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장에서 시작한 S급 감정사
5화
이번엔 다를 줄 알았다.
“이거 내 경험인데. 단단히 각오하고 들어가실 걸.”
“그래도 들어간다.”
한도윤이 먼저 문을 밀었다.
공개 재감정장은 예상보다 넓었다. 중앙에 검은 석재 테이블. 주변을 둘러싼 열람 좌석.
진명호는 반대편에 서 있었다. 회색 관복풍 정장. 왼쪽 가슴에 국가유물관리국 휘장.
표정이 어젯밤보다 차분했다.
이미 수습을 끝냈다는 얼굴이었다.
탁자 위에는 작은 상자가 하나.
봉인된 진열 케이스였다.
진명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자리는 감정 불가 판정을 받은 국가 보유 유물의 재감정을 위한 자리입니다.”
목소리가 낮고 정확했다.
“원칙대로라면, 감정사 자격부터 검증되어야 합니다.”
진명호가 한도윤을 봤다.
“F급 감정사에게는 상위 유물 감정 권한이 없습니다.”
서예린이 반 박자 뒤에 받았다.
“오늘 안건을 먼저 올려 주세요.”
“안건은 제가 말씀드리죠.”
진명호가 진열 케이스를 가리켰다.
“국가유물관리국이 보관 중이던 봉인 유물입니다. 그동안 감정 불가로 분류돼 왔고, 오늘 재감정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한도윤은 케이스를 보자마자 조끼 안쪽을 눌렀다.
나침반이 조용했다.
……조용하다.
지난번 천하경매 검증장에서도 이랬다.
물건이 진짜일 때는 어땠더라.
이건 아니었다.
한도윤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가짜를 이 자리에 올리다니.
무슨 계산이지?
먼저 운영진 한 명이 절차 안내를 끝냈다. 열람 좌석에 앉은 감사팀이 기록을 켰다.
“감정사 본인의 의견부터 듣죠.”
진명호가 여전히 서 있었다.
“그 상자. 가짜야.”
한도윤이 테이블에서 두 걸음 떨어진 채 말했다.
장내가 잠깐 잦아들었다.
“감정 권한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진명호의 어투는 여전했다.
“권한이 아니라, 저게 좌표 밖에 있다는 겁니다.”
“그 근거는.”
“내 확대경과 나침반.”
한도윤은 나침반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손바닥만 한 계기판.
“이 유물은요——”
진명호가 한 걸음 다가서려 했다.
턱.
백진우가 어깨로 그 앞을 막았다.
“좌표를 보여 달라니까.”
백진우의 목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이걸 무슨 근거로.”
“이미 검증장 기록에 있어. 조각이 가리킨 좌표는 제7관측로 쪽이었어. 지금 그 케이스는 그 방향이 아니야.”
한도윤은 케이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이건 미끼다.”
진명호가 웃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손을 들어 부하 하나를 불렀다.
“감정사 자격이 없는 사람의 의견은 그냥 청취만 하면 됩니다.”
그 말에 운영진 쪽이 움찔했다.
아니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확인해 봐.”
한도윤이 백진우를 돌아봤다.
“검 케이스.”
……짧았다.
하지만 재감정장 전체가 그 소리를 들었다.
저게, 반응인가?
한도윤은 숨을 삼켰다.
백진우가 검을 뽑지 않은 채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내 검은 가짜한테 반응 안 해. 이거 지금 묻는 거야.”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상자, 진짜가 어디 있습니까.”
진명호가 처음으로 입술을 닫았다.
그 순간, 뒤쪽에 앉아 있던 강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기사님—— 아니, 국장님.”
강민석이 허리 옆 공구 주머니를 툭 쳤다.
“이건 내 경험인데, 저 케이스 바닥에 은색 선 같은 거 안 보인다.”
진명호 쪽이 움직였다.
서예린이 그 앞으로 끼어들었다.
“통보서 원본 대조 요청합니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어제 현장에서 돌던 통보서 사진과 오늘 제출된 재감정 안건 문서, 그리고 봉인 사고 보고서 원본. 세 개를 같이 올려 주세요.”
“지금 이 자리와 무슨——”
“기각하실 거면 국장님 직인부터 보여 주시죠.”
서예린이 한 발 더 갔다.
“직인 없는 문서로 감정 금지 표기도 빼고 압수하신 거잖아요. 오늘 그 직인이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
진명호가 태블릿을 만지작거렸다.
“재감정 안건에 그런 요청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포함하면 됩니다.”
대박이에요. 이 흐름…… 진짜 간다.
“지금 여기 계신 감사팀도 봐 주세요. 이거 진짜로 하는 거예요.”
‘보고서 수정분 원본 대조해라. 감사팀 제발.’
‘직인 없이 압수한 거 인정하면 끝임.’
‘공개 검증 가동됨. 끄면 조작 확정.’
오세라가 렌즈를 감사팀에게 돌렸다.
“이게 지금 밖에서 보는 사람들이에요.”
그때였다.
서류 모서리가 열렸다.
그 안에 ‘봉인 사고 보고서’ 겉장이 보였다.
어제 현장에서 봤던, 재작성본.
여기서 놓치면 안 돼.
한도윤은 그 서류를 보자마자 말했다.
“국장님. 그 보고서. 이쪽에 두고 가시죠.”
“열람 권한이 없습니다.”
“감사팀은 있습니다.”
한도윤이 감사팀 쪽을 봤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명호가 폴더를 품에 안았다.
그의 부하 하나가 재감정장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
그때 백진우가 먼저 움직였다.
느리지 않았다.
“증거 가지고 나갈 생각 마.”
백진우가 낮게 말했다.
“내 검 반응부터 확인해. 그게 먼저야.”
부하가 소리 없이 물러났다.
운영진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식 안내를 했다.
“공개 검증과 서류 대조를 승인합니다. 감사팀 기록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진행합니다.”
……됐다.
서예린이 곧바로 강민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국장님 서명은 있는데, 직인 자리가 백지야. 이거 내 경험인데, 서류가 이 모양으로 나가면 소각장에서도 안 받아 준다.”
이어서 서예린이 조각 표기 일치 기록을 폈다.
“어제 압수품에 붙은 표기는 국가 보유 유물 계열이었고, 오늘 안건의 유물 번호는 처음 보는 거예요.”
이건…… 오늘 끝까지 가겠군.
한도윤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진명호를 똑바로 봤다.
“번호가 다릅니다. 지금 올라온 건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할 물건이 아니에요.”
장내에서 첫 번째로 큰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도윤은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대신 나침반을 테이블 위에서 한 뼘 옆으로 밀었다.
바늘이 다시 남서쪽.
정확히 진명호가 품에 안은 폴더 쪽이었다.
“저기야.”
한도윤이 나침반을 손등으로 가리켰다.
“저 폴더 안에 진짜가 있어.”
진명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저 폴더 안이라고?
“압수품이 아니라 서류 폴더다. 근데 나침반은 방향이 아니라 깊이를 짚어. 그리고 이 거리에서 깊이는——”
한도윤이 한 걸음 다가섰다.
“국장님 품. 그다음이야.”
진명호가 팔로 폴더를 감쌌다.
“언어화하면 봉인 간섭이 약해집니다. 지금 여기서 그 물건의 이름을——”
“입에 올릴 생각 없어.”
한도윤이 말을 잘랐다.
“재분류 명칭만 말할 거야.”
그가 백진우를 봤다.
“검 케이스 반응. 어느 방향으로 남았는지 말해 줄래.”
“네 앞 폴더.”
“됐어.”
한도윤은 운영진에게 몸을 돌렸다.
“서류 폴더를 여는 것. 승인해 주세요.”
감사팀이 먼저 답했다.
“봉인 문서 열람 권한은 국장 본인에게 있습니다. 다만 지금 정황으로는 국장이 증거물을 소지한 채 퇴장을 시도했고, 방송과 현장 기록이 있으니 강제 열람 사유는 성립합니다.”
진명호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직인이 없으면 재감정은 불가능합니다. 그 원칙은 지금도——”
“그 직인.”
한도윤이 톤을 낮췄다.
“단순한 권한이 아니지.”
그가 나침반 옆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 안건에서 직인장이 봉인 간섭 장치와 연결돼 있으면, 재감정 자체를 막는 게 아니라 봉인을 건드리는 행위를 분리하는 거야.”
진명호의 눈가가 좁아졌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나침반이 가르쳐.”
한도윤은 폴더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 폴더 안. 봉인 간섭 장치가 같은 금속으로 감겨 있어. 폴더 테두리에 지금 은색 선이 올라왔어. 보여?”
그 순간 진명호가 마지막으로 몸을 빼려 했다.
오세라의 휴대폰이 그 동선을 따라 돌았다.
“여러분, 지금 이 화면——”
천하경매 직원 셋이 재빨리 진명호의 뒤를 막아섰다.
감사팀 두 명은 팔을 잡지 않고 양옆을 봉쇄했다.
“하.”
진명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국가 차원에서 봉인해 온 물건입니다. 경매장이 이렇게——”
“국가 차원에서 봉인했으면.”
강민석이 말을 받았다.
“직인부터 제대로 찍고, 감정 금지 물건이라고 쓰고, 보고서도 밤에 고치지 말았어야지.”
그는 폴더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가 열란다.”
진명호가 움직이지 않자, 감사팀이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
강제 제압이 아니라 호송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잠깐.”
한도윤이 끼어들었다.
“그 폴더. 직접 열게 하지 마.”
그는 운영진을 봤다.
“봉인 간섭 장치가 달려 있으면 손으로 여는 순간 반발이 와. 표면 온도부터 체크해야 해.”
손으로 열었다간……
경매장 직원이 열화상 스캐너를 갖고 왔다.
폴더 쪽으로 아무 말 없이 스캔을 돌렸다.
화면에 은회색 테두리가 보였다.
“여기.”
한도윤이 스캔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봉인 간섭 장치야. 재질이 백진우 씨 검과 같아.”
백진우가 대검 손잡이를 감아쥐었다.
“열어도 되나.”
“운영진 승인 후에.”
한도윤이 물러서며 자리를 만들었다.
케이스째 테이블 위에 올렸다.
공명이 났다.
쩌저적——
타는 냄새는 없었다.
그냥 봉인이 차례로 분리되는 소리였다.
틈이 벌어졌다.
진짜다.
“나침반.”
한도윤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었다.
나침반 바늘이 남서쪽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한도윤은 그 금속 조각을 집지 않았다.
고개만 숙였다.
“봉인 간섭 장치는 분리됐고, 지금 남은 실체는.”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C급 이상 헌터의 코어를 S급으로 재구성하는 물건. 사용 후 3일간 마나 역류가 와.”
이어서 분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S급 각성 촉매.”
장내가 환하게 밝아진 것 같았다.
[평가: 재분류 요청 접수. 감정사 의견 반영됨.] [상태: 봉인 간섭 장치 분리 확인. 실체 등급 상향 재분류 요청.] [권한 확인: 공개 재감정 기록 — 유효.]
진명호가 입을 열었다.
“S급 각성 촉매라도, 언어화가 이미——”
“이름을 낸 게 아니라, 효능을 기록한 거야.”
서예린이 정확하게 짚었다.
“지금 기록에 올라간 명칭은 감정사 재분류 용어예요. 봉인 이름이 아니고.”
그녀가 진명호를 봤다.
“국장님이 보호하려던 봉인 간섭 장치. 그게 직인 권한과 연결돼 있었던 거네요.”
진명호가 대답하지 못했다.
입만 떼었다 닫았다.
…… 거기까지였나.
“여러분…… 구속 인계 장면도 확인됐어요. 지금 절차 개편 얘기 나와요.”
화면 댓글이 다시 한꺼번에 쏟아졌다.
와.
운영진 대표가 테이블 정면으로 나와 문서를 펼쳤다.
“천하경매는 이번 재감정의 기록을 근거로, 국가유물관리국 감사팀에 진명호 국장을 인계합니다.”
“등급 기관의 직권은 감정권을 봉쇄하는 방식으로 행사될 수 없다.”
이어서 운영진이 한도윤 쪽으로 걸어왔다.
“한도윤 감정사님. 오늘 재분류 기록과 센서 검증장 결과, 공개 검증 기록을 종합했습니다.”
운영진이 흰 봉투를 내밀었다.
“감정사 재등급입니다. F급이 아니라.”
한도윤이 봉투를 받아 열었다.
공식 C급 감정사 재등급증.
이름, 등록 번호, 유효 일자.
그의 손목 아래로 옅은 잔상이 남았다.
C급.
이걸…… 이렇게 빨리?
한도윤은 그 증을 반으로 접어 조끼 안쪽에 넣었다.
깨진 나침반 옆자리였다.
“고맙다, 같은 소리 안 해.”
그가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했다.
“이제 폐기장 밭이나 갈아야지. 그런데 네가 거기 없으면 일이 안 끝난다.”
“끝났어.”
“아니, 이제 시작이라니까. 나야 그 땅 지키고 있을 테니.”
강민석이 등을 한 번 더 두드렸다.
백진우는 검을 케이스에 넣고 어깨에 걸었다.
“확실하네. 네 감정.”
그는 검 손잡이를 만지며 한 번 웃었다.
“이거랑 같은 재질이라면 나중에 한번 붙여 봐.”
서예린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빠 신경 써 주셔서…… 정식으로 계약에 남길게요.”
한도윤은 짧게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오세라가 조명 아래에서 카메라를 서서히 내렸다.
“여러분, 오늘 공개 재감정 여기까지예요. 조작 폭로부터 재분류까지——”
그녀는 휴대폰을 완전히 끄며 숨을 들이쉬었다.
“여러분이 이 절차를 움직였어요.”
운영진이 마지막으로 재감정 절차 개편을 선언했다.
“앞으로 감정 불가 판정 물건은 국장 직인 단독으로 재감정을 배제할 수 없으며, 독립 감사팀이 입회합니다.”
한도윤은 그 장면을 지켜봤다.
재등급증을 든 손이 아직도 조끼 안에 있었다.
나침반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제는 떨리지도, 흐려지지도 않았다.
바늘은 이번 사건의 좌표에 멈춘 채였다.
멀리서 감사팀이 진명호를 데리고 복도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재감정장은 잠시 고요해졌다.
한도윤은 일행을 돌아봤다.
“공동 감정소.”
서예린이 되물었다.
“지금이에요?”
“응. 조건은 내가 정할게.”
백진우가 웃었다.
“좋아, 인정.”
강민석은 못 들은 척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밭이나 관리한다니까……”
오세라가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대박이에요! 그거 방송 켜도 돼요?”
한도윤은 대답 대신 재감정장 정면의 기록 화면을 봤다.
됐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화면 속 좌표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번 사건을 한데 묶는 지점.
그것이 곧 다음 일의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