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재비록
12화
포승줄이 채연의 손목에서 풀리자마자, 의금부 나졸이 어깨를 밀어 심문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돌바닥이 차가웠다. 무릎을 꿇은 채, 채연은 시선을 들었다.
심문석 맞은편 탁자 위. 부서진 약연. 조각난 숫돌이 네 조각으로 깨져 있고, 귀퉁이에 묻은 약재 가루는 어제 아침까지 채연이 찧고 있던 당귀 말린 뿌리였다. 그 옆, 다홍빛 수를 놓은 손수건 한 장. 동궁 약방에서 사라진 천산설련이 밀봉된 채 작은 목함에 담겨 있었다.
채연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왼쪽 손목을 쥐었다.
방청석 쪽에서 비단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소의 한씨가 자리에 앉아 부채를 반쯤 펼친 채 심문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고, 시선이 채연의 손목에 닿았다가 스쳤다.
의금부 판사가 목침을 내리쳤다.
“의녀 채연. 동궁 약방에서 천산설련을 절취하고 약연을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있다. 증거물을 보았느냐.”
“보았사옵니다.”
채연의 목소리는 낮고 또박했다.
“부서진 약연은 소인의 것입니다. 다만 어제 아침 당귀를 찧은 뒤 약장 아래 칸에 넣어두었사옵니다.”
“약연은 발견 당시 약장 바닥에서 나왔다. 칸에 넣었다는 주장과 다르다.”
“누군가 옮겼다는 뜻이옵니다.”
판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씨의 부채가 살짝 멈추었다.
“손수건도 네 물건이냐.”
“자수는 소인의 것입니다. 하지만 사흘 전 세탁 후 행방을 알지 못했사옵니다.”
“흥미롭군. 물건들은 전부 네 것인데, 도둑맞았다는 말이냐.”
채연은 잠시 침묵했다. 한씨의 부채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호비녀가 오전 햇살에 반짝였다.
“묻겠사옵니다.”
채연이 턱을 들었다.
“천산설련은 한습으로 인한 폐경 궐증에 쓰이는 약재입니다. 세자 전하의 탕약에는 배합된 적이 없사옵니다. 소인에게 그 약재는 불필요합니다.”
심문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판사가 목록을 한 장 넘겼다.
“네 말은 네가 약재를 훔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녀가 약재를 빼돌려 사사로이 처방하거나 외부로 유출하는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소인의 일지가 있사옵니다.”
채연이 품에서 약재 감별 일지를 꺼냈다. 손가락이 표지를 스치자 모서리에 밴 쑥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
“지난 보름간 약방 출입 시각, 조제한 약재의 중량과 감별 결과, 사용한 도구와 반납 시간이 전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입회 진행관이 일지를 받아 판사에게 건넸다. 판사가 페이지를 넘기며 몇 군데를 짚었다.
“이 기록은 네가 사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어의원의 공식 감찰 일지와 대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대조가 불가능한 것은 소인의 기록이 아니라 어의원 감찰 일지의 누락 때문이옵니다.”
방청석에서 부채 접히는 소리가 났다. 채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증거물의 약연을 보십시오. 네 조각 중 세 조각의 파단면이 건조합니다. 하지만 한 조각만 파단면에 기름 성분이 묻어 있습니다. 당귀에는 없는 성분입니다.”
판사가 증거물을 살폈다. 입회 진행관이 약연 조각을 들어 빛에 비추었다. 한 조각의 갈라진 면에서 희미한 유분 얼룩이 반사되었다.
“또한 손수건에 묻은 가루는 다홍빛 염료가 아닌 적갈색입니다. 소인이 어제 찧은 약재는 당귀입니다. 단면은 황백색이고 가루는 연한 갈색입니다. 이 색은 당귀 것이 아닙니다.”
한씨의 부채가 멈추었다. 미소가 반 박자 늦게 돌아왔다.
“손수건에 묻은 가루의 약재를 감별해주십시오. 천산설련의 분말은 회백색이며 매운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가루는——”
“의녀.”
판사의 목소리가 차갑게 채연을 잘랐다.
“네 기록은 정합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의녀의 사적 일지는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 이는 내명부와 어의원의 합동 청문 규정에도 명시된 바다.”
채연은 왼쪽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이 하얘졌다.
“증거물 감별은——”
“어의원 감정관이 할 일이다. 네가 할 일은 아니다.”
판사가 일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증거물 쪽으로 밀어놓지도 않았고, 기록을 돌려주지도 않았다.
“심문은 계속된다. 혐의가 벗겨진 것은 아니다.”
방청석에서 옷자락이 일어섰다. 한씨가 자리에서 물러나며 채연 곁을 지나갔다. 산호비녀가 채연의 어깨 높이에서 잠시 멈췄다.
“의원 나으리.”
한씨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애교 섞여 있었다.
“저 의녀의 말이 제법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다만 기록을 믿기엔, 신분이 아쉽습니다.”
채연이 고개를 들었다. 한씨가 미소를 머금은 채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오른손 약지손톱 안쪽의 검은 변색이 잠깐 드러났다 사라졌다. 한씨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심문장을 나갔다.
채연의 시선이 탁자 위 일지에 머물렀다. 증거로 채택되지 못한 기록은 거기 놓인 채로, 판사의 목침 소리가 다시 울렸다.
의금부 심문 소식이 동궁에 전해진 것은 진시(辰時)가 지나서였다. 세자는 약방문을 덮으며 일어섰다. “마패 내라. 지금 바로 간다.”
의금부 심문실은 차가웠다. 북쪽 벽을 등진 판사 세 명이 검은 관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고, 좌우로 내명부 상궁과 어의원 감찰관이 배석했다. 채연은 중앙에 무릎 꿇고 있었으며, 손목에는 포승줄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증거대 위에는 부서진 약연과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판사 중앙의 박 판사가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의녀 채연. 네 물건이 틀림없느냐.”
“소인의 것입니다.”
“그럼 이것도 네 것이냐.” 박 판사가 약연 조각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돌이 나무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났다.
채연이 시선을 들었다. “약연은 소인의 것과 크기가 비슷하나, 소인의 것은 왼쪽 귀퉁이에 금이 가 있습니다. 저것은 금 간 자리가 보이지 않사옵니다.”
좌측의 민 판사가 코웃음 쳤다. “약연을 새로 샀다면.”
“소인의 약연은 지난달 내의원 비품 기록에 등록되어 있사옵니다. 대조하시면 확인될 것입니다.”
박 판사가 서기를 흘끗 보았다. 서기가 기록부를 한 장 넘겼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측의 최 판사가 끼어들었다.
“손수건은.”
“소인의 자수와 유사하나, 소인의 손수건은 나뭇잎 무늬 아랫단에 실 끝이 한 가닥 풀려 있사옵니다. 그 흔적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상궁이 손수건을 펼쳐 아랫단을 살폈다.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실 끝은 깔끔했다. 채연의 주장과 달랐다.
민 판사가 내려다보았다. “네 말은 일리가 있다. 하나 증언을 뒷받침할 기록은. 일지라는 것은 의녀 개인의 사적 기록이다.”
채연의 손이 왼쪽 손목을 쥐었다. “소인의 감별 일지는 모든 약재 검수를 날짜와 함께 기재하고 있습니다. 도난 당일 소인은——”
“의녀의 사적 일지는 이 심문에서 증거 효력이 없다.”
문이 열렸다.
심문실 안의 모든 시선이 입구로 쏠렸다. 강청색 곤룡포가 회색빛 방 안에 떠오르는 듯했다. 세자 이현이었다. 뒤로 동궁 사약 한 명이 두루마리 두 개를 받들고 서 있었다.
판사 셋이 동시에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상궁과 감찰관이 물러섰다. 이현이 손을 들어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직접 걸어 들어와 방청석에 앉았다.
“심문을 방해할 뜻은 없다.”
목소리는 낮고 깨끗했다. 박 판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이곳에.”
“의금부 심문에 배석할 근거는, 이 사건이 본궁의 약방에서 일어난 까닭이다.” 이현이 사약에게서 두루마리를 건네받았다. “또한 이 의녀가 본궁의 병증을 관찰한 기록이 증거로 채택된다면, 그 원본을 직접 제출하기 위해서다.”
민 판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이현이 첫 번째 두루마리를 풀었다.
“이것은 의녀 채연이 매일 본궁의 복약 후 반응을 기록한 그래프다. 체온과 맥상의 변화를 시각으로 기록했다. 의녀의 공식 의무에 없는 일을 자발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두루마리가 탁자 위에 펼쳐졌다. 선 하나하나가 정밀했다. 날짜와 약재명이 먹으로 빼곡했다. 이현이 두 번째 두루마리를 풀었다.
“이것은 본궁 탕약의 중량 모니터링 일지다. 조제된 약재의 실제 중량과 처방 중량을 대조한 기록. 사라진 천산설련이 본궁의 어떤 처방에도 포함되지 않았음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박 판사가 두루마리를 가져가 세 명이 함께 들여다보았다. 페이지마다 중량 차이가 기록되어 있었고, 백부자 항목에는 체계적인 편차가 표시되어 있었다. 채연의 글씨였다.
이현은 채연을 보지 않았다. 시선은 판사들을 향해 있었다.
“본궁이 이 의녀에게서 본 것은, 의학적 정직성이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매번 같은 처방을 달이며 약재의 미세한 차이를 기록하는 인내. 신분의 제약을 알면서도 잘못된 감별에 이의를 제기하는 용기. 그런 의녀가 과연 절도와 약재 훼손을 동시에 저지를 사람인지, 심문은 그 정직성의 기록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민 판사가 땀을 닦았다. 천산설련에 관한 단서는 이미 채연의 초기 진술에도 있었다. 폐경 궐증에만 쓰이는 약재. 세자 탕약에는 배합된 적도 없다. 이제 그 주장이 기록으로 입증된 셈이었다.
최 판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하의 증언은 공식 기록으로 채택하겠사옵니다.”
소의 한씨가 방청석 구석에서 일어섰다. 특유의 향낭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전하. 의녀 하나의 성실함을 논하시기에 앞서, 약방에서 발견된 증거물을 먼저 살피심이 순서일 듯하옵니다.”
이현이 처음으로 한씨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짧게 부딪혔다.
“소의의 말씀대로 증거물부터.”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깨끗했다. 분노는 없었다. 오히려 예의를 갖춘 톤이었다. 한씨의 미소가 얇게 굳었다.
박 판사가 서기에게 명했다. “의녀의 약연 비품 등록 기록을 가져오라.”
서기가 분주히 움직였다. 심문실의 공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심문 재개까지 반 시진이 걸렸다. 내의원 비품 기록이 도착했고, 약연의 금 간 위치가 채연의 진술과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손수건의 실 끝 상태도 채연의 평소 소지품과 달랐다.
박 판사가 최종 질문을 던졌다.
“천산설련. 이 약재는 의녀 채연이 조제하는 세자 전하 탕약의 처방과 무관한 약재다. 맞는가.”
허 어의가 배석석에서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천산설련은 한습으로 인한 폐경 궐증에만 쓰입니다. 세자 전하의 병증과는 무관합니다.”
채연의 일지에도 그 기록이 있었다. 지난 석 달간 채연이 조제한 탕약 목록에서 천산설련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약재 감별 일지는 매일의 약재 사용량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었고, 천산설련 항목은 빈칸이었다.
민 판사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증거물의 신빙성에 의문이 있으며, 피의자의 동선과 약재 사용 기록이 일관됩니다. 의금부는 증거 불충분으로 의녀 채연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채연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오른손 엄지가 왼쪽 손목을 놓았다.
한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향낭이 스치는 소리가 가볍게 났다. 입가의 미소가 다시 자리 잡았다. 마치 모든 것이 가벼운 오해였다는 듯.
“다행이옵니다. 누군가 의녀를 모함한 것이라면 참으로 통탄할 일이지요. 오인으로 인한 소동이었음을 깨닫게 되어 천만다행.”
목소리는 교태를 머금고 있었으나 말끝은 차갑게 떨어졌다. 오인. 한 단어로 모든 책임이 증발했다. 한씨는 채연 쪽을 보지 않았다. 대신 이현에게 짧게 고개를 숙이고 심문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전, 한씨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뒤돌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배후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구나.”
문이 닫혔다.
이현이 일어났다. 채연 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서더니, 허리를 굽혀 두루마리를 직접 말아 건넸다. 손이 스치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수고했다.”
그 짧은 말에 채연이 허리를 깊이 굽혔다. “전하.”
이현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동궁 사약이 따라붙었고, 심문실 문이 다시 열렸다 닫혔다.
채연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목의 포승줄 자국이 욱신거렸다. 두루마리를 품에 안자 종이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의금부 청사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불었다. 날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채연은 잠시 담장 아래 서서 어머니의 수기를 품에서 꺼냈다. 두루마리 사이에 끼워져 있던 수기는 심문 내내 품속에 있었다.
표지를 열었다. 보태음 금기 조항이 적힌 페이지를 넘기는데 손끝에 딱딱한 감촉이 걸렸다.
접힌 종이 한 장이 페이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오래된 종이였다. 먹은 바랬으나 글씨는 선명했다. 경신년 시월 초이튿날이라는 날짜가 찍혀 있고, 그 아래로 짧은 진료 기록이 적혀 있었다.
‘인삼, 감초, 천오두(天烏頭) 투약—환자 특이 반응 관찰됨.’
채연의 손가락이 멎었다. 날짜. 경신년 시월 초이튿날.
세자 모후의 투약 일지에서 찢겨 사라진 바로 그 날짜였다.
바람이 쪽지 모서리를 흔들었다. 채연은 종이를 꼭 쥐었다. 손끝이 떨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