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급 감정사의 진짜 가격
5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차민규가 순순히 물러날 거라 본 건 아니다.
국가유물관리국 공개 감정장은 오전부터 공조가 켜져 있었다. 흰 광원이 중앙 감정대를 비추고, 참관석 너머로 관계자 여럿이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한도윤은 조끼 안주머니의 승급증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의 끝이 약간 올라와 있었다.
서아린이 옆자리에서 금고 기록 사본을 케이스째 내려놓았다.
“개설 조건은 공개 감정 참여인 등록이에요. 데이터 칩은 제가 들고 있고요.”
백훈은 한 걸음 뒤에서 각성 단검을 천에 싼 채 들고 있었다. 칼자국 난 턱선이 조명 아래서 더 길어 보였다.
차민규가 저쪽 출입구에서 들어왔다.
공개 감정장 바닥을 가로질러 중앙 감정대 근처까지 왔다. 손에는 접촉 사고 기록 출력물이 들려 있었다.
“잠깐. 이 감정은 열면 안 되는 거야.”
임지완 조사관이 감정대 반대편에서 팔짱을 풀었다.
“개방 신청도 아닙니다. 공개 감정 절차예요.”
차민규가 출력물을 감정대 위에 펼쳤다.
“맹목이야. 폐인, 실종. 접촉자 전원 사고 기록이 있다고. 이걸 개방 위험으로 보지 않는 건 무책임한 거야.”
차민규의 손이 출력물 모서리를 짚었다. 흰 종이가 조명에 반사됐다.
“관리국에서 압수해야지. 절차가 어떻게 되든 이 물건은 국가 봉인 유물이야.”
임지완이 한도윤을 돌아봤다.
“어제 통보받은 임시 승급. 지금 유효합니까.”
“유효합니다.”
한도윤이 승급증을 꺼내 반쯤 펼쳤다. 차민규가 그것을 보자 숨을 들이켰다.
뭐야, 저게?
“진명 감정사 임시 승급. 규정상 S급 유물 공개 감정에 참여할 수 있죠.”
서아린이 스마트패드에서 참여 조건을 띄웠다.
“개설 조건은 동일해요. 위탁자 동의, 보호 결계, 비개방 검증.”
강유진이 참관석 쪽에서 몸을 내밀었다. 와인색 상의가 의자 등받이에 눌렸다.
“임시 승급 코드가 공개 감정 목록에 잡혔어요! 진명 확인 문구까지요. 화면 공유할게요!”
강유진의 스마트패드가 공유 신호를 보냈고, 감정장 벽면 보조 화면에 승인 문구가 떠올랐다.
차민규의 얼굴이 화면을 향해 돌아갔다.
“이거 이의 있으면 서면으로 내면 돼. 지금 당장 감정을 못 막는 건 아니고——”
“막으시려면 근거가 필요해요.”
서아린이 말을 잘랐다.
“입참권 부정은 규정에 없어요.”
차민규가 어금니를 물었다.
저게 진짜라고?
임지완은 보조 단말을 두드려 압수 보류를 입력했다.
“접촉 사고 기록은 감정 중단 사유가 아니라 절차 통제 사유로 봅니다. 압수는 보류하고, 공개 감정을 승인합니다.”
차민규가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완전히 나가지는 않았다. 참관석 첫 줄 옆에 서서 감정대를 노려봤다.
한도윤은 감정대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왼쪽 소매가 감정대 모서리에 스쳤다.
화상 흉터가 있는 자리가 붉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또 반응한다.’
“봉인 파편을 비개방 상태로. 단검을 그 우측에.”
임지완이 감정대 위 손가락으로 각도를 지정했다.
백훈이 천을 벗겨 각성 단검을 받침대에 눕혔다. 날에는 어젯밤보다 더 짙은 흔적이 어른거렸다.
“공명 위치, 지금 한도윤 씨가 나침반을 잡는 순간부터 기록합니다.”
서아린이 기록 장치를 켰다.
봉인 파편은 감정대 중앙의 반구형 결계 안에 있었다. 손바닥 절반 크기. 검푸른 결정면이 공조 아래서 숨 쉬듯 희미하게 밝아졌다 꺼졌다.
한도윤은 깨진 나침반을 봉인 파편과 각성 단검 사이에 내려놓았다.
놋쇠 몸체가 감정대에 닿자 열이 올라왔다.
파편의 결계가 한 번 뒤틀렸다.
공명을 되받아치는 파동이 감정대를 타고 번졌다.
한도윤의 왼쪽 팔뚝이 떨렸다. 소매 아래, 화상 흉터가 붉게 솟아올랐다.
통증이 아니었다.
그보다 뜨거운 신호가 팔을 따라 올라 목덜미에 닿았다.
단검이 과열됐다. 받침대의 온도 표시등이 노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뛰었다. 백훈이 앞으로 나서려다 멈췄다.
“뭐야, 저거. 칼이 지 혼자——”
타악.
단검 받침대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건…… 반응이 아니야.’
이게 무슨 소리야.
“물러나세요.”
한도윤은 단검을 보지 않았다. 나침반 바늘이 파편 쪽을 가리킨 채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파편의 결계 안쪽이 붉게 물들었다.
“개방하지 말 것.”
결정면은 갈라지지 않았다.
가장자리만 밝아졌을 뿐.
공조 빛과 무관한 색이 감정대 위로 퍼졌다.
결계 밖으로 신호가 한 줄 새어 나왔다. 임지완이 안전 수치 화면을 확인했다.
“안전치는 상승 중. 감정 유지.”
“S급 감응이에요.”
한도윤이 나침반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몸체가 달아올라 손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열었을 때 반응이 아니라 닫힌 상태에서 나오는 신호요.”
임지완이 고개를 들었다.
“개방 없이 상위 등급 감응을 증명하는 겁니까.”
“예. 나침반이 파편을 안정체로 읽습니다.”
화면의 그래프가 한 단계 치솟았다.
이 정도라고?
임지완이 감정 중단 명령을 거뒀다.
“S급 감응 안정체 판정, 현장 기록으로 고시합니다. 봉인 파편 보호 등급 전환.”
차민규가 스마트패드를 들어올렸다. 손이 위아래로 서툴게 움직였다.
그가 무언가를 입력하기 전에 서아린이 기록 장치 앞으로 나섰다.
“저는 봉인 유물명을 호출하겠어요.”
서아린이 유물명 데이터 칩을 기록 장치에 꽂았다.
첫 호출음이 짧게 울렸다.
잠금 화면이 떴다. 흰 사각형 하나가 반짝이고는…… 더는 반응하지 않았다.
“정식 유물명을 입력하세요. 호출명으로는 잠금이 해제되지 않습니다.”
서아린이 장갑 낀 손가락으로 입력창에 문자를 눌렀다. 한 글자씩, 천천히. 마지막 한 글자는 두 번 눌렀다.
두 번째 호출음.
기억 기록이 열렸다.
보조 화면에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고, 접촉자 이름이 같은 줄에 떠올랐다.
마지막 접촉 시각. 사고 등급.
짧은 두 줄의 접촉 기록.
서아린이 화면을 올려다봤다.
왼손이 기록 장치 옆을 짚었다. 검은 장갯바닥이 받침대에 붙었다.
화면에 재생 표시가 돌았다.
서아린이 데이터 칩을 향해 손을 뻗다가 그대로 멈췄다.
칩이…… 기록 장치에서 빠져 그녀의 손아귀에 있다.
이내 손이 떨어졌다.
칩이 바닥에 부딪혀 금속음을 냈다.
“기록 정지.”
임지완이 말했다.
“추가 열람은 여기까지입니다.”
서아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에서 마지막 접촉 시각이 사라졌다. 그녀는 몇 초 더 허리를 세운 채 서 있었다.
“어머니가 이 물건을 만졌어요.”
“확인됐어요.”
한도윤이 나침반을 감쌌다. 몸체의 열이 손바닥 안에서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
이건 파편 반응이 아니야.
“이 기록은 관리국으로 넘기죠.”
서아린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네. 사본은 이제 임지완 조사관이 가져갑니다.”
그녀의 목소리엔 떨림이 없었다.
그러나 장갑 낀 손이 케이스 잠금을 푸는 데 두 번 실패했다.
차민규가 결국 참관석 앞으로 나왔다. 어깨가 평소보다 올라가 있었다.
“좋아. 봉인 파편이 안정 판정 났으니, 내가 여기 끼어들 필요는 없겠지. 관리 절차는——”
“아직 안 끝났어요.”
서아린이 케이스에서 금고 기록 사본을 꺼냈다.
종이 묶음이 감정대 옆 문서 거치대에 눌렸다.
“공개 로그하고 대조하죠. 3년 전 폐기 건으로요.”
임지완이 스마트패드로 공개 로그를 호출했다. 화면에 은폐 고유번호가 차례대로 정렬됐다.
첫 번째 기록부터 서너 건이 겹치지 않았다.
어긋난다고?
당일 로그와 금고 기록의 은폐 고유번호가 어긋나는 곳마다 화면에 붉은 표시가 붙었다.
차민규가 화면을 보며 손을 휘저었다.
“그건 폐기가 아니라 시정 조치였어.”
조용해졌다.
강유진이 공시를 꺼내려던 손을 멈췄다.
……시정 조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서아린이 물었다.
차민규가 옷깃을 만지다가 다시 화면을 봤다.
붉은 표시가 여섯 개였다.
“출고가 잘못돼서 바로잡은 거야. 조작한 게 아니라——”
“시정 조치였다고 지금 말씀하셨어요.”
“시끄러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네가 뭘 알아?”
“폐기 건이 원래 폐기면 시정이 필요 없어요.”
한도윤이 끼어들었다.
나침반의 열이 손바닥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한도윤은 알았다.
이건…… 단순한 기록 오류가 아니다.
“은폐 고유번호가 당일 로그에서 어긋나요. 차민규 팀장, 그거 아니고.”
차민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이건 다 네놈들이 공모해서 만든 판이야——”
“서명 불일치도 나왔고 시정 조치 이야기도 나왔으니, 경위는 조사에서 밝히면 됩니다.”
임지완이 보안요원에게 손짓했다.
차민규가 스마트패드를 집어 참관석 쪽으로 걸으려 했다. 보안요원 둘이 그의 앞을 막았다.
그가 뒷걸음질 치다 감정대 다리에 부딪혔다.
턱.
“내가 왜 보안 인계야. 관리국이 절차 압수할 땐 내가 협조 안 했나, 지금 와서——”
“성립된 기록에 대한 검증 조치입니다.”
임지완이 말했다.
한도윤은 승급증을 감정대 위에 폈다. 임지완이 스마트패드를 승급 기록 화면으로 돌렸다.
“진명 감정사 직인은 승급 기록에 올라갑니다. 오늘 고시에 준해서요.”
스마트패드에 직인이 찍혔다.
종이보다 먼저, 화면 속 인장이 선명하게 남았다.
강유진이 이제야 스마트패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감정장 안을 갈랐다.
“테이아 옥션 공시 떴어요! 등급 정지, 그리고 후발 재평가 전담 데스크 개설 예고요. 저 화면 공유할게요!”
보조 화면에 옥션 공시가 떠올랐다.
참관석에서 몸을 일으키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누군가 화면을 향해 조명을 비췄다.
공시 문구가 그 빛에 번졌다.
차민규가 보안요원 사이에 섰다. 한 손이 뒤로 돌아갔다.
“이거 놔. 내가 결재선에 있는 사람이야.”
보안요원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차민규의 숨이 거칠어졌다.
챙그랑.
금속 소리가 짧게 났다.
“인계해.”
임지완이 말했다.
차민규가 감정장 밖으로 끌려나갔다. 걸음이 비틀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도윤을 돌아보려다, 문턱에 걸려 몸이 앞으로 쏟릴 뻔했다.
지금……?
“오늘 판정은 모두 기록됐습니다. 감정 참여인 전원 서명하세요.”
안정체 관리 서류가 감정대 위로 올라왔다.
한도윤은 서류 첫 장에 성명 석 자를 썼다. 그 아래로 서아린이 서명했다.
백훈도 자신의 몫에 이름을 눌러썼다.
강유진이 합의문을 가져왔다. 테이아 옥션 로고가 찍힌 서류 두 장이었다.
“전담 데스크 개설 합의서요. 오늘 고시랑 직인으로 바로 개설할 수 있거든요. 저 여기 서명 자리예요!”
서아린이 장갑을 벗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합의문 위에서 잠시 멈췄다.
“서명할게요.”
그녀가 먼저 이름을 썼다. 강유진도 그 옆에 이름을 썼다.
한도윤은 감정대 가장자리에 나침반을 내려놓았다.
붉은 기는 거의 가신 상태였다. 바늘이 더 이상 파편 쪽을 가리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번, 놋쇠 몸체가 손바닥 온도를 빼앗아갔다.
……끝인가.
“이거 이제 제자리로.”
한도윤이 나침반을 집어 목에 걸었다. 왼쪽 소매를 내렸다.
화상 흉터는 옷 아래로 사라졌다.
임지완이 안정체 관리 서류에 직인을 찍었다.
“봉인 파편은 개방 없이 보호 등급 전환됐습니다. 관리 주체는 내일부터 국가유물관리국입니다.”
“오, 그거. 그거 좋은 거네.”
백훈이 단검을 챙기며 말했다. 단검의 열은 이미 식어 있었다.
서아린은 케이스를 닫았다. 그녀가 감정장 문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접촉 시각은 화면에서 사라진 뒤였다.
이제…… 어디로?
“내일부터 할 일이 꽤 많아요.”
서아린이 합의문을 들며 말했다.
“옥션 전담 데스크, 남부 감정소 정지 건, 기록 복구건.”
“천천히.”
한도윤이 감정대를 등졌다.
“증명은 이미 끝났으니까.”
그가 조끼 안주머니의 승급증을 한 번 더 눌렀다. 이제 종이의 모서리는 더는 날아오르지 않았다. 감정장 공조가 반쯤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