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맹검귀
8화
바닥의 떨림이 멎기 전에 강휘가 먼저 움직였다. 백무혼이 서리화와 석대를 향해 흡성귀를 틀었던 그 순간, 강휘는 두 사람의 심장이 뛰는 위치 사이로 검끝을 밀어 넣고 거리를 좁혔다.
무음진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새벽의 폐약창은 소리가 없었다. 대신 강휘의 발바닥에 백무혼의 체중이 실리는 방향이 찍혔다. 왼발 뒤꿈치에 힘이 빠졌다. 오른쪽으로 반 보 물러나려는 움직임이었다.
강휘는 물러나는 쪽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반 치 틀어 상대의 오른쪽 어깨 쪽 공간을 열어 주었다. 도망칠 길을 준 것이다.
“길을 주시는군요.”
백무혼의 음성이 무음진 한가운데를 갈랐다. 낮고 맑았다.
“도망쳐라.”
강휘가 답했다.
“그쪽은 벽이다.”
백무혼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가 검을 쥐는 손에 힘을 주자 손가락 마디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새끼손가락부터 차례로, 뼈가 옴짝달싹 붙는 소리였다.
바닥을 미세하게 가는 발소리가 겹쳤다. 오른쪽 반 보 물러나면서도 앞꿈치가 모래를 끄는 그 소리. 사흘 전 스승의 은신처 밖에서, 그날 밤, 유일하게 남았던 소리였다.
강휘는 손아귀에 힘을 빼지 않았다. 목소리는 사람의 것을 처음 들었고, 손가락 마디 소리와 발소리는 기억 속의 것과 같았다. 점검표는 넘어갔다.
“네가 그날 스승 곁에서 뺀 검이다.”
강휘가 걸음을 옮겼다. 백무혼에게서 세 걸음 거리까지.
“이제 검을 들었으니 그날을 다시 해라.”
바깥 새벽 공기가 폐약창 안으로 흘러드는 것이 볼을 스쳤다. 지금의 강휘는 그 소리의 방향을 몰랐고, 다만 온도로만 알았다. 무음진이 약해지고 있었다. 백무혼이 흡성귀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백무혼이 검을 완전히 뽑았다. 칼날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마찰음은 무음진에 삼켜졌지만,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떨림이 손목으로 왔다. 강휘는 자기 검을 백무혼의 칼날 아래에 대었다.
첫 쇠소리가 무음진 안에서 나지 않았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울렸다. 강휘는 그 힘의 방향을 따라 백무혼의 검이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알았다. 어깨를 겨눈 초식이었다.
강휘는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며 그 결을 탔다. 등 뒤의 심장 소리를 잊지 않았다. 서리화와 석대의 자리가 지금 강휘의 오른쪽 뒤였다. 강휘는 그쪽으로 절대 밀리지 않게 오른발에 체중을 실었다.
“흡성귀는 당신에게 소리를 주지 않지요.”
백무혼의 검끝이 되돌아왔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합이 붙었다. 강휘는 칼날을 세워 받았다. 백무혼의 힘은 크지 않았으나 정확했고, 매 합마다 강휘의 손아귀를 흔들었다.
“소리는 없어도 너의 축은 남는다.”
강휘가 받아치는 대신 자기 검이 백무혼의 손목 쪽으로 미끄러지게 했다. 백무혼이 반 보 물러나며 칼을 휘둘렀다. 검기가 세 걸음 안에서 선을 그었다. 오른쪽 허리 높이였다.
강휘는 몸을 낮춘 채로 그 선 아래를 통과했다. 백무혼의 왼발이 바닥을 다시 한 번 갈았다. 손아귀 마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벌어졌다가 다시 걸렸다. 강휘는 그 소리가 나는 지점, 곧 백무혼의 오른손과 왼발 사이로 뛰어들었다.
수인이 아니라 검끝이 먼저 갔다. 강휘는 두 사람의 심장 위치를 축으로 삼는 것을 멈추고 백무혼의 무기 쪽으로 모든 거리를 붙였다. 무음진의 한가운데에서 소리를 빼앗긴 채, 오직 바닥 진동과 칼날 떨림으로만 거리를 재었다.
세 번째 합. 쇠가 부딪는 소리는 이제 무음진 밖에서 나는 듯 아득했다. 백무혼의 검이 강휘의 목 쪽을 찔렀다. 강휘는 검을 반 바퀴 돌려 그 칼날을 아래로 눌렀다. 두 검이 미끄러지며 서로의 손목 쪽으로 떨어졌다.
백무혼이 오른쪽 어깨를 앞으로 빼며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강휘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백무혼의 뒤꿈치가 떨어지기 전, 강휘가 왼발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갔다.
“이 거리에서는 너의 흡성귀가 필요 없다.”
강휘가 낮게 말했다. 백무혼의 칼날이 강휘의 옆구리를 향해 꺾였지만, 강휘는 당한 검을 백무혼의 검보다 먼저 그가 손을 쓸 지점에 놓았다. 백무혼의 오른손 셋째 마디가 걸리는 소리가 다시 났다. 놀람에 힘을 주는 소리였다.
강휘는 자기 검으로 백무혼의 칼등을 누른 채, 그 힘을 타고 몸을 돌려 백무혼의 안쪽으로 검을 밀어 넣었다. 백무혼이 오른쪽으로 피했으나 강휘의 검끝이 왼쪽 가슴 위를 갈랐다. 천이 찢기는 소리는 무음진에 삼켜졌다. 피 냄새만 가까워졌다.
“거두면 그만입니다.”
백무혼이 물러나며 말했다. 그러나 도망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강휘는 그의 오른발이 물러나는 것을 다 알았다. 이내 다시 앞으로 나왔다. 강휘는 그 발소리를 기다렸단 듯 자기 검을 아래에서 위로 찔러 올렸다.
백무혼이 검로 막았다. 그러나 강휘는 뺄 수 없는 조임이었다. 백무혼의 검이 자기 목을 지키느라 올라간 그대로, 강휘는 자기 왼손으로 백무혼의 오른쪽 어깨를 밀었다. 몸이 밀리며 틈이 벌어졌다. 강휘는 그 틈에 검을 넣지 않았다.
검을 뺐다. 백무혼이 빈 검이 떨어지는 틈을 놓쳤다. 강휘는 반 걸음 물러서며 검을 가로로 그었다. 손아귀에서 쇠가 부딪지 않았다. 대신 칼날이 옷과 살을 지나는 진동이 손바닥을 탔다.
백무혼의 호흡이 멎었다. 강휘는 그 심박이 느려지는 것을 발바닥과 칼끝으로 알았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백무혼이 무릎을 꿇었다. 폐약창 안의 공기가 움직였지만 소리는 아직 없었다.
강휘는 백무혼 쪽으로 걸어가지 않았다. 거리를 세 걸음으로 묶어 두고도 손을 뻗으면 닿는 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검끝을 백무혼의 숨이 끊어지는 위치에 고정했다.
“스승을 그날, 왜 벴나.”
강휘가 물었다.
백무혼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소리는 없었다. 진동만 왔다.
“마지막 구결을 제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백무혼의 음성이 처음보다 낮고 짧았다.
“그대에게 주시려 했습니다.”
강휘는 대꾸하지 않았다.
“당신 스승은 죽는 순간까지 그 소리를 남기셨습니다. 제 것이 아닌 것을.”
백무혼의 심장 소리가 더 멀어졌다. 강휘는 손안의 점검표를 펼칠 수 없었다. 손에 쥔 칼부터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확정은 이미 끝나 있었다.
“네 이름은 백무혼.”
강휘가 말했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백무혼이 무릎을 세우려는 듯 움직였다. 강휘는 그 마디 소리를 다시 듣지 않았다. 바닥 진동이 커졌다가 가라앉았다. 백무혼이 폐약창 바닥에 완전히 쓰러졌다.
그 순간 귀가 열렸다. 무음진이 걷혔다. 폐약창 밖의 바람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 이슬이 풀잎에서 떨어지는 소리, 서리화의 바늘 몇 개가 침통 안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강휘는 백무혼에게 다가갔다. 두 걸음. 시신 앞에서 발을 멈추고 허리를 굽혀 손을 뻗었다. 백무혼의 손이 아니라 거기에 떨어진 거래 기록 반쪽이었다. 종이가 바닥의 흙을 먹어 축축했다.
“마지막이다.”
강휘가 다시 말했다. 점검표는 품속에 있었다. 손이 젖지 않게 기록 반쪽을 접어 허리춤에 넣었다.
서리화가 먼저 일어났다. 석대의 지혈을 마친 손이었다. 강휘는 그 발소리로도 그녀가 어느 만큼 다가오는지 알았다.
“숨이 끊어졌나.”
강휘가 물었다. 질문이 아니었다.
서리화가 시신의 목 옆에 손을 대는 소리가 났다. 잠깐 뒤 그녀가 말했다.
“끊어졌어요.”
석대가 기둥을 짚고 일어나려는 소리가 들렸다. 강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석아. 네 조카 이름이다.”
석대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 아이를 마지막에 어디에 두는지, 백무혼은 말하지 않았다.”
강휘가 검을 씻지 않고 집에 꽂았다.
“시신을 수색하면 인질의 위치가 나올 것이다. 서둘러라.”
바람이 폐약창 안으로 들어왔다. 약재 썩은 냄새와 피 냄새가 함께 실려 갔다. 바깥은 어두웠고, 새벽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2
흡성귀가 걷히자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폐약창 안은 이미 조용했다. 백무혼의 몸은 중앙에 무릎 꿇은 자세로 멎어 있었고, 강휘의 검은 그 가슴께를 떠나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서리화가 먼저 일어섰다. 석대의 어깨를 지혈하던 손을 거두고 약재 보관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쪽에 있어요. 숨소리가 짧게 끊겨요.”
강휘는 듣지 못했지만 바닥 떨림은 남아 있었다. 서리화가 보관실 문고리를 틀자 쇠가 한 번 굴렀다. 이내 나무 문이 안쪽으로 밀렸다.
석연은 약재 선반 밑에 묶여 있었다. 두 손이 등 뒤로 돌아가고 발목은 선반 기둥에 한데 묶였다. 서리화가 허리춤의 약재 가위를 뽑아 끈을 끊자, 아이의 숨이 겹으로 쏟아졌다.
“괜찮아요. 이제 움직여도 돼요.”
서리화가 낮게 말했다. 석연은 곧바로 일어서지 못하고 무릎부터 땅에 대고 몸을 돌렸다. 서리화가 아이의 손목을 짚어 맥을 보았다. 손끝이 차지 않았다.
“삼촌, 여기 와서 안아 주세요.”
석대가 왼쪽 어깨를 움츠린 채 보관실 문간으로 다가왔다. 발소리가 한 번 끌렸다.
“석아.”
석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둘 사이 반 걸음에서 석대가 무릎을 꿇었다. 부상당한 어깨 쪽이 먼저 기울었다.
“다리 풀렸나 보구나. 좀 앉아 있어라.”
석대가 아이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석연이 파르르 입술을 열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서리화가 아이의 등과 손목을 살피며 석대에게 물었다.
“여기, 백무혼이 뺏어 간 반쪽이 보관실에 있을 거예요. 보이나요?”
석대가 고개를 들었다. 보관실 안쪽 구석, 약재 궤짝 위에 납작한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습기가 배어 끝이 살짝 말려 있었다.
“저기 있소.”
석대가 일어나 종이를 집었다. 서리화가 내밀도록 하지 않고 먼저 품 속에서 반쪽을 꺼냈다. 두 손이 아닌 석대의 오른손이 종이를 받쳐 들었고, 서리화가 자기 반쪽을 그 옆에 포갰다.
찢긴 면이 맞물렸다. 오른쪽 위 문자 ‘백’ 자가 이어지고, 마지막 행의 ‘명이초’ 석 자가 반으로 갈라졌다 붙었다. 서리화가 손바닥을 종이 위에 가볍게 눌렀다.
“서진악. 백무혼. 명이초. 세 이름이 한 줄에 붙어요.”
석대가 종이를 건네며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이제 두 쪽 다 필요한 일은 끝난 거 아니오.”
서리화는 접지 않았다. 종이 두 장을 결대로 모아 옷깃 안쪽에 밀어 넣었다.
“먼저 밖으로 나가요. 날이 밝기 전에 정리부터 해야죠.”
서리화가 석연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아이는 몇 걸음 절뚝였지만 혼자 걸었다. 석대가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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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을 무렵, 폐약창 앞마당은 푸르스름했다. 안개는 걷히지 않았지만 발밑 풀잎에 이슬이 번들거렸다.
강휘가 앞마당 한가운데 섰다. 뒤로 폐약창 입구가 열려 있었고, 그 안쪽 백무혼의 몸은 서지도 눕지도 않은 채 기둥에 기대어 고개를 떨군 형태로 남아 있었다.
강휘는 검집에서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허리띠 속에서 접힌 복수 점검표를 꺼냈다. 세 겹으로 접힌 종이가 손끝에서 펴졌다.
스승의 이름 아래, 첫 이름은 이미 그어져 있었다. 두 번째도. 강휘는 마지막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칼끝이 아니라 검집 끝으로 종이를 받치고, 다른 손의 검지로 백무혼의 이름을 한 획씩 눌러 지웠다.
종이에는 이름이 남고 그 위로 깊은 금이 갔다. 강휘는 점검표를 다시 접어 품에 넣었다.
“이걸로 끝이다.”
강휘가 혼자 말했다.
서리화가 석연의 손을 잡고 앞마당으로 나왔다. 석대도 따라 나왔다. 서리화가 강휘 쪽으로 걸어오다 멈췄다.
“마지막 구결. 백무혼이 남긴 것, 강휘 씨는 들었어요?”
강휘는 기억을 더듬지 않았다. 무음진이 무너지기 직전, 백무혼이 뽑은 검에서 들린 소리와 스승의 주의적 한 조각. 그 두 소리가 합쳐져 마지막 구절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강휘가 읊었다.
“소리가 없어도 남는 사람의 박동을 읽어라.”
강휘의 목소리가 안개 속으로 번졌다.
“그게 스승이 나한테 주려고 한 구결이었다. 백무혼은 그걸 소리 지배로만 읽었다.”
서리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연이 손을 놓지 않은 채 서리화의 소매를 쥐었다.
“사람을 읽는 계승이네요. 소리를 지배하는 법이 아니라.”
서리화의 말에 강휘가 검을 반 뼘 뽑았다. 찬 검날이 안개에 젖었다.
“나는 계속 이렇게 걷는다. 눈 대신 소리로.”
강휘는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쇠가 검집에 닿는 소리가 마당에 가볍게 남았다.
석대가 주판을 품에서 꺼내 석연에게 들려주지 않고 손에 쥔 채로 서 있었다. 알이 몇 번 흔들렸다. 아이는 삼촌의 겉옷 한쪽을 잡았다.
서리화가 걸어가다 뒤돌았다. 저 멀리 서문 쪽으로 길이 낮게 깔려 있었다. 안개가 옅어지고 있었다.
“약방 문패를 세우려면 아직 갈 길은 남았네요.”
강휘가 한 걸음 먼저 걸었다. 두 사람이 따른다. 폐약창은 뒤로 멀어졌다. 바람이 불자 약재 타는 냄새가 한 번 살아났다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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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약창 앞마당에 다시 서서, 서리화가 품에서 약방 문패를 꺼냈다. 이 작품을 떠나는 자리에서 그녀는 손끝으로 문패의 귀퉁이를 쓸고, 석연에게 쥐게 했다.
“네가 이거 잡아 줘요. 문패는 사람 손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석연이 문패를 두 손으로 받았다. 서리화가 아이의 손등을 한 번 두드렸다. 약방 문패의 글씨는 젖어 보였다. 아직 아무 문에도 걸리지 않은 기울지 않은 나무였다.
강휘가 앞마당에서 검으로 점검표의 마지막 이름을 한 번 더 긋지 않았다. 이미 다 지웠다. 그는 그 위에 서서 입구를 등졌다.
“간다.”
강휘가 짧게 말했다.
서리화가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네. 해 뜨기 전에 한 리만 더 가요.”
세 사람과 아이가 앞마당을 떠났다. 아직 날은 완전히 밝지 않았다. 강휘의 흰 무명 안대만 안개 속에서 한 번 움직였다. 땅은 어제보다 조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