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청연재비록

11화

새벽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동궁 약방. 약장 문이 반쯤 열려 있고, 선반 맨 위 칸의 백자 약호가 텅 비어 있었다. 뚜껑은 약장 아래 굴러떨어져 있었고, 그 옆으로 부서진 약연과 손수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연한 남색 바탕에 다홍빛 자수, 약재 가루가 모서리에 묻어 있었다.

단영이 문턱에서 숨을 들이켰다. “언니…….”

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약연에서 손수건으로, 손수건에서 빈 약호로 옮겨갔다. 손가락이 소맷자락 아래로 들어가 일지의 모서리를 눌렀다.

“누군가 꾸몄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밀려들었다. 허 어의가 자주색 관복 자락을 휘날리며 문을 밀고 들어섰다. 뒤로 좌경 의관과 내명부 상궁이 그림자처럼 붙었다. 허 어의의 눈이 텅 빈 약호에 닿았다. 관자놀이의 별 모양 화상 흉터가 창틈 빛에 드러났다.

“이게 무슨 일이냐.”

내명부 상궁이 약장 아래로 걸어가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이 문양은.”

단영이 반사적으로 나섰다. “채언니 것은 아닙니다.”

“물러서라.” 허 어의가 손을 들자 단영의 발이 바닥에 붙은 듯 멈췄다.

상궁이 부서진 약연을 집어 검은 가루를 손끝으로 쓸었다. “약연, 손수건. 둘 다 의녀 채연의 것과 일치하는구나. 천산설련까지 없어졌고.”

허 어의가 채연의 팔꿈치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네 것이냐.”

채연이 허 어의를 똑바로 응시했다. “약연은 깨진 적 없는 물건입니다. 손수건도 소인이 두른 적 없는 자수입니다.”

“증거가 말하고 있다.” 허 어의가 약장을 가리켰다. “어제 저녁 봉함 점검은 내가 직접 했다. 문단속에 이상이 없었다. 밤사이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자는 의녀뿐이다.”

“소인이 아니옵니다.” 채연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왼쪽 손목을 꽉 쥐었다.

상궁이 손수건을 소매에 넣었다. “의녀 채연. 네놈의 물건이 도난 현장에서 나왔다. 해명은 의금부에서 하라.”

“기다리십시오.” 채연이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인에게 천산설련은 불필요한 약재입니다. 오로지 한습으로 인한 폐경 궐증에 쓰이며, 세자 전하의 탕약에는 배합된 적이 없습니다.”

좌경 의관이 약장 쪽을 힐끗 보았다. 상궁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허 어의가 눈을 감았다 떴다. “네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현장에서 네 물건이 나왔다. 의녀의 말만으로 사건을 덮을 수는 없다.”

“약재 감별 일지가 있사옵니다.” 채연이 품에서 일지를 꺼내려는 순간, 상궁이 손을 내저었다. “의금부에서 제출하라. 지금은 아니다.”

복도에서 군관 셋이 들어섰다. 선두의 군관이 채연의 팔을 잡았다. 채연은 뿌리치지 않았다. 상궁이 명령했다. “내명부로 이송한다.” 군관이 채연의 양옆에 섰다.

허 어의가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던졌다. “실망이 크다.”

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군관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단영이 약탁자 모서리를 움켜쥐며 손끝이 하얘졌다.

상궁이 약방 문 앞에서 하급 의관을 불렀다. “동궁 약방은 오늘부로 봉쇄한다. 어의원의 명을 받들어 출입을 일절 금지하라.”

“예, 상궁 마마.”

좌경 의관이 물러나며 봉인지와 줄을 꺼냈다. 약장 위로 노란 봉인지가 가로질러 붙었다. 채연의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내명부 청문실은 예상보다 좁았다. 채연은 좌우의 나인들에게 팔이 잡힌 채 문턱을 넘었다. 방 중앙에는 낮은 탁자가 놓였고, 탁자 너머로 상궁이 앉아 있었다. 좌측 벽 쪽에는 허 어의가 가부좌를 틀었다. 관자놀이의 별 모양 화상 흉터가 창살 사이 빛에 옅게 드러났다.

나인들이 채연의 팔을 놓았다. 채연은 탁자 앞에 무릎 꿇었다.

“채연 의녀. 동궁 약방에서 희귀 약재 두 종이 사라졌다. 네 약연이 부서진 채 발견되었고, 네 손수건이 그 곁에 있었다.”

채연이 품에서 약재 감별 일지를 꺼냈다. 손끝이 차가웠다.

“어젯밤 동 틀 무렵부터 해 질 녘까지, 모든 동선과 약재 사용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지를 탁자 위에 펼쳤다. 페이지마다 시간, 약재명, 중량, 조제실 번호가 빼곡했다. 상궁이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어제 오시, 제 소임은 하급 조제실에서 백부자 감별이었습니다. 약방 전체가 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허 어의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네가 사사로이 적은 것이다.”

채연의 손이 멈췄다.

“어의원의 공식 기록부에 없는 기록은 증거가 될 수 없다. 의녀로서 그 정도는 알 터.”

“하오나, 이 일지는 매일 조제실의 감찰 의관이 확인하는 중량과—”

“네 기록이 맞다는 것을 누가 보증하느냐.” 허 어의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차가울 뿐이었다.

상궁이 일지에서 눈을 떼고 채연을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 기록이 사실이라 해도, 네 손수건이 왜 부서진 약연 곁에 있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 손수건은 사흘 전 세탁물과 함께 보낸 뒤 찾지 못했습니다. 잃어버린 지 이미 수일.”

“잃어버렸다고?” 상궁이 손수건을 집어 올렸다. 연한 남색 천에 다홍빛 자수. 채연의 것이 맞았다. “물증이 있고, 네 약연이 발견되었다. 이 이상의 심문은 내명부 소관이 아니다.”

상궁이 일지를 접어 탁자 구석으로 밀었다. “의금부로 이첩하겠다.”

채연이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손마디가 하얘졌다. “그럼, 약재 감별 기록은 의녀의 손으로 쓴 것만으로—”

“그만.” 허 어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줏빛 관복 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의녀의 사적 기록은 공식 청문에서 효력이 없다. 이것이 조선의 의료 제도다.”

채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왼손목을 쥐려다가 손을 내렸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어의원 공식 기록부에는, 어제 오시에 제가 있던 장소가 어떻게 적혀 있습니까.”

허 어의의 눈가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침묵이 길어졌다.

“그 기록은 별도 확인이 필요한 사항이다.”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확인입니다. 공식 기록을 대조하면, 제가 그 시간 약방에 없었다는 사실만은 증명됩니다.”

허 어의가 한 걸음 다가섰다. “어의원의 기록은 나의 승인 없이 열람할 수 없다. 네가 아는 바일 터.”

“압니다.” 채연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허 어의를 정면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것이 의금부에서도 동일합니까. 판부께서 요청하시면, 거부하실 수 있습니까.”

허 어의의 입술이 굳어졌다. 상궁이 손을 들어 둘을 제지했다. “논점이 빗나가고 있다.

지금은 증거 채택 여부다. 의금부 판부께서 열람하실 일지는 판부의 권한으로 하실 일.” 상궁이 손수건과 약연 조각을 다시 보자기에 쌌다. “채연 의녀.

네 진술은 기록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네 증거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채연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의금부 이첩은 오늘 중 이루어질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진술하라.”

허 어의가 등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네가 옳다고 믿는 것이 제도 안에서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배워라.”

채연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인들이 다시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채연은 일어서며 접힌 일지가 놓인 탁자 구석을 한 번 보았다.

표지에 묻은 약재 가루가 창빛에 반짝였다. 입술을 깨물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감별용 돋보기가 손바닥에 차갑게 닿았다. 채연은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증거는 남았다. 의금부에서는 기록 대 기록으로 간다.

문턱을 넘는 순간, 상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허 어의. 의금부에 보낼 문서에 이 의녀의 진술 요지를 첨부해 주십시오.”

채연은 복도로 나섰다. 나인들의 발소리가 그녀의 발소리보다 한 박자 빨랐다.

침실에서 나와 의금부로 향하는 길은 침묵 속에 놓였고, 그 사이 궁궐 복도는 이미 술렁이고 있었다. 의녀의 이첩 소식은 내명부 각 처소의 시녀들을 타고 쓰레기처럼 빠르게 번져 갔다.

정오 무렵, 소의 한씨의 처소.

보향이 부서진 약연과 손수건을 감싼 보자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한씨는 손수건을 집어 들고 다홍빛 자수를 손톱으로 긁었다.

“약방 감찰 내시는.”

“대기 중이옵니다.”

“들여라.”

하급 내시가 굳은 어깨로 들어섰다. 한씨가 손수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의금부 심문 전, 이 물건들을 증거함에 넣어라. 증거물 인계 시각을 감찰 기록부에 맞춰라. 심문 전날 밤까지만 네 손에 있으면 충분하다. 그전에 들키면 네 목도 잘릴 테지.”

내시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한씨가 품속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 쥐여 주었다. 은전이 부딪혔다.

“식솔이 셋이라지. 전처럼, 이 물건들이 동궁 약방 하급 보관함에서 발견된 것으로 처리해라.”

내시가 주머니를 움켜쥐며 물러났다.

“은솔은.”

밖에 있던 은솔이 핏기 없는 얼굴로 들어와 허리를 깊이 굽혔다. 한씨가 은솔의 턱을 집어 올렸다. 약지 손톱 안쪽 검은 변색이 촛불에 반짝였다.

“네가 채연과 같은 약방을 썼지. 의금부에서 심문할 때, 기억나는 대로 말해도 된다. 채연이 며칠 전부터 약재를 따로 챙겼더라, 약연을 밤 늦게까지 쓰더라…… 그런 눈에 띄는 일들. 다 사실 아닌 게 뭐가 있겠느냐.”

은솔의 입술이 떨렸다.

“소인은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그러니까 이제 들려주면 된다.”

한씨가 은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 오라비 소식, 알고 있지. 변방 전출 명단에 이름이 올랐더구나. 의금부 심문이 깔끔하게 끝나면, 명단에서 빠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은솔의 손등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목소리는 실낱같았다.

“알겠사옵니다.”

은솔이 물러나자 한씨는 탁자 위 촛불을 내려다보며 손수건이 놓였던 자리의 미세한 약재 가루를 검지로 쓸었다. 입가의 미소가 반 호흡 만에 걷혔다.

오후 늦게, 주상궁 인혜의 처소.

하급 시녀가 조용히 들어와 편지 쪽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소의 마마 처소에서 오늘 정오 무렵, 내시 한 명과 하급 의녀 한 명이 차례로 들었사옵니다. 내시는 동궁 약방 감찰 보좌 엄 내시, 의녀는 은솔이란 하급 조제사옵니다.”

인혜가 백옥 가락지를 천천히 돌렸다.

“채연이 들어갔던 의안고 절차는.”

“출입 동패는 정상 절차였사오나, 세자 전하의 명으로 출입한 점을 문제 삼을 가능성이 있다 전해 왔사옵니다. 의금부 심문은 내일 아침 열릴 예정이옵니다.”

인혜의 손가락이 가락지를 한 바퀴 더 밀었다. 목소리를 낮췄다.

“내명부 계좌부에 전하라. 지난 석 달간 소의 처소에서 지출된 별도 수당과 상납금 이체 기록을 전부 뽑아 문서로 가져오라. 통신 기록도 함께. 소의 처소에서 외부로 발송된 모든 서찰의 접수처 목록. 반출 금지된 약재 이력도 대조하라.”

시녀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이 정도 조사는 내의원 감사 권한을 넘……”

“넘는다. 그러니 조용히 하라.”

인혜가 허리춤 비단 주머니에서 내명부 인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손이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내 직인이 찍힌 문서는 내 책임이다. 묻지 말고 가져와라.”

시녀가 인장을 받아 쥐고 깊이 허리를 굽혀 물러났다. 방 안은 정적에 잠겼다. 인혜는 창밖을 보았다.

십 년 전 의녀 하나가 쫓겨나던 날도 비슷한 그림자였다. 누군가의 약연이 부서져 있었고, 손수건에 묻은 가루를 뒤집어쓴 의녀는 신분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변론 한마디 못 했다. 인혜는 실력 있는 의녀인 줄 알면서도 절차가 끝날 때까지 지켜만 봤다.

가락지가 연속으로 두 바퀴 돌았다. 마찰음이 낮게 울렸다. 조사 결과는 하루 안에 나올 것이다. 한씨의 돈줄과 약재 이력이 드러나면 심문 전에 개입할 구실은 생긴다. 다만 의금부 판사 중 한 명이 중전 민씨의 외척과 가까운 자라, 한씨가 이미 손을 썼을 가능성이 컸다.

인혜가 눈을 감았다. 세자 이현이 채연의 약재 감별 일지 사본을 증거로 채택하려면 심문장에 직접 출석해야 한다. 전례가 드물었으나 불가능하지 않다. 눈이 다시 떠졌다. 손가락이 가락지에서 멈췄다.

“의녀 하나쯤 지키지 못하는 내명부라면, 무슨 권한을 논하겠느냐.”

비단 주머니를 다시 열자, 인장이 놓였던 자리에 내명부 비밀 문서고의 작은 철제 열쇠가 남아 있었다.

청연재비록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