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장부를 베니 돈이 보인다

5화

“증거 무효 청구서 말입니다. 이것부터 확인하시겠습니까.”

아크길드 재무본부 감사장. 차민규가 문서 봉투를 밀었다. 오전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서도현은 봉투를 받으며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냉방 탓이 아니었다.

차민규가 탁자 위에 손가락을 포갰다.

“서 대리님께서 제출하신 보고서. 그 원본이 저희 길드에서 무단 이탈한 장부라는 확인서가 첨부돼 있습니다.”

서도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계산기를 눌렀다.

관청 반박 의견서, 인증 사본 대조, 열람 기록 정리.

시간당 수수료로 치면.

최소 이틀 치다.

……이것부터 확인하시겠습니까.

갑질도 참, 청구서부터 깔고 본다니까.

“아, 예. 제가 탈취한 장부라면, 그걸 사전 열람 기록 없이 제출했다는 말씀이시군요.”

“기록이 없으니 탈취라는 겁니다. 관청 보안 로그에 원본 열람 이력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게 핵심이에요.”

차민규가 손바닥으로 청구서를 톡톡 짚었다. 서도현은 겉으론 공손하게 받아 둔 채 겉표지만 넘겼다.

“위조 감사·등록 취소 청구.”

두 번째 페이지에 박혀 있었다.

등록 취소?

어림없지.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이걸 왜 받아야 하는지 잠깐만요.”

서도현이 서류를 반쯤 덮었다.

“수수료 동결 구간이 어디까지인지 감사팀에 확인해 드릴까요?”

차민규의 눈썹이 스쳤다.

“서 대리님도 이제 감사 대상에 오르시게 됐습니다. 그 상태에서 대응 수수료를 논하는 건 우선순위가 잘못된 겁니다.”

“아, 네. 맞습니다. 우선순위는 원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죠.”

서도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끝이 저렸다.

오기가 아니었다. 계산이었다.

이 청구서는 관청 감사가 원본을 채택하기 전에 등록 취소를 걸어 수수료를 얼리려는 수순.

그렇다면 조사실에서 끝내는 게 빠르다.

“그럼 이 청구서는 제가 잘 보관하겠습니다. 내일까지 반박 의견서를 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민규가 회의 테이블을 손끝으로 쳤다.

톡.

“서 대리님, 길드 재무 건전성을 위해 드리는 말씀인데요. 헌터넷에 올라간 세무돌이 계정. 관청 감사가 부적절 정보 유출로 보고 있습니다. 청구서에 포함했어요.”

서도현은 청구서 사본을 가방에 넣었다. 서늘했던 목덜미가 오히려 뜨거워졌다.

아, 그거구나.

여기까지 미리 깔아 둔 거다.

유출 혐의로 나를 먼저 등록 취소 위기에 넣고.

원본 증거 채택을 늦추는 것.

수수료를 얼리려고 등록부터 걸다니…….

감사장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등록 취소 전에 원본을 관청에 찍으면 되는 거 아니냐.”

지하철을 갈아타는 동안 폰을 두 번 확인했다. 윤가람에게는 짧게 썼다.

‘조사실, 지금 갑니다. 마나 잔상 사본 챙겨 주세요.’

답은 없었다. 대신 감사과 조사실 앞에 도착했을 때, 윤가람이 검집을 옆구리에 낀 채 서 있었다.

“강필구 주무관, 지금 도착했다. 접수증은 가져왔냐.”

“네. 여기 있습니다.”

조사실 안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강필구가 자리에 앉아 서류 봉투를 열었다. 윤가람은 벤치에 얹어 둔 S급 장부 사본을 들어 올렸다.

표면에 남은 마나 잔상이 희끄무레하게 일렁였다.

“이게 그 원본이야. 아크길드에서 이탈했다는 장부의, S급 안전예산 모본.”

서도현의 왼쪽 검지가 욱신거렸다. 반창고가 감긴 그 손가락을, 윤가람이 지켜봤다.

“검증은 어떻게 할 거지.”

강필구가 끼어들었다.

“저희가 감정관을 불렀습니다. 잔상 반응과 원본 전표 대조를 동시에 합니다. 그전에 사본과 원본이 같은 결을 유지하는지 확인이 필요해요.”

서도현은 가방을 열었다. 원본 입찰서. 전표. 그리고 강화된 세무조정 보고서. 그 위에 윤가람이 사본을 겹쳐 놓았다.

손가락을 댔다.

마나 잔상이 손끝을 끌어당겼다.

오한이 목 뒤로 번졌다.

이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23억 4천만 원.

선우통상으로 배당된 그 돈이 장부 안에서 장면으로 떠올랐다.

입찰서 두 곳이 0원. 그 자리에 선우통상 단독 배당. 가공 매입 전표가 같은 일자로 돌아들었다.

수수료로 치면, 이건.

휴지가 아니라 칼이다.

내 손가락에 지금, 23억이 감기고 있다.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세무 대리인 시스템] 판독 완료 추정 횡령액: 2,340,000,000원 수수료 정산: 5,200,000원 (지급 예정)

숫자를 읽는 동안 손끝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손은 떼지 않았다. 2,340,000,000원.

이걸 지금 내 두 손으로 만지고 있다. 돈의 흐름이 사본과 거의 같은 결을 그렸다. 어긋나는 지점은 없었다.

“강 주무관님, 여기 전표와 입찰서 결이 사본과 같습니다. 원본 대조에 쓰시면 됩니다.”

강필구가 사본 표면의 잔상을 확대경으로 비췄다.

“마나 잔상이 원본 전표에 남은 법인 인영과 겹칩니다. 이러면 무단 이탈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죠. 원본 증거로 접수하겠습니다.”

윤가람이 관청 접수증을 두 손으로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시선이…… 접수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취 장부, 끝났네.”

내가 계산한 숫자가, 증거로 박혔다.

서도현은 가방 끈을 조이며 작게 답했다.

“아직 등록 취소 청구가 남아 있습니다. 반박 의견서에 이 원본 접수 기록을 붙여서 내면 끝나요.”

강필구가 서류 봉투에 증거물 봉인 스티커를 붙였다.

“회계팀 내부 결재 로그도 같이 제출받을 겁니다. 이 장부가 어디서 나갔는지, 로그로 더 명확해질 거예요.”

서도현은 조사실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열한 시 사십 분. 차민규가 걸어 놓은 수수료 동결의 시간이 거꾸로 줄어드는 것 같았다. 한 시간에 얼마짜리 협박이었지? 수수료 520만 원을 시간으로 나눠 보다가, 그만뒀다.

밖으로 나오자 윤가람이 접수증을 접어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먹냐.”

“아뇨, 지금은 못 먹겠습니다. 통장부터 확인해야죠.”

윤가람이 서도현을 잠깐 쳐다봤다. 입꼬리가 거의 닿을 듯 움직였다.

“나쁘지 않네. 그 계산.”

서도현은 손끝을 문질렀다. 아직 얼얼했다. 사본의 마나 잔상이 손가락에 남은 채였다.

회사명 아크길드에서 관청으로 제출된 증거 무효 청구서는, 이제 반박 의견서 앞에서 한 장짜리 협박에 가까워졌다. 그걸 우리가 뒤집은 거다. 수수료 520만 원짜리 반전. ……통장부터 보자.

점심을 지나 사무실 앞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멎었다.

차민규다. 들켰다.

박세미가 노트북을 접고 자리를 피했다. 나는 인사만 받고 문서함 뒤로 들어갔다. 그가 노태식 앞에 섰다.

“노 대리님,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노태식이 계산기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아, 예. 팀장님.”

차민규가 목소리를 낮췄다. 내 귀에는 다 들린다.

“예전에 그 서류 건, 제가 지금까지 덮어드렸던 것 아시죠. 이번에 감사과에 올라간 세무조정 보고서에 딸린 비교 증빙 중, 선우통상 매입 누락분만 도려낸 확인서를 하나 써 주시면 오늘 안으로 그 일은 없는 게 됩니다. 쉽죠?”

노태식의 등이 굳었다. 셔츠가 목덜미 뒤로 잠깐 당겨지는 게 보였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계산기 모서리를 엄지로 눌렀다.

아까부터 계산기만 더듬네. 저 손가락, 지금 숫자 대신 뭘 누르고 있는지 안다. 확인서 한 장이면 그 일을 덮어 준다. 내 앞에서.

내가 문서함을 밀었다.

“차 팀장님, 그 확인서는 저희가 쓸 서류가 아닙니다.”

차민규가 천천히 돌아섰다.

“아, 서 대리님도 계셨네요. 노 대리님하고는 개인 일인데.”

“여기서 나가는 서류면 업무 일입니다. 녹취할까요, 팀장님?”

내 폰을 들어 보였다. 잠금 화면에 녹음 앱이 떠 있다. 사실, 아직 누르지 않았다. 허세다. 그래도 차민규의 눈빛이 폰을 따라갔다.

노태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약간 풀렸는지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저기, 팀장님. 나 그때 그 일. 오늘 관청에 말할 겁니다.”

차민규가 미소를 거뒀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노 대리님.”

“내가 그 서류 고친 거, 관청 감사과에 자수하려고요. 그리고 방금 녹음도…… 여기 있을 거고요.”

침묵이 아니라 정적이었다. 노태식의 손이 자기 폰을 향했다. 켜져 있었다. 주머니 속이 아니라 책상 위에서. 이 형, 언제 켠 거야?

박세미가 안쪽 문을 반쯤 열고 서 있었다. 차민규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넥타이 매듭이 한 번 들썩였다.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전 아무 말도——”

“들었어요, 팀장님.”

박세미가 노트북을 들어 올렸다.

“방금 그것, 있잖아요. 이건 터진다. 진짜 터지는 거예요.”

차민규가 입을 다물고 사무실을 나갔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복도 쪽으로 바람처럼 기울어 있었다.

나는 곧장 노태식의 폰을 집었다. 녹음 시간이 찍혀 있다. 6분 48초. 차민규가 들어오기 전부터 돌고 있었다.

“미리 녹음 돌린 거냐.”

노태식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아까부터 안 좋은 낌새라서.”

그는 말까지 해내고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내가 녹음 파일을 박세미에게 넘겼다.

“닉네임은 가려라. 증거는 관청 감사과로 갈 거고.”

박세미가 노트북을 펼치고 세무돌이 계정으로 접속했다. 헌터넷 게시물 아래 댓글 반응이 계속 갱신된다.

“야, 이거 다시 올려도 되지? 수치 재검증표 최종판이랑 이 자수 녹취 타임라인 같이.”

“자수 사실은 빼고 올려. 관청이 먼저 받아야 한다.”

“알았어.”

박세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옮겨 갔다. 잠시 뒤 헌터넷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장부귀신: 재검증표 다시 봤는데 매입 누락이 아니라 가공매입이네. 이걸 이월이라 포장한 거 자체가 무리수. 게이트10년차: 2년 전 그 전멸 사고 때도 보급비 내역이 이랬냐?

소름 돋는다. 안전예산지킴이: 이거 그냥 횡령이잖아. 헌터법 제44조 맞지?

박세미가 나를 쳐다봤다.

“댓글 속도 개빨라. 진짜 터졌다.”

노태식이 작게 혼잣말했다.

“수수료보다 내가 관청 간다고 생각하니까 다리가 안 움직인다.”

나는 노태식의 폰을 들어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다녀온다. 남은 건 관청 몫이다.”

늦은 오후, 감사과 조사실. 강필구가 책상 위에 두 서류 뭉치를 나란히 놓았다. 왼쪽이 아크길드 원본 증거, 오른쪽이 이재웅이 제출한 내부 접속 로그다.

이재웅은 기다란 로그 뭉치를 밀어 놓고 손을 무릎에 올린 채 앉아 있었다. 목덜미가 긴장으로 흰빛이 도는 게 보였다.

강필구가 로그에서 두 줄을 짚으며 번갈아 대조했다. 접속 시간, 결재 IP, 문서 번호. 모두 원본 증거에 남은 시각과 겹친다.

“두 자료가 맞물립니다. 증거 무효 청구는 기각 사유로 정리하겠습니다.”

차민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

“절차상 문제가——”

“청구서 검토는 이미 끝났습니다. 오늘부로 아크길드 회계 결재 계좌를 동결하고, 관련 임원 등급 재심사를 의뢰합니다.”

윤가람이 통지서를 받아 두 번 읽었다.

“이걸로 전멸 레이드 후배들이……”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통지서를 접어 코트 안쪽에 넣었다.

강필구가 나를 돌아보았다.

“서 대리인에게 미지급 세무조정 수수료 전액이 오늘 중 입금될 겁니다. 관청이 지급 명령을 넣었으니 받아두세요.”

이재웅이 목소리를 낮춰 한마디 했다.

“저는…… 징계는 받겠습니다. 다만 감사과에서 제보 경위는 따로 기록해 주셨으면 합니다.”

강필구가 문서에 서명했다.

“이미 기록돼 있습니다. 비공개로요.”

저녁 무렵, 새 사무소. 명패를 문 옆에 먼저 건다.

서도현·노태식 세무사무소

노태식이 전선을 정리하다 허리를 폈다.

“야, 이거 진짜 우리 사무소 맞지? 명패 내려가는 거 아니지?”

“월세 첫 달 치 내고 나면 이제 남은 건 보증금이다.”

폰이 울렸다. 국민은행 앱 푸시다.

[국민은행 입금] 18,200,000원 — (주)아크길드 세무조정 미지급 수수료 외 12건 (잔액: 31,405,600원)

노태식이 내 폰을 뺏 듯이 봤다.

“잔액 계산 잘못 본 거 아니지? 영수증 노예가 하루아침에——”

“영수증 노예는 오늘 끝났다. 월세 이백, 보증금 이천만 원 빼도 우리가 버틸 돈이야.”

노태식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숫자가 찍힐 때마다 입술이 따라 움직인다.

“빼도, 일천만 원 넘게 남네. 남네, 이거야.”

나는 명패를 한 번 더 바로 세웠다. 왼손 검지 반창고가 저녁 불빛에 희미하게 비쳤다. 상처는 아물어서 가렵다.

아크길드 본사 회계팀. 차민규는 이메일로 먼저 받은 계좌 동결 통지서를 들었다. 결재 서류는 책상 위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내 결재 라인이…… 전부 기록에 남았잖아.”

그는 의자 팔걸이를 오래 움켜잡았다. 통지서를 내려놓지 못한 채.

장부를 베니 돈이 보인다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