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 성녀와 성기사의 거래
8화
촛농 타는 냄새가 혀끝까지 밀려들었다. 지하 예배당의 공기는 밤새 제단 밑에서 식은 돌내를 머금고 있었다. 리에나는 손끝으로 벽감 천을 걷으며 증거물 묶음을 한 번 더 눌렀다.
벨라가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밀랍 종이로 감은 가루병을 품에 받았다. “이거 이제 내가 들고 다닐 거지, 언니.”
“응. 대조용 독약 병도 같이. 서류는 아스텔이.”
리에나가 뒤돌아 아스텔을 찾았다. 그는 제단 우측 서기석까지 가는 좁은 통로를 몸으로 막아선 채 바깥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예배 시작 전에 성구함 사이로 옮기면 됩니다. 제가 통행 명부에 기록실 복귀로 남겼습니다.”
“명부에 남기면 역추적되지 않아.”
“오늘은 순번이 제게 있습니다. 명부 조작보다 오히려 정상 기록이 낫습니다.”
아스텔이 튜브에서 면회 기록을 빼 리에나에게 건넸다. 리에나는 접지 않고 서류 묶음 맨 위에 얹어 벨라 쪽으로 밀었다.
“서기석은 대주교가 제일 늦게 확인하는 위치야. 카이델도 그걸 노렸어.”
벨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구금소에 처박혀서도 참 할 일이 많으시네, 그 양반.”
“감시는 어차피 취임식이 시작되면 의미 없어.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야.”
리에나는 어깨 위로 걸친 회색 망토를 여몄다. 왼쪽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베인 자리가 당겼다. 그녀는 숨을 한 번 짧게 나누고 벽에서 몸을 뗐다.
“가자.”
벨라가 가루병 두 개를 품 안에 나누고 먼저 북쪽 복도로 움직였다. 아스텔이 서류 묶음을 제의 안쪽에 밀어 넣고 반대편 문으로 사라졌다.
리에나는 제단 옆 작은 물그릇에 손을 담갔다. 차가웠다. 손끝의 촛농 냄새가 물 위로 번졌다. 그녀는 젖은 손을 망토 안에 감춘 채 취임식장 후면 통로로 향했다.
취임식장은 아직 통행이 통제되기 전이었다. 중앙 대성전 쪽에서 수습 성직자들이 성가대석을 밀고, 제대발을 털고, 촛대 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흰 낮빛이 높은 창을 타고 중앙 홀 바닥에 길게 깔렸다.
리에나는 후면 통로 기둥 뒤에 섰다. 저 멀리 제대 우측 서기석에 아스텔이 몸을 반쯤 숙이고 뭔가를 얹는 모습이 보였다. 두 번 시선을 옮기는 사이 그는 다시 통로 쪽으로 걸어 나갔다.
벨라가 어느새 뒤에 붙어 낮게 말했다. “대주교 오기 전에 자리만 잡으면 돼. 근데 언니, 진짜 저 안에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
“나도야.”
리에나가 기둥 모서리에 손을 얹었다. 취임식장 중앙에는 아직 성녀가 설 자리를 잡아주는 붉은 보석 장식이 놓여 있었다. 자신이 서야 했을 자리. 이제는 에드문트가 직접 그 자리를 무대로 쓸 것이다.
“서류는 올렸어.”
아스텔이 돌아와서 말했다. 얼굴에 땀은 없었지만 왼손 약지가 반쯤 구부러진 채였다. 리에나는 그 손을 보며 말했다.
“너는 여기 남지 마. 개회 전에 서고 열람복도 가는 길로 빠져.”
“하지만 증거 제출은 제가 해야 합니다.”
“제출은 내가 불러도 돼. 너는 일단 살아남아.”
리에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아스텔이 입을 열다가 벨라를 봤다. 벨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시킨 대로 해, 서방님. 언니가 불러야 할 때가 오면 알아서 불러.”
“알겠습니다. 저는 개회 전까지는 후면 회랑에 있겠습니다.”
아스텔이 물러났다. 리에나는 그가 통로 밖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곧 놓쳤다. 이제 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열하는 발소리, 봉인된 성가대의 화음, 끝에서부터 밀려오는 향 냄새.
취임식이 시작됐다. 후면 통로에서 보이는 중앙 홀은 이중 결계로 막혀 있었고, 사람들이 제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리에나는 망토를 벗었다. 드러난 옷은 길드의 검은 밀착복 위에 성전 하인용 예복을 걸친 것이었다. 어디에도 성녀라 부를 표식은 없었다.
에드문트가 나타났다. 백금발을 뒤로 넘기고 황금 자수 대주교복을 끌며 중앙에 올랐다. 목에는 붉은 보석 목걸이가 없었다.
리에나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벨라 품 쪽을 가리켰다. 벨라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오늘 거행되는 성녀 취임은 신께서 허락한 순서로 진행될 것이다.”
에드문트의 목소리가 성가대 위를 가로질렀다. 부드러웠지만 끝음에 명령이 묻어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성좌석에 앉은 대성당 기사단장을 불렀다.
“리리안 성녀의 유해는 이미 불온한 손길에 오염되었다. 확인을 부탁하겠소.”
환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조금씩 자리를 옮겼다. 리에나는 그 흐름에 섞이지 않고, 제단 서쪽 회랑에서 나온 성가대 뒤편으로 붙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시신이 오염되다니.”
“성녀 후보가 이단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군중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에드문트가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일곱을 기다릴 것 없다. 고인을 향한 진혼 대신 이교의 불을 꺼야 한다.”
그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제단 위에서 하인들이 짊어진 관이 중앙으로 옮겨졌다. 리에나가 숨을 참았다. 관 뚜껑이 열리기 전에 그녀는 망토를 휘둘러 옆 사람의 시야를 가로질렀다.
“저 관은 열지 마.”
목소리가 높지 않았지만 제단 앞줄까지 갔다. 에드문트가 몸을 반쯤 돌렸다. 리에나가 회중석 사이로 걸어 나왔다. 군중이 갈라졌다.
“리에나…….”
니는 이미 중앙 통로에 서 있었다. 에드문트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동공은 곧게 넓어졌다.
“살아 있었군요. 성녀여.”
“살아 있지. 당신이 알았으니까.”
리에나가 양손으로 망토를 풀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정지시켜야지. 취임식이고 뭐고, 당신 발언부터.”
“삼가 경고하겠소. 지금 이 자리에서 이단으로 지명된 자가 돌아다니면 축성된 은보다 무거운 벌을 받을 것이오.”
에드문트가 손을 들자 대성전 기사들이 움직였다. 리에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품에서 위조 성녀 목걸이를 꺼냈다.
청금석 성흔이 달린 은사슬. 사람들이 낮은 소리를 냈다.
“이거. 당신이 공인하라고 해서 제가 만들었죠.”
리에나가 목걸이를 높이 든 채 성대를 긁었다. “거짓된 빛은 공인 앞에서 금이 가요.”
그녀는 목걸이를 양손으로 잡아 비틀었다. 금속이 끊어졌다. 청금석 성흔이 중앙 홀 돌바닥에 떨어져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 안에서 흰 빛이 빠져나와 바닥을 핥은 뒤 위로 솟았다. 축성된 은에서는 결코 피어오르지 않는, 푸르스름한 연기였다.
“저 성흔은 제 것이 아니에요. 밤장미 길드가 만든 위조품이죠.”
리에나가 부서진 성흔을 발로 밀어 빛이 고인 쪽으로 보냈다. 에드문트가 한 걸음 물러서며 제단발을 걷어찼다.
“무엄하게….”
“잠깐, 대주교.”
제대 우측 서기석에서 아스텔이 걸어 나왔다. 한 손에 위조 공인 서류 원본을 들고 있었고, 그 옆에 수탁 봉투를 한 채였다. 성가대석이 그를 막으려 했지만 그는 결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류를 펼쳐 보였다.
“이건 성물고에서 압수한 성흔 등록 원본입니다. 도장 옆에 수정 흔적이 있고, 대주교 직인이 겹쳐 찍혀 있습니다.”
이어 붉은 보석 잔류물 병을 건네받은 벨라가 중앙으로 들어왔다. 메이드복 앞자락에 가루 두 병을 올려 놓은 채였다.
“후보 셋이 죽기 전에 받은 차. 거기서 나온 밀폐 용기랑 같은 독이야, 여기.”
벨라가 잔류물 병의 밀랍 뚜껑을 열었다. 연기가 아니라 아주 가는 분말 냄새가 퍼졌다. 앞줄 성직자 두 명이 고개를 돌렸다.
“이 목걸이는 대주교 관저 서재 금고에서 꺼냈어. 보석 빈 홈에 저 가루가 그대로 끼어 있었고.”
리에나가 벨라가 든 잔류물 병을 받아 부서진 성흔 옆에 놓았다. 에드문트가 웃음을 접었다.
“그것은 누군가 금고를 뒤진 증거일 뿐이오. 독이라 단정할 근거는 없다.”
“단정 안 해. 대조할게.”
벨라가 다른 병을 꺼내 손가락 두 개로 흔들어 보였다. “이건 후보들이 죽던 날 밤 검시관이 챙겨 둔 독약 원액. 지금 냄새 같아도 네, 다르다고 말 못 해.”
벨라가 병을 열고 잔류물 곁에 세웠다. 두 병 사이로 푸른 기운이 허공에 얇게 곡선을 그렸다. 시약이 아니라, 같은 계열의 마취성 독이 공기 중에 닿았을 때 반응하는 색이었다.
“이게 백성이 보는 앞에서 터져야 한다고 했지, 언니.”
벨라가 물러서며 말했다. 에드문트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제단 계단을 내려와 군중 쪽으로 손을 뻗었다.
“본 자리에 감염된 거짓이 있더라도 신의 이름으로 정화하겠다. 대성전 기사단은 즉시 저 여자를 구속하라.”
기사 세 명이 리에나에게 붙었다. 그녀는 팔을 뒤로 젖히지도 않았다. 청금석 조각 위로 검은 밀착복 자국처럼 긴장이 번졌다. 그 순간 등 뒤에서 결계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검은 성기사단 정복 위에 흰 망토가 펄럭였다. 카이델이 중앙 홀 안으로 들어왔다. 목 오른쪽 성흔은 이미 검붉게 퍼져 있었다. 그래도 걸음은 정확했다.
“물러서라.”
기사 한 명이 칼집에 손을 올렸다. 카이델이 그 앞에 서자 대성전 기사들이 반 걸음 뒤로 났다. 정지된 직위보다 그와 같은 공간에 서는 공포가 더 컸다.
“현 성기사단장 카이델 아르겐이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알이 굵었다. 에드문트가 돌아섰다.
“자네는 구금 중일 텐데.”
“구금은 직위 정지 중 열린 것이 아니다. 대주교가 후보 독살과 공인 조작에 관한 권한을 넘은 순간부터 정지는 효력을 잃는다.”
카이델이 한 칸 더 들어서며 장검을 뽑았다. 축성된 은이 공기 중에서 짧게 울었다. 에드문트가 제단 뒤로 몸을 피하며 무언가를 짚었다. 붉은 보석 목걸이가 있던 자리에는 조그만 성물 단검이 놓여 있었다.
“막아라! 이단자의 잔당이다!”
카이델이 앞으로 내디뎠다. 에드문트가 단검을 치켜들었다. 허공을 갈랐을 때, 성물고 결계에서 보던 그 은빛 선이 카이델의 검을 따라 뜨겁게 번졌다. 카이델이 검을 쳐올리자 에드문트의 단검이 손에서 떨어졌다.
기사단 셋이 달려들었다. 카이델은 다시 검을 반 바퀴 비틀어 수평으로 내리찍는 대신 등 뒤 기둥을 찍었다. 축성된 바람이 먼지를 일으키고, 에드문트를 감싸던 성가대 여럿이 흩어졌다. 카이델은 그 틈에 에드문트의 어깨를 잡아 돌려 세웠다.
“살아서 받아라.”
카이델이 무릎으로 에드문트의 오른쪽 팔을 눌렀다. 에드문트가 등을 바닥에 부딪치며 기함했다. 카이델은 왼손에 피처럼 검은 성흔을 그대로 둔 채 오른손으로 봉인 명령지를 꺼냈다. 구금소 지시서와 같은 크기의 종이였다. 검지에 낀 인장 반지를 누르자 순백 바탕에 선명한 은화가 찍혔다.
“대성전 기사단. 이 명령서에 따라 에드문트 하인리히를 구속 인계한다.”
대성전 기사 두 명이 받들어 종이를 확인했다. 도장은 성기사단장 직인이었다. 그들이 검을 거두고 대주교를 일으켰다. 에드문트의 백금발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이따위 것이 공인된 적 있나….”
에드문트가 낮게 중얼거렸다. 카이델은 그를 기사단에 인계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심장이 제멋대로 가라앉는 게 보였다. 무릎이 꺾였다. 그는 중앙 제단 가장자리에 왼손을 짚었다.
“의무관을 부르시오.”
아스텔이 뛰어가며 외쳤다. 리에나가 카이델 곁으로 갔다. 그녀의 손이 카이델의 검든 손목 위로 가지 않고 허공에서 멈췄다. 체온이 손끝으로 밀려들었다.
“왜 감추지 않고 나와.”
“이러고 끝내는 것보다 나았을 뿐.”
카이델이 천천히 몸을 세우며 말했다. 얼굴에 힘줄이 섰지만 말은 또렷했다. “증거부터 처리해라.”
리에나는 돌아서서 부서진 청금석 조각을 주워 증거대에 올렸다. 벨라가 그 곁에 독약 병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아스텔이 위조 공인 서류 원본을 펼쳐 증거대 반대편에 고정했다.
수가 벼락처럼 숨을 들이켠 뒤 중앙 홀을 내려다봤다. 붉은 보석 목걸이는 이제 없었다. 에드문트가 체포되어 끌려가는 복도 쪽으로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한 번, 봉인 반지를 벗어서 손바닥에 올렸다.
“성기사단장 봉인 반지. 에드문트가 위조한 문서에 눌렸던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다시 찍는다.”
그가 증거대 앞에 반지를 짚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죽은 동료의 누명은 이제 성물고 기록으로도 벗겨질 것이다.”
군중이 소리를 죽였다. 리에나는 부서진 목걸이 조각 하나를 손바닥에 올렸다. 은사슬의 차가운 무게가 손금을 눌렀다.
“이게 없어도 저는 성녀가 아니라 이브 나이트로드로 살겠다.”
그녀가 말했다. 카이델이 그녀 앞에 반지를 내밀었다. 손바닥 위의 봉인 반지는 아직 햇빛에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리에나는 그 앞에 목걸이 조각을 올리지 않았다. 대신 카이델의 손등 쪽에서 반지 아래로 손을 넣으려다 멈췄다.
“약속은 여기까지가 아니야.”
리에나가 나지막이 말했다. 캇델의 반지를 든 손이 한 뼘 앞에서 정지했다. 취임식장 밖에서 취임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