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손해사정사, 사기 확률이 보입니다

5화

노트 모서리가 책상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어젯밤 비상계단에서 정리한 판독 수치 노트. 내가 접어 넣은 것보다 두 장 정도 더 펼쳐져 있다.

누가 봤네.

이거…… 야근 추가다.

나는 노트를 집어 왼쪽 가슴 안주머니에 넣었다. 오전 여덟 시 십오 분. 공단 중앙심사장에서 열리는 30억 청구 심사까지 마흔오 분 남았다.

“서진우 씨, 자료 챙겼습니까?”

강하린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제와 같은 검은 정장 재킷인데 소매가 올라가 있었다. 왼쪽 손목시계가 형광등을 받아 반짝였다.

“실종자 명부 사본이랑 야적장 촬영 원본, 폐기 부품 접촉 기록까지. 다 챙겼습니다.”

“수치 노트는요.”

“여기 있습니다.”

가슴팍을 두 번 두드렸다.

강하린이 손목시계를 봤다.

“내일 심사 당일 아침 폐기. 그 말이 지금 제일 급합니다. 원본이 살아 있지 않으면 곽승표 제보도 무용지물이에요.”

“최 기자한테 연락은 닿습니까?”

“방금 통화했어요. 여차하면 성적서 사본부터 서류에 붙인다고요.”

그걸 심사장에서 빼낼 수 있으려면 절차가 먼저 열려야 한다.

아니, 잠깐.

그 전에 원본이 살아 있어야지.

나는 업무용 폰을 꺼냈다. 최예린에게서 온 문자 세 개.

‘곽승표가 말한 원본 폐기, 오늘 새벽에 미리 당겨졌을 가능성 있어요.’

‘원본 아직 문서보관실에 있대. 사람은 없고 보안요원만 남았대.’

‘심사장에서 탁문호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녹취 원본 확인할게요.’

세 번째 문자가 제일 무겁다.

탁문호는 어제 아침 차민구 뒤에서 공단 감사 안내 공문을 읽던 그 남자다.

그가 뭘 들고 있는지…… 거기서 갈린다.

강하린이 태블릿을 열어 CCTV 캡처 화면을 보여줬다.

“곽승표가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에 문서보관실 문 앞에 있었어요. 꺼진 형광등 복도에서 두 번 정도 문을 만졌고, 들어가진 않았어요. 보관실 안은 정확히 여섯 시에 열립니다.”

“지금은요.”

“심사장 쪽으로 이동 중이래요. 별관 출입증 받아서.”

오지석이 사무실 구석에서 일어났다.

“저, 저도 갑니다.”

목소리가 아침부터 갈라져 있었다.

강하린이 오지석을 봤다.

“헌터넷 생중계 계정 준비했습니까.”

“네. 오늘도야근 계정 비밀번호까지 바꿨어요.”

“대외 존대 잊지 말고요.”

“……네.”

밖에 나서자 공단 심사장 쪽 바람이 유난히 매웠다. 나는 노트를 한 번 더 만졌다.

손해사정사가 심사장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죽는 게 수치다.

거기서 못 버티면 다 사라진다.

성과급 0원이 아니라…… 전부 다.

공단 중앙심사장 로비는 천장이 높았다. 벽 한쪽에 감사 안내 전광판이 돌아가고 있었다.

접수 번호 끝자리만 봐도 보인다. 어제 그 반려 건이 따로 잡혀 있다.

“서진우 씨.”

차민구가 로비 중앙에서 먼저 손을 들었다.

옅은 회색 정장. 금장 커프스. 여유라고 쓰고 독기를 바른 미소.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는 좀 급하게 갔죠? 오늘은 제대로 좋게 생각합시다.”

“네, 국장님 말씀 따라서 제대로 하죠.”

강하린이 반 발짝 앞으로 섰다.

“차 국장님. 본심 앞에서 할 말은 우리 쪽에서 정리했습니다. 심사 들어가시죠.”

차민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 팀장은 지금 팀 배제가 공식 요청된 상태인데도 오셨네요. 절차라는 게, 아시다시피 그렇게 가볍지 않습니다. 거듭 좋게 생각합시다.”

“심사규정 제12조에 팀 배제 요청이 있어도 원소속 정당은 심사장에서 반대신청을 낼 수 있습니다. 근거는 어제 보낸 반대신청서에 넣었어요.”

차민구가 웃음을 거뒀다.

심사장 문이 열렸다.

탁문호가 안쪽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검은 양복. 무릎 위에 서류 가방 하나.

그 옆에 곽승표도 보였다. 흰 점퍼에 목이 짧은 남자.

복도에서 봤던 그 형광등 아래 사람이 맞다.

심사관이 자리를 잡자마자 차민구가 바로 손을 들었다.

“심사 시작 전에 증거배제 신청부터 내겠습니다. 사정팀이 제출한 판독 수치 관련 자료 전 건이요. 수치 산출 과정이 비공개이고, 오히려 조작 의혹이 먼저 제기된 상태라 서류 실수와 결합할 여지가 큽니다. 원본 증거로 다루기엔 절차 위반이 분명합니다.”

첫 수부터 지우고 들어온다.

이거…… 오늘 심사, 성과급 걱정할 때가 아니네.

심사관이 강하린을 봤다.

강하린이 태블릿을 켜서 규정 화면을 띄웠다.

“제12조 심사 참여 보장 조항에 따라 반대합니다. 증거배제는 절차 위반의 구체적 소명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제출된 건 의혹과 결합 추정이 전부입니다. 조작 의혹은 헌터넷 게시물에서만 확인되고요. 수치는 공단 제출 이력에서 사후 검증이 가능합니다. 근거가 없습니다.”

“잠깐, 강 팀장. 조작 의혹은 저희가 지어낸 게 아니에요. 외부에서 제기된 정황이 이미 캡처돼 있죠.”

“정황 캡처는 증거배제 사유가 아닙니다. 공단 접수 번호가 다른 것부터 짚고 넘어갑시다. 반려 건과 감사 안내의 번호가 어긋나요.”

접수 번호가…… 어긋난다고?

심사관이 서류를 두 장 넘겼다.

“반대신청 타당. 증거배제는 기각합니다. 사정팀 반대신청서는 심사 기록에 편입하겠습니다.”

차민구가 웃었지만 그 눈이 먼저 벽 쪽 시계를 쫓았다.

그 틈에 오지석이 자기 휴대폰을 들고 심사장 구석으로 갔다. 댓글 쓰듯 빠른 손놀림.

곧 헌터넷에 생중계 글이 열렸다.

[헌터넷 > 자유게시판] [생중계] 공단 중앙심사장 30억 청구 심사 현장

ㄴ [게이트뒷문] 또 조작이면 오늘 끝이다. ㄴ [오늘도야근] 아크베인 쪽 증거배제 신청 방금 기각. 내가 뭐랬냐. ㄴ [도끼질꾼] 제12조 반대신청이 들어간 모양인데, 이러면 원본 검증까지 간다.

강하린이 자리로 돌아오며 최예린에게 손짓했다.

복도에 대기 중이던 최예린이 심사장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카메라 가방 대신 서류 봉투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밤색 단발이 정리 없이 움직였다.

“증인 신청합니다. 아크베인 동력부 시험장 문서보관실 제보자 곽승표, 그리고 탁문호 님.”

차민구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보안심의 위반입니다. 기자가 심사장에서 증인을 데리고 들어오다니, 절차가 완전히 무너졌네요.”

“최예린 기자 신분이 문제라면, 증언이 먼저고 신분 확인은 그 뒤입니다. 보관 이력은 공단 기록 열람 권한으로 받았어요.”

탁문호가 서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동력부 시험 성적서.

두꺼운 A4 묶음에 푸른 원본 표식이 붙어 있었다.

원본이다.

곽승표가 일어서서 말했다.

“보관 일련번호 88번. 원본 표지에는 AEGIS-07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는 폐기 지시가 하달 되는 걸 보고 폐기 로그 하나만 남긴 겁니다.”

폐기 지시를 하달…….

심사관이 곽승표에게 물었다.

“폐기 지시를 누구에게서 받았습니까?”

곽승표가 차민구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자기 손목을 쥐었다.

차민구가 먼저 웃었다.

“내부 시험지일 뿐입니다. 보험이랑 관계없는 자료에요. 좋게 봐서 절차 논의는 여기서 접죠.”

최예린이 그 말에 수첩을 꺼냈다.

“탁문호 씨, 어제 아침 공단 감사 안내 공문 온 뒤에 들은 얘기 있죠. 그때 차 국장님이 뭐라고 했어요?”

탁문호가 목을 한 번 풀었다.

“성적서 원본이 심사 당일 아침에 폐기되게 하란 지시요. 녹취돼 있습니다.”

심사장이 조용해졌다.

폐기되게 하란 지시.

그게 지금 녹취로 나왔다.

차민구가 넥타이 매듭을 만졌다.

금장 커프스가 살짝 소리를 냈다.

심사관이 탁문호에게 손을 들었다.

“녹취 원본 제출하세요.”

최예린이 두 번째 봉투를 열었다. 녹취 파일이 담긴 USB. 곽승표에게 받은 것과는 다른 물건이다. 탁문호가 제출한 원본.

“심사 기록으로 채택하겠습니다. 성적서 원본과 보관 이력, 녹취 모두 증거로 등록합니다.”

서진우.

내 뒤통수가 따뜻해졌다.

이제 성적서 원본이 증거로 등록됐다.

그걸 만질 수 있다.

심사관이 나를 봤다.

“환경은 판독 접근권 보장해야지 않습니까. 원본 대조하시죠.”

강하린이 심사규정 조항을 다시 띄웠다.

차민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굳었다.

“그건 비공개 내부 추정일 뿐이지 않습니까. 접촉해서 뭘 확인하든 효력이 없는 자료에요.”

심사관이 증거 목록을 짚었다.

“등록된 원본입니다. 사정팀 접근권을 보장하세요.”

차민구가 주먹을 폈다 쥐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곽승표가 한 걸음 옆으로 와서 말했다.

“접촉 순서 상 심사 기록에 남게 하려면 제가 재실 확인하고 넘기는 게 맞아요. 여기 허가란에 서명할게요.”

그가 심사관에게 서명을 보이고 물러났다.

나는 성적서 원본 앞으로 갔다.

손가락이 표지의 푸른 마크에 닿았다.

[손해 판독 창] 대상: 동력부 시험 성적서 원본 (AEGIS-07) 실제 손해액: 210,000,000원 청구액: 3,000,000,000원 사기 확률: 93.6% 근거 태그: 조작된 파괴 흔적 / 동력부 열화 은폐 / 실종자 명부 위장

숫자가 심사장 화면으로 전송됐다.

실제 손해액 2.1억, 청구 30억, 사기 확률 93.6.

……성과급이냐, 징계냐.

내 손바닥이 어느새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심사관이 화면을 끌어서 읽었다.

차민구가 말을 열었다.

“그건 추정치일 뿐입——”

말이 거기서 멈췄다.

최예린이 든 녹취 USB가 심사장 화면에 올라가 있었다.

탁문호가 “폐기 지시”라던 그 순간, 차민구 목소리가 그대로 나왔다.

“내일 아침이면 없어질 서류에 목숨 걸 필요 없어요.”

차민구 입에서 그 목소리가 다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입만 벌렸다 닫았다.

할 말을 잃은 사람은 늘 저런 표정을 한다.

오지석이 심사장 구석에서 자기 폰을 들었다.

“내가 뭐랬냐. 접촉 수치 바로 심사 기록 박제되네.”

심사관이 곽승표를 불렀다.

“성적서 원본, 판독 결과, 녹취 기록을 정리해 심사 중간 결정 내리겠습니다. 곽승표 님은 대기하세요.”

곽승표가 고개를 숙였다.

“심사 종료까지 대기하겠습니다.”

정산은 바로 뜨지 않았다.

심사관이 세 번 서류를 넘기고, 공단 시스템을 두 번 조회한 뒤에 화면을 돌렸다.

“아크베인 보험청구 건에 대해 사기 확률 93.6% 및 근거 태그 3건 확인. 청구액 30억 원을 기각하고, 기지급 추정 검증비 0원에 대해 환수 결정합니다. 사기 공모 혐의는 공단 사법팀에 인계합니다.”

곽승표가 큼직하게 말했다.

“사기 확정입니다.”

[정산 알림] 사건명: 검은문 위장 전멸 사고 보험사기 적발 금액: 3,000,000,000원 성과급: 90,000,000원 포상금: 200,000,000원 실수령 예정: 258,000,000원

내 눈이 화면 맨 아래에서 두 번을 오갔다.

적발 30억.

성과급 9천. 포상금 2억. 실수령 258,000,000원.

두 번 다시 봐도…… 같다.

이거, 야근 수당으로 치면 몇 년치지?

“월세 1,200만 원 아파트면 스물한 달 치. 두 번째 보면 한 달 더 오르나?”

내가 중얼거렸다. 최예린이 옆에서 픽 웃는 소리가 났다.

차민구가 벽 쪽을 잡았다.

“재단장 승진이……”

거기까지가 공단 사법팀이 그의 팔을 잡은 순간이었다.

심사장 밖으로 끌려가면서 차민구가 넥타이를 한 번 더 만졌다.

멋진 옅은 회색 정장이 구겨졌다.

승진 대신 징계로 가는구나.

게이트뒷문의 새 댓글이 오지석 폰에 떠올랐다.

ㄴ [게이트뒷문] 조작 의혹 취소. 수치 조합이 너무 정합이라 반박 못 함. ㄴ [도끼질꾼] 2.1억 대비 30억. 청구 배수 14.28. 성적서 은폐까지 붙었으면 사기 맞다.

오지석이 그 화면을 캡처했다.

오후 늦게 우리는 회사 사무실로 돌아왔다.

공단 중앙심사장에서 걸어 나올 때 바람이 멎어 있었다. 손이 아직 저렸다.

성적서 표지에 닿은 검지 끝이 차갑고도 따뜻했다.

……오늘 하루, 이 손가락 하나로 시작됐는데.

끝은 통장으로 났다.

강하린이 회의실 문을 열며 말했다.

“독립팀 직할 등록 서류 갖고 왔습니다. 공단 담당이 예산 문제로 보류 의견 냈습니다.”

“보류요?”

“감사 결과와 오늘 보도 공신력을 근거로 뒤집었어요. 조건 없이 직할 등록됩니다.”

강하린이 서류 위에 봉인 바코드를 붙였다.

“공동 책임자 등록까지 끝났어요. 팀 이름은 손해사정팀 그대로입니다.”

나는 명패를 받아 들었다.

두꺼운 플라스틱.

이름 옆 ‘공동 책임자’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내 명함이라니.

오지석이 자기 자리에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이거 실화냐. 공익 제보자 등록증 문자 왔다. 오늘부터 나도 공식 증인이다.”

최예린이 수첩에 삭제선을 쭉 그었다. 그 위에 ‘접촉 시 수치’라고 써 있었다.

“기사는 수치만 나갑니다. 접촉 얘기는 오늘부로 없었던 걸로요.”

그녀가 수첩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나는 명패를 책상 앞에 붙였다. 왼쪽에서 두 번째, 명함 크기 칸 안.

“판독 수치는 이 팀 안에서만 읽습니다.”

강하린이 바코드 옆에 도장을 찍으며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오지석이 공익 제보자 등록증을 지갑에 넣는 소리가 났다.

손해사정사, 사기 확률이 보입니다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