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독살된 황후는 즉위식 아침을 다시 산다

5화

대관식은 취소할 수 없다. 리에나는 그 판단으로 발을 옮겼다. 새벽 공기가 채 걷히지 않은 성화 앞 통로에 병사들의 장화 소리가 겹쳤다.

레오니드가 한 걸음 앞서 걸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르가노 일행은 귀족원 쪽 문으로 먼저 들어갔습니다. 대관식장 동선은 통제했습니다.”

“축배 잔은 누가 지키고 있지.”

“근위대 셋이 잔을 두고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리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랑 끝에서 새벽빛이 돌바닥에 비스듬히 깔렸다. 어제 접수증을 받아 품에 넣은 그 자리가 걷는 동안 두어 번 눌렸지만 손으로 만지지 않았다.

성화 앞에는 길게 늘어선 의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대관을 보러 온 귀족들은 맨 앞자리부터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하객들의 옷자락과 낮은 대화가 공기 속에 포개졌다.

리에나가 성화에서 세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섰다. 곧 하얀 대관 예복 자락이 밟히지 않도록 치마를 반쯤 옆으로 접었다. 향로의 연기가 성화 주변을 한 겹 돌고 있었다.

“황후께서는 대관 전까지 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임시 신분이신 만큼 의례 순서를 어기시면 자격에 문제가 될 수 있어요.”

뒤에서 오르가노 백작부인이 다가왔다. 은빛 섞인 금발을 낮게 틀어 올린 머리 위로 검은 레이스가 얇게 흔들렸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발걸음은 리에나의 예복 자락을 밟을 만큼 가까이 붙었다.

“검증을 받겠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대관은 뒤로 미루는 것이 온당합니다.”

리에나는 몸을 돌려 백작부인을 마주 보았다.

“대관을 미루는 것은 황제의 권한입니다. 백작부인이 정하실 일이 아니에요.”

“귀족원 청원이 접수되었고, 황후께서 대관식장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도 오늘 회합 전에 모였습니다. 여러 원로께서 그리 전하셨습니다.”

리에나는 웃지 않았다. 시선을 오르가노의 손에 두었다. 검은 부채는 들고 있지 않았다.

“그 원로분들이 이 자리에서 직접 말씀하시는지 보죠.”

오르가노가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임시 신분으로 그렇게 오래 버티시면 결국 손해는 황후께 돌아갑니다.”

“오늘은 제가 손해를 볼 일이 없어요. 이제부터 증거를 꺼내죠.”

리에나가 성화 왼쪽 증거대 쪽을 보았다. 이안이 서 있었다. 검은 천이 덮인 증거 궤 위에 봉인 상자 네 개가 놓여 있었고, 서기 두 명이 그 옆에 도장함을 열어 두었다.

“공개 검증입니다. 성화 기름 보관함의 은제 천 조각과, 왕실 독각 기록 원본을 먼저 보여 드리세요.”

이안이 첫 번째 상자를 열었다. 보라색 봉인 밀랍이 부서지는 소리가 자리까지 들렸다. 안에서 유리병 하나가 나왔다. 병 안에 든 천 조각은 옅은 녹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성화 기름 보관함 안에서 회수된 천 조각입니다. 은린향에 장시간 닿아 은제 천이 푸르게 변색했어요.”

이안이 다시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낡은 가죽 장정의 기록첩이 나왔다. 표지에는 왕실 독각 관리소의 도장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모레노 가문의 옛 하인이 은린향 제조자로 적힌 원본입니다.”

관객석에서 웅성임이 퍼졌다. 귀족들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성화 쪽을 보았다. 오르가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독각 기록이라면 그동안 대출 장부에도 없던 것인데, 출처가 참 묘하군요. 성물고를 수색한 쪽이 미리 그곳에 넣어 두었을 가능성은 배제하셨는지요.”

리에나는 증거대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자갈 하나 없는 매끄러운 돌바닥 위에 예복 자락이 먼저 닿았다.

“그 가능성은 기록첩의 관리 흔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같은 성물고에서 백작부인의 부채가 나왔죠.”

백작부인의 눈이 처음으로 좁아졌다.

“부채요.”

“검은 자개를 두른 부채, 제단에서 손에 쥐고 계시던 것과 한 쌍으로 보이는 물건이요.”

이안이 세 번째 상자를 열어 부채를 보이자 오르가노가 한 발짝 물러섰다. 관객석 앞줄의 늙은 귀족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그 부채는 백작부인의 의장구가 아닙니까.”

“의장구라면 더 의문이죠. 제단 기름 보관함과 같은 향이 부채 안쪽에서 검출됐어요.”

오르가노가 입술을 열려다 세 번째 줄 쪽을 흘겨보았다. 그 시선 끝에서 근위대가 한 사람을 부축해 대관식장으로 들이고 있었다.

세라핀이었다. 청색 시녀 드레스 앞섶에 옅은 먼지가 묻어 있었고, 금발은 반쯤 풀린 채였다. 리에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증인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세라핀이 걸음을 멈추고 오르가노를 피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안이 성화 계단을 내려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세라핀. 누가 잔을 닦으라고 했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요.”

세라핀의 어깨가 얕게 들썩였다. 그녀는 두 번 침을 삼킨 뒤 대답했다.

“백작부인께서… 저에게 직접 말씀하셨어요. 황후께 올라갈 물잔을 받아서 안쪽을 닦으라고요.”

“무엇으로 닦으라는 말이었나.”

리에나가 되물었다. 세라핀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목소리에 떨림이 붙으면서도 말은 빨라졌다.

“작고 납작한 유리병을 주셨는데, 아무 냄새도 안 났어요. 그걸 천에 묻혀서 잔 안쪽을 두 번 닦았어요, 두 번이요.”

오르가노가 부채를 들어 관자놀이 쪽을 한 번 두드리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췄다. 부채는 이제 증거대 위에 있었다. 그녀는 빈 손을 목 앞에서 내렸다.

“궁녀가 궁에서 자길 지키려고 꾸며낼 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요. 가족 이야기는 늘 거짓 증언의 등불이니까요.”

세라핀이 잠시 입을 닫았다. 이안이 봉인 상자에서 작은 은제 접시를 꺼냈다. 그 위에는 손톱만 한 은린향 잔여물이 밀랍지 안에 눌려 있었다.

“기름 보관함 마개 아래에서 떨어진 세라핀의 오른손 새끼손톱 조각입니다. 은제 시약에 닿아 반응했어요. 황후를 독살하려 한 물건을 제단에 심을 때 떨어져 나간 증거입니다.”

리에나가 세라핀 쪽으로 걸어갔다.

“가족을 지키려 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 명령을 거절하지 못한 거고요.”

세라핀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녀는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오빠가 이번 마상 시합에 나가게 됐을 때부터 편지가 왔어요. 제가 말을 들으면 가족은 무사하다고요. 한 번만 잔을 닦으면 끝이라고.”

말이 갈라졌다. 근처의 귀족 하나가 낮게 탄식했다. 세라핀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무릎을 조금 굽혔다.

“황후께 올린 물잔은 겉으로 검사가 끝난 뒤였고, 저는 그 뒤에 안쪽만 닦았어요. 부엌 하녀가 물잔 조각을 들고 죽은 것도 그 때문에…”

“그건 그때 못한 일이지. 오늘은 마지막에 막으면 되는 거야.”

리에나의 말이 닿자 세라핀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뺨에 반쯤 번졌지만 울음소리는 내지 않았다.

의례 복을 입은 시종이 성화 오른편에서 잔을 받쳐 든 채 다가왔다. 축배용 은잔을 황제 앞 나지막한 받침대 위에 내려놓고 물러났다. 오르가노가 그 동선을 따라 몸을 틀었다.

“황후께서 증거를 능숙하게 흔드시는 동안 의식은 계속되고 있군요. 대관은 하지 못하셔도 축배는 임시 신분으로도 받을 수 있으니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는 시늉을 하며 은잔 쪽으로 두 걸음 걸었다. 길고 진한 향수 냄새가 리에나의 코끝에 닿았다. 오르가노의 왼쪽 손목이 잔 뒤로 사라졌다.

순간 리에나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대관 예복이 끌리지 않게 옆으로 걷어 올리면서 두 걸음을 좁혔다. 오르가노의 손가락이 손수건에 감춘 작은 유리병을 기울이기 직전, 리에나가 잔이 놓인 받침대를 걷어찼다.

은잔이 높이 뒤집히며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액체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성화를 등지고 있던 이안이 다급히 은제 시약 접시를 꺼냈다.

“뿌리지 마. 여기 대는 것만으로 충분해.”

리에나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안이 접시를 바닥의 액체에 가까이 대자 닿기 전부터 물기 있는 자리가 푸르게 번졌다. 은제 접시 가장자리까지 연한 푸른색이 올라왔다.

“은린향입니다. 황제 폐하의 축배 잔에 섞여 있었습니다.”

레오니드가 검을 빼지 않은 채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백작부인. 물러서십시오.”

오르가노가 굳은 얼굴로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유리병은 손에서 빠져 옆으로 굴렀다. 그 안에 남은 액체가 한 방울 병 입구에 맺혔다.

“이것은 누군가가 제게 쥐여 준 것입니다. 의식의 혼란을 틈탄 모략일 뿐이라고요.”

두 좌석에서 귀족원 인사들이 일어났다. 앞줄의 백발 귀족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한 번 짚었다.

“나는 백작부인이 은잔 뒤로 손을 움직이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보았소.”

다른 귀족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손수건을 든 손이 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도 함께 보았습니다.”

레오니드가 두 병사에게 눈짓했다. 병사들이 오르가노의 양옆으로 붙었고, 레오니드는 검을 뽑지 않은 채 그 앞에 섰다.

“근위대장으로서 반역죄의 현행을 선언합니다. 백작부인 일행은 모레노 가문의 인질 관련 진술까지 안고 재판에 넘겨질 것입니다.”

오르가노는 뒤로 물러서며 부채를 찾았다. 허리춤의 부채 고리가 비어 있었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한 번 긁고 내려왔다.

“황제께서 오늘 아침을 그리 간단히 여실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 아침이 왜 남의 설득을 기다릴 날로 보이지. 여기서는 이미 끝났고 너는 이제 재판을 받아.”

칼리안이 성화 오른편에서 내려왔다. 검은 군복 위에 금술이 흔들렸다. 리에나는 그가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몰랐다. 다만 무릎 위로 파편이 튀기 전에 그가 반 걸음 다가서 있었다는 것만 보였다.

레오니드가 오르가노의 손목을 넘겨 포박했지만, 칼리안은 그쪽을 더 보지 않았다. 시선이 리에나의 옆얼굴에 닿았다.

“대관을 진행한다.”

사회관이 놀라 성화 계단을 올랐다. 두 귀족원은 서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두 걸음 좌우로 물러섰다. 이안이 봉인 상자를 닫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세라핀은 근위대가 건넨 겉옷을 어깨에 두른 채 아래쪽 서 있었다.

성화 쪽으로 눕힌 빛이 길어졌다. 리에나는 대관 예복의 앞자락을 다시 폈다. 축배 잔이 떨어졌던 자리의 액체는 증거 보관 요원들이 유리병에 옮겨 담으며 낮게 말했다.

“곧 아르젠트 성화 앞에서 대관 예식을 거행합니다. 황후께서는 성화 정면으로 올라서십시오.”

리에나가 걸음을 옮겼다. 바람 한 점 없이 성화의 불꽃이 서 있었다. 그 앞에 서자 두 손끝에 열이 오른 건지 화염의 온도인지 가려지지 않았다. 전생에도 이 자리에 섰었다. 그때는 시야가 안쪽으로만 좁아져 성화의 금속 테두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흐렸다.

지금은 달랐다. 성화 받침대의 은장식, 그 옆 증거 궤, 관객석 뒤로 근위대의 창끝이 움직이는 모습까지 한눈에 보였다.

이 시간선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머리가 아니라 손끝에 내려앉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그런 장치가 이제 불필요하다는 자각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에게 관을 씌우십니다.”

칼리안이 대관을 들어 리에나의 이마 위로 내려놓았다. 금속의 무게가 앞머리에서부터 정수리로 퍼졌다.

“황후 벨루아의 대관을 완료했소.”

누군가 손뼉을 쳤고, 그게 관객석으로 번졌다. 칼리안은 손을 내리지 않고 리에나의 팔꿈치를 가볍게 짚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하지.”

“말해요.”

“내가 정보를 먼저 보낸 일, 네가 그걸 믿기로 한 건 아까로 끝난 일이지.”

“끝났어요. 이제는 당신이 미리 움직인 이유를 재고 싶지 않아요.”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관식장 한켠으로 근위대가 오르가노 일파를 끌고 나가는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이안이 마지막 봉인을 확인하며 증거 궤를 닫았고, 세라핀은 벽 쪽 의자에 앉아 두 손을 겹치고 있었다.

리에나는 칼리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관의 무게 때문에 고개를 크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에는 거래가 아니라 내가 믿기로 했어요.”

칼리안의 눈이 성화빛을 받아 붉게 젖었다. 한 손을 들어 관객들이 남긴 부채꼴 자리에 서서 리에나의 손등을 받쳐 올렸다. 입술이 손등 위에 닿는 시간은 짧았다.

“그 믿음을 오래 지키겠습니다.”

그가 몸을 일으켜도 손등의 온기는 남아 있었다. 세라핀이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고, 이안이 사본 한 권을 품에 넣으며 안쪽으로 걸어왔다. 레오니드가 성화 앞을 한 번 돌아보고 회랑으로 나갔다.

리에나는 성화를 바라보았다. 불꽃은 황제의 검은 옷자락에 잠깐 번졌다가 다시 반듯하게 섰다. 대관은 끝났고, 더는 아르젠트 성화에 닿아 되돌릴 밤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 일을 상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언젠가 섰을 자리를 떠날 수 있게 율동처럼 심장이 차분히 뛰었다.

독살된 황후는 즉위식 아침을 다시 산다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