쪽에서 나와 증인석 방향으로 안내받았다.

“마르샤 공녀께서 피고인에 대한 고발 제출에 관여한 것은 아니나, 약병의 출처에 관해 소지 당시 정황을 증언할 예정입니다.”

서기관이 고개를 돌려 기록했다.

“벨티르 공자는 피고인과 약혼이 깨진 당사자로서 진술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디온은 리에나를 보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손끝이 왼쪽 소매를 살짝 움켜졌다.

“리에나 공녀와 마지막으로 연회장에서 잔을 나눈 사람이 저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잔에서 독이 나왔다면, 그걸 건넨 순서가 궁금해져요. 정말로 제 손에 쥐여진 잔이었는지.”

에스텔라가 가볍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피고인에게 사전에 준비된 질문서를 줄 것입니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리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먼저, 제 쪽에서 지금 제출할 것이 있습니다.”

그녀가 가방에서 증거 목록 필사본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테오도르가 서기를 쳐다보자 서기가 다가와 받았다.

“피고인은 약병의 문장이 아르젠트 양각과 상이하며, 남부 유리 공방의 표식이 병 안쪽에 새겨져 있음을 기록합니다. 팔찌의 압수 및 비파괴 검사와 같은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선언이었다. 법정 안이 조금 낮게 들렸다.

“약병은 이미 해제됐습니다. 그러나 공녀가 지금 새로 언급한 남부 공방 표식은 개봉 시에만 확인할 수 있겠군요.”

테오도르가 백발 아래 눈을 좁혔다.

“약병의 입구에 빛을 비추면, 문장 밑에 공방 인영이 드러납니다.”

리에나는 뒤집히지 않는 필사본을 들어 보이지 않고 말했다.

“법정에서 검증해 보십시오.”

카이우스가 동행인석에서 한 걸음 나서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반증 신청입니다.”

테오도르가 손가락을 굽혀 허공에 짚었다.

“약병에 빛을 대라. 남부 표식이 보이는지만 확인하고, 병 안쪽의 물질은 건드리지 않는다.”

관리들이 약병을 봉틀 위에 고정하고 광선을 약병 안쪽에 비추자, 문장 아래로 가는 선이 옅게 떠올랐다. 남부 공방의 출하 인영이 분명했다.

“표식 확인. ‘남부 신항 유리 공방’ 계열 문양입니다.”

서기가 재빨리 기록했다.

에스텔라의 얼굴에서 잠시 미소가 걸러졌다.

“표식이 있으니 무엇을 뜻합니까. 약병을 남부에서 만든 게 아니라, 누가 그렇게 보이게 했을 수도…”

“그래서 이제 약병을 만든 곳과 그 약병이 실제로 든 것을 증인과 대조하는 차례입니다.”

리에나가 웃지 않고 잘랐다.

디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장님, 피고인은 사람을 믿게 만드는 데 능숙해요. 저도 처음에는 그걸 몰랐어요. 그런데 그날 밤, 제 잔에 남은 것만 독으로 나오고 아르젠트 문장 약병이 발견됐어요. 증거는 단순한데 왜들 이렇게 복잡하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어미는 빨랐다. 웃음기를 굴리려는 듯했으나 목소리가 조금 떨고 있었다.

“디온 벨티르 공자. 그 잔은 공자가 직접 가져온 것입니다.”

리에나가 말했다.

“연회장 봉쇄 후인데 어떻게 그걸…”

“공자의 축배 잔에서만 약품 시험지가 푸른빛으로 변했습니다.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디온의 시선이 흔들렸다. 에스텔라가 입을 열려 하자, 리에나가 한 호흡 늦게 보충했다.

“피고인께서 그러셨지요. 제가 잔을 건넸다면 무슨 순서였는지 궁금하다고.”

“네.”

“그 잔은 탁자 아래에서 귀족 층 시종이 가장 마지막에 배치했습니다. 저는 공자가 들고 온 잔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공자 또한 어느 지점에서 그 잔을 집었는지 저보다 정확히 기억하시겠지요.”

디온의 입술이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그때 헬레나 그레인이 증인석으로 나섰다. 헬레나는 낮게 묶은 머리를 쓰다듬지 않고 단정히 나아갔다.

“증인, 선서를 시작하십시오.”

서기가 서약서 사본을 들었다.

“본인은 오늘 이 법정에서 알고 있는 바를 사실대로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헬레나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디온 벨티르 공자와 에스텔라 마르샤 공녀를 본 일이 있습니다. 자정 무렵, 벨티르 저택 서쪽 별관의 회랑에서였습니다.”

법정 안 숨소리가 한 번 낮아졌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마르샤 공녀가 오른쪽 손목에 남부산 진주 팔찌를 찬 채 공자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물건은.”

“손바닥만 한 봉투였습니다. 공자가 받아 품 안에 넣었어요.”

디온이 몸을 돌려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거짓 증언이에요. 그런 일 없어요.”

에스텔라가 웃음을 얹어 말했다.

“팔찌는 법정 증거로 압수되어 있습니다. 공녀의 증언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면, 압수된 팔찌는 어디서 구했는지 번복이 있겠네요.”

리에나는 조금 더 또렷하게 받았다.

“그 팔찌는 별관과 무관해요.”

“그런데 그 팔찌 안쪽에서 빈 공간이 발견됐습니다. 그리고 오늘 약병에서 남부 공방 표식이 나왔지요. 증인은 팔찌가 공자를 만나는 자리에서 건네졌다고 입니다.”

테오도르가 손바닥으로 아치형 지팡이 끝을 눌렀다.

“증인은 계속하십시오.”

“밤에 회랑을 지나가던 중이었습니다. 둘은 저를 보지 못했어요. 마르샤 공녀가 팔찌를 들어 보이며 말했고, 공자는 봉투를 가슴쪽으로 눌러 품었습니다.”

“그 봉투가 밀서인지 확신합니까.”

“손에 들고 있는 동안에는 겉면 인장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 대화는.”

헬레나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마르샤 공녀가 ‘이거 있으면 문장이 뒤집히지 않을 거야’라고 했습니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에스텔라의 목덜미가 붉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카이우스가 그때 디온에게로 몸을 돌렸다.

“디온. 이제 직접 볼 수 있겠다.”

재판부가 밀서 사본 쪽을 향해 손짓하자, 카이우스는 사본에서 한 줄이 있는 폭만 접어 들어 보였다.

“남부 신항 출하 표식과 출발지 기록 중 한 줄이다.”

그가 읽었다.

“‘에. 마. 손목 치장 내부에 든 것을 별관 회랑에서 전한다. 약병은 이미 다른 손으로 넘겼다. 문장이 뒤집히면 그게 신호다. 따로 사람을 보내 피고의 술잔 받침대를 치운다.’”

칙칙한 문장이 법정 안에 울렸다.

디온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아니… 이건… 저건 어디서…”

“네 글씨가 아니다. 필체가 다르지.”

카이우스가 사본을 접어 내렸다.

“하지만 지시서로 쓰기에 충분한 문장이다. 넌 이 봉투를 받고도 ‘에. 마.’가 누군지 묻지 않았나.”

디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스텔라가 손톱을 왼손 손바닥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디온 벨티르 공자. 답하시오.”

테오도르가 말했다.

“저는 그냥… 편지인 줄 알았어요. 에스텔라가 그쪽저택에서 아는 사람을 통해 아르젠트 문장을 빨리 찾을 수 있다고 해서…”

디온의 말이 처음으로 갈라졌다.

“아르젠트 문장이 든 약병을 찾으면, 그걸 피고인이 준 걸로 만들 수 있다고 했어요. 저는 형이 망치는 가문을 바로잡으려고요. 그래서… 도움을 받은 것뿐이에요.”

“필적이 다르다면, 지시서를 직접 쓰도록 누가 시켰는지 밝히십시오. 공자는 지금 누구를 보호하고 있습니까.”

리에나가 반박하는 어조로 물었다.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저는 진짜 몰랐어요. 에스텔라가 저를… 그렇게 만들 줄은.”

디온이 멍하니 에스텔라를 돌아보았다.

“디온, 정신 차려요. 그건 내가 준 적 없어요.”

에스텔라가 손을 디온 쪽으로 뻗으며 말했으나 디온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 팔찌… 약병을 그 안에 숨겨 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 진주 사이로 손톱만 한 약병 말이에요. 그게 없는데 왜 가만히 있어요.”

에스텔라의 표정이 파르스름해졌다. 법정 경비가 다가서려 하자 테오도르가 손을 들어 중단시켰다.

“이 정도면 사건의 실체는 확정됐습니다. 자백 절차는 별도로 받겠습니다.”

리에나는 그 사이 서기가 옮겨 주는 종이 위에 필기구를 받아 들었다.

“위조 지시서 필적 대조를 요청합니다. 제가 위조 문장의 중심 획 서너 글자를 같은 필압으로 시필한 뒤, 확대 광선 아래 대조하십시오.”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부는 디온 공자의 입회 아래 증거 필적을 대조하는 것을 허가합니다.”

리에나는 펜을 손에 쥐었다. 집게손가락 둘째 마디의 펜 굳은살이 익숙하게 받쳐졌다.

“같은 힘으로 쓴 것처럼 보이지만, 위조는 타인이 여러 번 따라 쓰며 눌린 지점이 다릅니다.”

그녀가 지시서의 약병 문장 부근을 종이 한 장에 옮겨 썼다. 서기가 확대경을 걸치자, 위조 필적은 가로획 끝에서 공그르는 듯한 힘 뭉침이 번졌다. 리에나가 쓴 활자형 필체는 눌림이 균일했다.

“필압 차이를 확인했습니다.”

서기가 기록했다.

테오도르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선고 자세를 취했다.

“라벤티움 중앙 법정은 리에나 아르젠트 공녀에 대한 독살 및 반역 혐의를 무혐의로 선고합니다.”

그가 두 문서 뭉치를 마주 보게 놓았다.

“벨티르 가문 후계자 승계 재가 보류를 이 시간부로 해제합니다. 증거 원본 반환 명령도 함께 기록합니다.”

카이우스가 손을 내려 자신의 검지 반지를 짧게 눌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후계 재가 서면을 접어 품 안에 넣었다.

리에나는 무혐의 판결 등본을 받아 두 손으로 접었다. 종이가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아래가 조금 허전했다.

디온과 에스텔라는 경비에게 양팔을 이끌려 대심리원 서쪽 문으로 나갔다. 에스텔라가 마지막으로 리에나를 돌아보았으나 말을 곧바로 뱉지 못했다.

“구금 이송 절차를 시작합니다.”

경비대장의 목소리가 법정 문 바깥에서 짧게 울렸다.

헬레나가 증인석에서 내려왔다.

“준비보다 길었어요.”

“아니요. 당당했어요.”

리에나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서약서 사본을 가지고 갈게요.”

헬레나가 서기에게서 받은 종이를 품에 안았다.

법정이 정리되고, 리에나와 카이우스는 대심리원을 나와 왕실 증거 보관소 밖 복도로 향했다.

오후의 빛이 높은 창을 통해 돌기둥을 반쯤 흐리게 가르고 있었다.

“이걸 언제 꺼내셨습니까.”

리에나가 보관소 복도 쪽 벽감에 놓인 화로 앞에 서며 물었다.

“어젯밤, 내가 직접 서재 금고에서 회수했다.”

카이우스가 품에서 혼인 동맹 계약서 원본을 꺼냈다. 종이 묶음 안에는 증인 날인이 눌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같이 보십시오.”

리에나가 계약서를 펴 보이자 카이우스가 손끝으로 마지막 항목만 짚었다.

“보호 범위와 진술 순서, 후계 재가 회복 시 효력이 사라진다고 쓰여 있다. 틀렸나.”

“아니요. 정확합니다.”

리에나가 계약서를 화로 위로 밀어 넣었다. 불이 약간 일어나며 가장자리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건 우리가 맺은 첫 계약입니다. 이제 없습니다.”

불길은 계약서를 재로 만들고, 남은 앙금은 가느다랗게 떨어져 내렸다.

리에나는 손바닥 밑으로 카이우스의 손등 위에 남은 재를 한 번 털어주었다.

카이우스가 그 손을 뒤집어 맞잡았다.

“계약이 사라지면, 이제 나는 뭘 근거로 당신을 옆에 두는 거지.”

리에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보라빛 눈에 아직 불티가 반사되고 있었다.

“아무 근거도 없습니다. 그게 제가 원한 거예요.”

카이우스가 시선을 그녀의 손에 잠시 내렸다 놓았다. 그리고 손의 힘을 조금 주었다.

“그럴 거면 도망치지 않게 자주 옆에 서라.”

“공자의 명령이십니까?”

“아니. 요구다.”

리에나의 입가가 완전히 풀리는 법 없이 움직였다. 그녀는 맞잡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복도 끝 창으로 법정을 나서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왕실 증거 보관소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열쇠는 관리의 손끝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리에나는 잠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붉은 자국이 남은 목덜미 쪽으로 손을 올리지 않고, 그 온기만을 카이우스의 손에서 느꼈다.

“살아남았네.”

혼잣말이 복도에 낮게 번졌다.

“이제는 살아남는 일을 나 혼자 계획하지 않아도 됩니다.”

카이우스가 그 말 뒤를 가만히 채웠다.

“그래.”

그가 고개를 조금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니 다음 계획도 같이 세워라. 계약 없이.”

왕실 증거 보관소 밖 복도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오래도록 남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발을 맞추어 밖으로 걸어갔다.

남은 계약서 재는 화로 안에서 마지막 불똥을 올렸다가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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