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재비록
10화
복도에 멈춰 선 채, 채연은 인혜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주상궁 마마.”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손가락이 소맷자락 안쪽으로 일지의 모서리를 눌렀다.
“소인은 전하의 명으로 의안을 살폈사옵니다. 그 이상의 말씀은 전하께 여쭤 주시옵소서.”
인혜가 백옥 가락지를 천천히 돌렸다.
“전하의 명이라면…… 전하께서 아실 일이겠군요.”
가락지가 멈췄다. 등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다만, 의녀. 의안고의 기록은 보는 자에 따라 달리 읽힌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채연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시옵니까.”
“내일 아침, 동궁으로 가 보십시오.”
인혜가 등을 돌렸다. 발걸음 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채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목을 쥔 손가락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동궁 약방.
이현은 채연이 건넨 대응표를 펼쳐 놓은 채 밤새 자리에 앉아 있었던 듯했다. 백색 도포에 주름이 깊게 잡혀 있었고, 탁자 위의 차는 식은 채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채연이 문을 닫고 예를 갖추었다.
“전하.”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 아래 그늘이 짙었으나 시선은 날카로웠다.
“어젯밤, 인혜가 그대를 보았소.”
“예. 알고 있사옵니다.”
“그녀는…… 모후 곁에서 이십 년을 있었소.”
이현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동안 무언가를 알았을 수도 있다는 뜻이오.”
“가능하옵니다. 허나 추측만으로는 부족하옵니다.”
채연이 두 걸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보태음에 천오두가 들어 있었다는 기록은 확보했사오나…… 증거가 되기에는 불완전하옵니다. 수기는 비공식 기록이며, 의안고 공식 문서는 찢겨 있사옵니다.”
이현이 손가락을 내렸다.
“그럼 무엇이 더 필요하오.”
“투약 전 진료 기록이옵니다. 보태음이 처방된 이유와, 그 전후로 모후 마마의 몸 상태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확인해야 하옵니다. 그래야 천오두가 의도적으로 처방된 것인지, 나중에 혼입된 것인지 밝힐 수 있사옵니다.”
“의도.”
이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누군가 일부러 내 모후와 나에게 그 약을 먹였다는 말이오.”
채연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현의 손등에 얇은 핏줄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식은 차의 수면이 미세하게 떨렸다.
“확정할 수 없사옵니다.”
채연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러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조사가 필요하옵니다. 증거 없이 의심은 독이 되옵니다.”
“의심이 독이라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중독되었을 터.”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끝이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가 떨어졌다.
“의안고 재열람. 투약 전후 모후의 진료 기록.”
“예. 그리고 조제사와 약방 출납부도 대조해야 하옵니다. 누가 보태음을 조제했는지, 약재가 어디서 나왔는지…… 그 계통을 추적해야만 사라진 이틀분의 기록을 보완할 수 있사옵니다.”
이현이 걸음을 옮겼다. 창가로 두어 걸음, 다시 탁자 쪽으로.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그의 윤곽을 그렸다.
“사흘이라고 했소.”
“예.”
“길게 잡을 수 없소. 그대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움직임이 이미 있었다. 방을 뒤지고, 은솔을 시켜 독초를 건네게 하고…… 이제는 내 명이라는 이유만으로는 그대를 보호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오.”
채연이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쥐었다. 맥박이 규칙적으로 뛰었다.
“소인은 의녀로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사명이옵니다. 보호를 바라지 않사옵니다.”
이현이 멈춰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보호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실을 밝혀 주시오. 내가 어떤 이유로 이 몸을 갖고 살아야 했는지…… 알고 싶소.”
채연이 허리를 깊이 굽혔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은은한 쑥 향이 약방 안으로 번졌다.
오전, 중전 민씨 전각.
중전의 눈가는 충혈되어 있었고 가체는 전날보다 한 치쯤 낮게 틀어져 있었다. 손수건을 쥔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채연이 예를 갖추고 일어서자 중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자의 기색이 어떠하냐.”
“회복 중이시옵니다, 마마.”
“회복이라…….”
중전의 손수건이 비틀렸다.
“밤새 동궁에서 불이 꺼지지 않았다 들었다. 전하께서 편치 않으신 것이냐.”
채연이 잠시 숨을 고르며 눈을 내리깔았다.
“독초 사건 이후로 기혈이 불안정해지신 바…… 회복 과정에서 흔한 기혈 변동이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사옵니다.”
중전의 손이 미세하게 풀렸다.
“흔한 변동이라…… 네가 보기에도 그렇다는 말이냐.”
“예, 마마. 맥상도 차차 안정되고 있사옵니다.”
중전이 손수건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올이 두 가닥 풀려 있었다.
“본궁은…… 저 아이가 아플 때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옆에 있어 주는 것 말고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채연이 침묵 속에서 손목의 맥박을 쥐었다 놓았다.
“마마께서 곁에 계신 것만으로 전하께는 큰 힘이 되옵니다.”
중전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예.”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 말만은 의학적 판단과 무관하게 사실이라고 채연은 생각했다. 중전의 눈이 붉어졌다.
“가 보거라. 전하께…… 어미가 항상 염려하고 있다 전하거라.”
“명심하겠사옵니다.”
채연이 물러나 문을 닫았다. 회랑을 지나며 손끝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가 떠난 전각 안, 중전은 손수건을 다시 집어 올리며 나인을 불렀다.
“소의 한씨 처소에…… 전하께서 회복 중이시나 기혈 변동이 있어 몸이 불편하시다는 소식을 전하도록 해라.”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중전은 손수건을 접고 또 접었다.
“문안 인사라도 다녀오라…… 같은 처지의 여인이 아니냐.”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나인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중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약침 자국이 손목에서 옅은 갈색으로 번지고 있었다.
중전 민씨 처소에서 흘러나온 말은 반나절 만에 소의 한씨의 귀에 닿았다. 중전이 의녀 채연을 불렀다는 것. 세자의 병증에 관해 무언가 물었다는 것. 한씨는 향낭 매듭을 천천히 풀며 귀띔한 시녀를 돌려보냈다.
저녁이 깊어질 무렵, 보향이 한씨의 처소 문을 조용히 닫았다.
“들어라.”
한씨가 손가락으로 맞은편 방석을 가리켰다. 보향이 무릎 꿇고 앉자 향낭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향, 용뇌, 정향. 그 아래로 미세하게 비린 기운이 섞여 있었다.
“중전 마마께서 오늘 의녀를 부르셨다.”
보향의 어깨가 굳었다.
“세자 저하의 병증에 관해 물으셨고, 그 의녀가 뭐라 답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한씨가 웃었다. 입술만 웃고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년이 무언가를 캐고 있다는 건 확실해졌지.”
“마마께서는 어떻게…”
“중전 마마의 시녀 하나가 내 사람이다. 대화 내용 전부는 못 들어도, 세자 저하의 탕약에 관해 의녀가 길게 답변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지.”
한씨가 손톱을 들여다보았다. 오른손 약지손톱 안쪽, 촛불 아래서 검은 기운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네 오라비 장액 말이다.”
보향의 숨이 멎었다.
“아직 살아 있지?”
“……네, 마마.”
“내가 한 번만 더 손가락을 까딱하면, 네 오라비는 변방 수자리로 갈 거다. 겨울이 오기 전에.”
보향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한씨가 향낭을 내려놓고 손을 폈다. 손가락 마디가 길고 희었다.
“의녀 채연의 약연을 가져와라. 약재 찧는 돌이다. 그리고 손수건도 하나.”
“……약연이오니까.”
“매일 쓰는 물건이지. 약방에 있을 게다. 네가 알지.”
보향이 떨리는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한씨는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다정한 속삭임 같았다.
“비슷한 돌을 하나 더 구해 부숴라. 채연의 약연과 같은 크기로. 손수건은 그 돌에 감아두고.”
“어디에 쓰시려는…”
“동궁 약방에 둘 거야. 귀한 약재가 사라진 자리에. 부서진 약연과 손수건만 남겨둔 채.”
한씨가 웃었다. 이번에는 눈도 함께 접혔다.
“의녀가 약방에 몰래 들어가 약재를 훔치다 실수로 약연을 깨뜨렸다. 손수건은 급히 빠져나가다 떨어뜨렸다. 제법 그럴듯하지 않으냐.”
보향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마마. 그런데 그 손수건에 무슨 증거를…”
“네가 채연 것과 같은 손수건을 쓰면 된다. 약방에서 한 번만 슬쩍 만져둔 뒤에.”
한씨가 손가락을 오므렸다. 향낭 매듭이 손바닥 안에서 눌렸다.
“내명부에서 증거를 뒤질 때, 약연은 채연의 것이고 손수건은 약재 가루가 묻어 있을 것이다. 채연의 것과 같은 자수, 같은 천. 그리고 약방에서만 쓰는 약재 가루. 부정할 수 없지.”
보향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숨소리만 가빴다.
“두 가지를 확인해라.”
한씨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하나, 채연의 약연 크기와 무게를 확인해 똑같이 만든다. 둘, 그녀가 실제로 어느 시간에 약방을 드나드는지 동선을 정확히 파악한다.”
“동선은… 어떻게.”
“중전 마마께서 불러서 확인하셨다지 않느냐. 너도 중전 처소에 심부름 가거라. 그 시녀에게 자연스럽게 묻는 거다. 중전 마마가 의녀를 언제쯤 부르셨는지, 의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네가 잘하지.”
한씨가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달빛이 손등에 닿았다.
“그리고 채연이 요즘 누구와 함께 있는지도 살펴라. 특히 밤 시간에.”
“밤이오니까.”
“그 의녀, 낮에는 조용해도 밤에는 움직인다. 의안고 출입 기록에 이름은 없었지만, 누군가의 명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은 있지.”
보향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자 저하께서… 도우시는 것입니까.”
한씨의 손이 멈췄다.
“네가 짐작할 일이 아니다.”
목소리에서 명랑함이 사라졌다. 보향이 다시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내일 밤까지 준비를 끝내라. 약연과 손수건, 그리고 동선. 다 확인한 뒤에 내게 와라.”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보향이 물러나 문을 열었다. 한씨는 손가락으로 향낭 매듭을 다시 비비기 시작했다. 말없이, 느리게.
밤이었다.
채연의 처소에는 촛불 하나만 켜져 있었다. 탁자 위에 어머니의 수기가 펼쳐져 있고, 그 옆에 투약 일지 사본과 약재 감별 일지가 포개져 있었다.
보태음 조항. 임신 중 금기 약재 목록. 천오두는 독성이 강해 산모와 태아에게 위험하므로 궁중 처방에서 원칙적으로 배제한다. 그 문장 아래 어머니의 글씨가 작게 덧붙어 있었다.
‘경신년 시월 초이튿날, 보태음에 백부자가 처방되었으나 실제 조제된 것은 천오두. 내의원 문의하였으나 외람된 추측이라 배척당함.’
채연은 검지로 그 줄을 짚었다. 어머니도 같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배척당했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채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바람이 아니었다. 커튼 너머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살짝 기울었다. 발걸음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등불 빛이 흔들렸다.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채연이 손목의 맥박을 짚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왼쪽 손목에 닿았다. 맥이 조금 빨랐다.
눈은 수기에서 떼지 않았다.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발소리가 멀어졌다. 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커튼 틈 사이로 복도 저편을 보았다. 등불 하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온 거냐.”
채연이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단영이 막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언니, 나야.”
단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채연이 손짓으로 안으로 들였다. 문이 닫혔다.
“누군가 있었다. 지금 막.”
채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방 창밖에?”
“응. 발소리는 못 들었는데 등불이 흔들렸다.”
단영이 탁자 앞에 앉았다. 채연은 서서 문 쪽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소의 한씨일까.”
단영이 말했다.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더 이상 혼자 움직여선 안 될 것 같다.”
채연이 탁자로 돌아와 앉았다. 촛불이 흔들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겹쳐졌다.
“단영아.”
“……왜.”
“내일, 내가 의안고에 한 번 더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아까부터 누군가 이 방을 지켜보고 있어.”
단영의 눈이 커졌다.
“언니가 못 가면 내가 갈까.”
“안 된다. 의녀의 출입 동패는 나만 가지고 있다. 네가 가면 바로 적발될 거야.”
“그럼 어떻게.”
채연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주상궁 인혜를 찾아가라.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네가 내 처소에서 주상궁 전갈을 기다리는 척하며 내일 아침 의안고 출입을 위한 예비 절차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다.”
“주상궁께서 들어주실까.”
“내가 의안고에 다녀온 걸 아는 분이시다.”
채연이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왼쪽 손목을 다시 쥐었다. 이번에는 천천히가 아니라 꽉.
“막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의안고 앞에서 기다리셨다.”
단영이 숨을 들이켰다.
“……무서운 분이야.”
“도울 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단영이 끄덕였다. 채연은 탁자 위의 수기와 일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다. 내일 동 틀 무렵에 움직여라. 오늘 밤은 여기서 같이 있어라.”
“응.”
단영이 손을 내밀어 채연의 손등을 덮었다. 채연의 손가락이 차가웠다. 단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손을 꼭 쥐었다.
약방 뒷골목. 등불 하나가 흔들렸다.
보향은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부서진 약연이 놓였다. 비슷한 크기의 돌을 깨뜨린 것이다. 거친 면에 검은 약재 가루를 묻혀 닳은 흔적을 만들었다.
손수건은 따로 접혀 있었다. 연한 남색 천에 다홍빛 자수. 채연이 쓰던 것과 같은 문양, 같은 실. 약방에서 약재 가루를 묻힌 자국이 손수건 모서리에 남아 있었다.
한씨가 나타났다. 등불을 든 하급 시녀 하나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마.”
보향이 두 물건을 올렸다. 한씨가 오른손을 뻗었다. 촛불 아래서 약지 손톱의 검은빛 변색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손가락으로 손수건을 집어 약연 위에 올렸다.
그리고 향낭을 비비기 시작했다. 천천히, 리듬을 타듯.
“잘했다.”
한씨가 읊조렸다. 손톱이 향낭 매듭을 한 번 눌렀다.
“이제, 네 놈의 손을 자르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