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재비록
1화
채연의 손가락이 백부자 조각 위에서 멈췄다.
약사발 가장자리에 걸쳐진 얇은 절편 하나. 표면은 백부자 특유의 유백색을 띠고 있었지만, 단면의 결이 달랐다. 채연은 돋보기를 집어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절편을 빛에 비추자, 유관속 배열이 방사형이 아닌 불규칙한 분지형으로 읽혔다.
“단영.”
단영이 약탕관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채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낮았다.
“이것 좀 봐.”
단영이 다가와 절편을 받아 들었다. 돋보기를 빌려 들여다보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거…… 천오두 아니에요?”
“단면 결이 다르다.”
채연이 백부자 통에서 조각을 몇 점 더 꺼내 나란히 펼쳤다. 둘은 겉보기에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채연이 핀셋으로 천오두 의심 조각을 집어 흰 접시 위에 올렸다.
“색은 백부잔데 결은 천오두다.”
단영의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접시를 집어 들고 빛에 다시 비추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게 백부자 통에 섞여 있었다고요?”
“첫 절편 꺼낼 때 같이 딸려 나왔다.”
단영이 조각을 내려놓고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작은 발끝이 바닥을 두어 번 찍었다.
“옛날에 사모님께서 늘 조심하라고…… 이 두 가지는 정말 비슷해서 게으름 피우면 사고 난다고.”
채연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계근기 위의 약재들을 다시 훑었다. 백부자 통 안에서 같은 결의 조각이 세 점 더 발견되었다. 모두 미세하게 크기가 다른 절편들. 우연히 한 점이 섞인 것 같지는 않았다.
“기록한다. 백부자 3냥 중 천오두 의심 절편 4점.”
채연이 약장 일지에 붓을 댔다. 단영이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언니.”
“……말해.”
“이 탕약, 오늘 동궁으로 올라가는 거죠?”
채연이 붓을 멈추고 단영을 바라보았다. 단영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허 어의께 가야 한다. 지금.”
“하지만 허 어의께서…….”
“가서 보여드리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영이 고개를 끄덡였다. 채연은 흰 접시를 약포지로 조심스럽게 덮고, 의심 조각 네 점과 백부자 표본을 따로 봉투에 담았다. 약사발은 뚜껑을 덮어 단영에게 건넸다.
“여기서 대기해. 혹시 모르니까 원 재료는 손대지 말고.”
“알겠어요.”
채연이 약재 봉투를 들고 약방 문을 나섰다. 단영은 남아 약사발 뚜껑을 다시금 확인하며 손끝으로 가장자리를 쓸었다.
허 어의의 집무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채연은 문틀 앞에서 한 호흡 멈췄다. 손에 든 약봉투가 이유 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가 손을 들려는 순간, 안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채연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허 어의는 집무 탁자 앞에 앉아 어의원 일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약간 굽은 등 너머로 오후 볕이 창호지에 걸러져 방 안에 가라앉은 빛을 만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허 어의가 고개를 들지 않고 물었다. 채연은 탁자 앞까지 걸어가 약봉투를 내려놓았다.
“방금 세자 저하의 탕약 재료를 검사하던 중, 백부자 통에서 천오두로 의심되는 절편 네 점을 발견했습니다.”
허 어의의 붓이 멈췄다.
“결과 단면을 확인했고, 유관속 배열이 백부자의 방사형이 아니라 천오두의 불규칙 분지형이었습니다.”
허 어의가 천천히 붓을 내려놓았다. 그가 비로소 채연을 올려다보았다. 좌측 관자놀이의 오래된 화상 흉터가 빛을 받아 별 모양으로 드러났다.
“표본을 가져왔나.”
“여기 있습니다.”
채연이 봉투를 열고 흰 접시를 내밀었다. 허 어의가 접시를 들어 눈앞으로 가져갔다. 돋보기를 쓸 생각은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절편 하나를 집어 손끝 감촉만으로 굴려보았다.
잠시 침묵.
그가 접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소리가 딱, 하고 약실 안에 울렸다.
“이건 네가 감별할 일이 아니야.”
채연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허 어의가 집무용 장부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말투에는 파문이 없었다.
“약재 선별은 하급 조제사와 조제감의 소관이다. 의녀는 처방된 탕약을 달이는 것이 본분.”
“허 어의. 천오두는 경련과 호흡 마비를 일으키는 독초입니다. 이것이 탕약에 들어가면.”
“백부자에 모양이 비슷한 조각 하나 섞였다고 독으로 단정하는 것 자체가 과민하다.”
허 어의가 손을 들어 채연의 말을 잘랐다.
“지난 경신년에도 그런 식으로 문제를 키우다 의녀 하나가 내쳐진 것을 기억하게.”
채연의 손가락이 살짝 오그라들었다. 허 어의가 그녀의 손을 보고서야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감별했다는 이 절편들은 내가 직접 확인했다. 백부자다.”
“그러나 유관속이.”
“육안 감별에 의지하지 마라. 수십 년 손끝으로 약재를 가려온 내 감각이 백부자라면 백부자다.”
허 어의는 접시의 절편들을 약포지에 다시 싸서 채연에게 밀어 주었다. 그 동작이 완료된 행정처럼 깔끔했다.
“원 재료 통은 그대로 두고, 탕약을 조속히 완성해 동궁으로 올려라.”
“허 어의.”
“들은 것으로 하게.”
채연은 약봉투를 집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봉투 모서리가 접혔다.
종이가 손톱 밑을 파고드는 작은 아픔이 느껴졌다. 채연은 그것을 오히려 천천히 음미하며, 손가락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물러서서 반신을 숙였다. 허 어의는 이미 다른 장부로 시선을 옮긴 뒤였다.
채연이 집무실을 나서려는 순간, 허 어의가 붓을 든 채 말했다.
“내일부터 약방 검사 업무는 조제감에게만 맡긴다.”
채연은 잠시 멈춰 섰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그러나 대답 대신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문고리가 채연의 등 뒤에서 차갑게 울었다. 복도 공기는 약재 먼지와 썩은 낙엽 냄새가 뒤섞여 목젖을 간질였다. 채연은 잠시 벽에 손을 짚고 서서, 탕약 향이 채 가시지 않은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채연의 발걸음이 약방 방향이 아닌 안채 바깥으로 향했다. 왼손 엄지와 검지가 오른쪽 손목을 꽉 쥐었다.
자신의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이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복도 끝 창으로 스며든 늦은 오후의 빛이 길고 좁은 그림자를 바닥에 깔아두고 있었다.
약방에 돌아왔을 때, 단영은 조제대 앞에 서 있었다. 채연의 얼굴을 보자 숨을 삼켰다. 채연은 대답 없이 탕약을 달이던 화로 옆으로 걸어갔다.
“언니…….”
“탕약, 지금 올린다.”
“하지만.”
“허 어의께서 직접 확인하셨다. 백부자다.”
채연이 단영에게서 약사발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손은 이미 평소처럼 안정되어 있었다. 약사발을 탕기로 옮기며 덧붙였다.
“네가 방금 기록한 일지, 따로 보관해둬. 그리고 넌 먼저 처소로 돌아가 있어.”
단영의 눈이 커졌다.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고개를 세게 끄덡였다. 채연은 탕기를 받침대에 올리고 약방 문을 나섰다. 발송 담당 하급 조제사가 동궁 방향으로 탕기를 들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채연은 복도 한쪽 벽에 등을 기댔다. 쑥 향이 은은하게 베어나온 소매 자락에, 아까보다 조금 더 깊게 접힌 주름이 남아 있었다.
탕약을 받아 든 내관의 손이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이현은 책상 위에 놓인 백자 탕기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의원에서 매일 같은 시각에 올리는 보약. 벌써 삼 년째다. 손을 내밀다가 멈췄다.
약 냄새가 달랐다.
익숙한 감초의 단내와 당귀의 흙내 사이로, 미세하게 비릿한 끝맛이 섞여 있었다. 코를 찌르는 듯한 쓴맛이라기보다, 혀뿌리를 간질이는 낯선 감각.
“오늘 조제 당번은 누구냐.”
내관이 허리를 숙였다.
“허 어의께서 직접 감독하셨사옵니다. 조제는 어의원 하급 의관 두 명이 맡았고, 의녀로는 채연이 배석하였다 하옵니다.”
채연.
이현의 손가락이 탕기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허 어의의 처방대로 조제된 약이라면 지난 이 년간 아무 탈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허 어의가 조제 과정에 문제가 없다고 하였느냐.”
“예, 전하. 별도의 언급은 없으셨사옵니다.”
검지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탕약을 입가로 가져가 냄새를 다시 들이마셨다. 감초의 향이 덮지 못한 비린 꼬리. 이것은 숙지황이 타면서 나는 냄새도 아니고, 계피가 과하게 들어간 것도 아니다.
약재 한 가지가 바뀌었거나, 한 가지가 더 들어갔다.
“그릇째 두고 가라.”
“전하, 드시지 않으시면……”
“오늘은 입맛이 없구나.”
내관이 망설이다 물러났다. 이현은 식어가는 탕약을 다시 집어 들었다. 백자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탕기를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김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을 좁혔다.
익숙한 듯 낯선 그 비릿함에, 무언가 기억의 끈을 건드리는 불쾌한 감촉이 있었다. 탕기를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들고 서 있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밤, 의녀 처소.
촛불 하나가 방 안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채연은 퇴청 후 갈아입지도 않은 의녀복 그대로, 어머니의 수기를 펼쳐 들었다. 옆 요에서는 먼저 돌아온 단영이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닳은 표지와 바랜 묵향. 손끝에 닿는 종이의 결이 차가웠다.
약방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 떠올랐다. 숙지황 박스 안에서 발견한 이물질. 다른 약재에 섞여 있었더라면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 작고 연한 뿌리 조각. 허 어의는 듣지 않았다.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수기를 천천히 넘겼다. 어머니의 붓글씨는 작고 촘촘했다.
닳은 종이 귀퉁이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채연의 손바닥에 닿았다. 촛불이 흔들려 글씨 위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오래된 상처처럼 번졌다.
‘천오두(川烏頭)와 백부자(白附子)를 혼동한 사례. 인조 17년 겨울, 민간 약방에서 발생. 환자는 반 시진 만에 입술 마비와 호흡 곤란을 호소. 약방 주인은 두 약재의 형상이 유사하여 착오.’
채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천오두. 어의원에서는 쓰지 않는 약재다. 독성이 강해 궁중 처방에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민간에서도 사용량과 법제를 엄격히 지키는 까다로운 약재.
그런데 왜 어머니는 이 사례를 기록했을까.
수기의 이 부분만 유난히 종이가 접혀 있었다. 여러 번 펼쳐 본 흔적이었다. 가장자리에 작은 글씨로 덧붙여진 주석이 눈에 띄었다.
‘내의원 의안 제47책, 동궁 관련 기록에서 동일 증상 건 누락 확인. 원본 대조 결과 해당 면이 절취됨.’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의원 의안에서 기록이 사라졌다. 어머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수기에 남겼다. 채연은 심호흡을 가다듬고 수기를 더 넘겼다. 마지막 쪽에 이르러 손이 완전히 멈췄다.
‘백부자 외 민간 약재 세 종, 최근 삼 년간 궁중 약방에 반입된 이력. 전부 어의원 기록에는 없는 물품들.’
그 아래로 약재 이름과 반입 시기, 추정 경로가 적혀 있었다 허 어의도 모르는 약재가 궁중 약방에 들어와 있었다. 내의원 기록에는 남지 않은 채.
수기를 덮었다.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가슴께로 가져갔다. 촛불이 한 번 깜박이다 다시 타올랐다. 내일 약방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