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재비록
13화
처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시가 한참 지나 있었다.
채연은 촛불 한 점에 의지해 탁자 앞에 앉았다. 손목의 포승줄 자국은 아직 선명했고, 품속의 수기는 체온으로 데워져 있었다. 두루마리 사이에서 꺼낸 쪽지를 펼쳐 놓았다.
경신년 시월 초이튿날. 인삼, 감초, 천오두 투약. 환자 특이 반응 관찰됨.
먹물 냄새는 이미 바랬고, 종이 가장자리는 닳아 있었다. 수년을 접힌 채로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채연은 먼저 인혜가 건넨 모후 투약 일지 사본을 펼쳤다. 이현이 직접 필사한 기록이었다. 경신년 시월 초하루부터 시월 사흗날까지의 페이지를 나란히 놓았다. 초하루 다음은 시월 사흗날이었다. 이틀분이 찢겨 있었다.
어머니 수기의 보태음 금기 조항 쪽을 열었다.
‘보태음 중 인삼·감초는 조화를 이루나, 백부자 대신 천오두가 혼입될 경우 산모의 경련과 태중 독성 축적을 일으키며, 조제자는 유관속 배열의 차이로 감별해야 한다.’
쪽지의 약재 구성과 수기의 경고가 포개졌다. 인삼, 감초, 천오두. 세 가지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찢겨 사라진 시월 초이튿날과 초사흗날 사이에는, 이 쪽지가 기록한 바로 그 투약이 있었던 것이다.
채연은 왼쪽 손목을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감쌌다.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모후의 보태음에는 백부자가 아닌 천오두가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것을 알고 기록했다. 상부는 그날의 공식 의안을 찢어 없앴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쪽지를 수기 속에 숨겼다.
누군가 기록을 찢기 전에, 어머니가 먼저 한 줄을 남긴 것이다. 증거로서가 아니라, 훗날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기록으로서.
촛불이 흔들렸다. 채연은 쪽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원래 자리로 되돌렸다. 그리고 모후 투약 일지의 찢긴 날짜 옆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
‘경신년 시월 초이튿날—인삼, 감초, 천오두. 어머니 수기 소지. 보태음 금기 조항 일치.’
먹이 마르는 동안 수기와 투약 일지를 따로 포개어 품에 넣었다. 촛불을 끄고도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밤새 바람이 처소 창가를 스쳤다.
동이 트기 전, 채연은 벌써 약방 복도에 서 있었다. 하늘은 막 짙푸른 빛을 벗어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동궁 출입 동패를 손에 쥔 채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 하나 복도에 울리지 않았다.
약방 서고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손바닥으로 밀자 문이 안으로 열렸다. 이전처럼 소리 없이.
서고 안은 어둠이 짙었으나 안쪽 탁자 위에 촛불 한 점이 타고 있었다. 이현은 이미 깨어 있는 듯, 백색 도포 차림으로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약서 한 권이 펼쳐져 있었으나 시선은 페이지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채연이 허리를 굽혔다.
“전하.”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 아래 그늘이 전보다 얕아졌으나 관자놀이의 핏줄은 여전히 투명하게 비쳤다. 그가 손가락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채연은 품에서 어머니의 수기와 모후 투약 일지 사본을 꺼내 탁자 위에 나란히 놓았다. 가장 위에는 접힌 쪽지를 펼쳐 올렸다.
“경신년 시월 초이튿날입니다.”
이현의 시선이 쪽지에 닿았다. 검지가 한 글자씩 짚으며 천천히 움직였다. 인삼, 감초, 천오두. 마지막 글자에서 손가락이 멎었다. 채연은 수기를 펼쳐 보태음 금기 조항을 가리켰다.
“모후께서 임신 중 복용하신 보태음의 구성입니다. 이 쪽지는 소인의 어미가 같은 날 작성한 진료 기록입니다. 약재 구성이 모두 일치합니다.”
말없던 이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찌해서.”
“정식 의안에는 이날의 기록이 없습니다.”
채연이 투약 일지 사본을 펼쳐 날짜 사이의 찢긴 자국을 보였다. 초하루 다음 페이지의 거친 가장자리, 시월 사흗날 앞면의 찢긴 흔적이 차례로 드러났다.
“누군가 두 날짜의 기록을 절취했습니다. 소인의 어미는 공식 기록이 사라지기 전에 이 한 줄을 남겼습니다.”
이현의 손이 쪽지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종이와 닿는 소리가 조용한 서고 안에 스몄다. 검지가 먹 자국 위를 한 번 더 더듬었다.
그가 쪽지를 들여다보는 동안, 촛불이 두 번 깜빡였다. 아주 천천히, 이현의 시선이 쪽지에서 채연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등뼈가 차가워지는 것이 채연에게도 느껴졌다.
“선천적 허약이 아니었군.”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마지막 음절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내 병은, 태중에 이미 시작된 것이었어.”
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기의 다른 페이지를 펼쳐 천오두 중독 증상을 가리켰다. 태동 항진, 발열, 하혈, 신생아 경련, 청색증, 허약 체질.
이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쪽지를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접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허 어의가 백부자라 단언했던 그 약재. 모후의 보태음에 들어갔던 것도 사실은 천오두였다.”
채연은 수기의 다른 쪽을 가리켰다.
“소인의 어미는 당시 이 사실을 상부에 알렸으나, 묵살당하고 결국 내쳐졌습니다.”
이현의 손이 쪽지를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깊고 어두운 무언가가 눈동자 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일지는 네가 보관하라.”
채연에게 모후 투약 일지를 밀며 말했다.
“네게 들어간 지 오래다.”
채연이 고개를 숙여 받아들었다. 이현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청옥으로 깎은 작은 옥패 하나가 손바닥 위에 놓였다. 세자 직인의 절반이 음각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동궁 내 모든 서고에 출입할 수 있다. 의안고에는 통하지 않으나, 내 서고의 자료는 네 뜻대로 열람해도 좋다.”
채연이 옥패를 바라보았다.
“전하. 이는 공식 의안을 대신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알고 있다.”
이현이 짧게 답했다.
“하지만 공식 의안은 찢겼다. 의녀는 의안을 열람할 권한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찢기지 않은 기록을 찢기지 않은 방식으로 찾는 것뿐이다.”
채연이 옥패를 두 손으로 받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와 닿았다. 옥의 무게가 포승줄 자국 위로 눌렸다.
“소인이 다음에 확인할 것은 의안고의 삭제된 날짜 기록입니다.”
“찢긴 면을 어떻게 찾을 셈이오.”
이현의 물음에 채연은 수기의 등을 짚었다.
“찢긴 책에는 반드시 맞물리는 면이 남습니다. 의안고의 공식 의안에서 누락된 날짜의 전후 페이지를 대조하는 것만으로도 흔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현이 한참 채연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가 무턱대고 옥패를 주었다고 생각지 마라. 네가 의금부에서 네 기록으로 버텨낸 것을 보았다. 네 어미가 한 줄을 남긴 이유를 이제 알겠다.”
채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촛불 너머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현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눈동자는 정확히 채연을 향하고 있었다.
“조사는 이제부터다. 네가 찾은 단서는 나를 통해야만 힘을 갖는다. 나는 네가 필요하고, 너 또한 그럴 것이다.”
채연이 옥패를 품속에 넣었다. 어머니의 수기와 나란히, 천주머니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의금부에서 들어 왔을 때와 같은 품속이었지만 무게는 조금 달랐다.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서고의 어둠이 한 겹 벗겨지며 탁자 위의 수기와 쪽지가 흐릿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이현이 일어나 창가로 두어 걸음 다가섰다.
“의안고에 갈 때는 반드시 동궁을 먼저 거쳐라. 네가 무슨 기록을 찾든, 나를 모르는 채로 위험에 빠뜨리지 마라.”
채연이 일어나 허리를 깊이 굽혔다. 품속에서 옥패가 낡은 수기와 부딪혀 작은 소리를 냈다.
“명심하겠습니다.”
서고 문이 닫혔다. 이현은 창가에 선 채로, 점점 밝아지는 하늘 빛을 등 뒤로 받으며 손바닥 위의 접힌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종이 주름 하나 펴지 않은 채로.
의금부 청사 밖에서 바람이 쪽지 모서리를 흔들었다. 채연은 종이를 접어 수기 안쪽으로 밀어 넣고, 두루마리째 품에 안았다. 손목의 포승줄 자국 위로 소맷자락을 내렸다.
동궁에서 나온 지 채 한 시진. 하늘은 이미 환했다.
하급 의녀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채연 의녀…… 주상궁 마마께서 내명부 후원 정자로 오라 전하셨사옵니다.”
채연이 발걸음을 멈췄다.
“지금이옵니까.”
“곧바로.”
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품속의 수기를 한 번 더 눌러 확인하고, 내명부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내명부 후원 정자는 늦은 오전의 빛 속에 조용했다. 회양목이 정자 사방을 둘러싸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인혜는 정자 안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손끝이 느렸다.
“의금부 심문이 끝났다고 들었소.”
채연이 정자 계단 아래서 허리를 굽혔다.
“주상궁 마마.”
“올라오시오.”
채연이 계단을 올랐다. 인혜의 건너편에 앉으라는 손짓이 있었으나, 채연은 서 있었다.
인혜가 왼손 엄지의 백옥 가락지를 한 바퀴 돌렸다.
“천산설련이 사라진 동궁 약방에는 출입 동패가 필요하오. 의녀의 동패 외에 다른 흔적은 없었다고 들었소.”
“소인이 훔치지 않았사옵니다.”
“알고 있소.”
인혜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찻잔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맑았다.
“다만 이번 일로 배운 것이 있을 터. 궁중에서 기록은 누군가에게 칼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채연의 손가락이 소맷자락 안으로 들어갔다. 수기의 모서리를 눌렀다.
“십 년 전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사옵니까.”
인혜의 손가락이 멎었다.
정자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굳었다. 인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연한 갈색 눈이 채연을 뚫어보듯 고정되었다.
“질문이 정곡을 찌르는군요.”
“소인은 다만——”
“십 년 전, 어떤 의녀가 있었소.”
인혜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가락지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약재에 관한 일로 오명을 썼소. 그 의녀는 자신의 기록을 남겼고, 그 기록 때문에 쫓겨났소.”
가락지가 세 번째 바퀴에서 멎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있었음에도.”
채연의 호흡이 잠시 멎었다.
“그 의녀의 기록은……”
“여기까지.”
인혜가 손을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다물고 숨을 들이쉬었다.
“의녀, 그대가 품고 있는 기록은 그대만의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오. 어떤 기록은 읽는 순간 읽는 자까지 바꾸어 버리오.”
채연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주상궁 마마. 소인은 멈출 수 없사옵니다.”
인혜의 눈빛이 흔들렸다. 찻잔을 든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 말투.”
인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자 기둥에 손을 짚고 잠시 후원을 바라보았다. 등이 채연을 향했다.
“십 년 전에도 멈출 수 없다던 의녀가 있었소. 지금 그대와 똑같은 말을 했소.”
채연이 고개를 들었다.
인혜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소. 그것이 그 의녀를 구해준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오.”
가락지가 다시 한 바퀴 돌았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가시오. 지금은 더 할 말이 없소.”
채연이 일어났다. 허리를 깊이 굽히고 정자 계단을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인혜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회양목 그림자가 당의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채연의 처소 문을 닫자 어둠이 내려앉았다. 바깥은 이미 밤이었다. 촛불 하나를 켜고, 수기를 품에서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손목의 멍이 촛불 아래서 짙게 드러났다.
약재 감별 일지의 새 쪽을 펼쳤다. 붓에 먹을 찍었다.
‘경신년 시월 초이튿날 — 보태음 투약 기록. 인삼, 감초, 천오두. 중전 민씨 복용.’
붓을 내려놓았다.
이미 의금부 심문 전 대조했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제 쪽지를 통해 천오두가 실제로 투여된 날짜가 모후의 의안 공백과 정확히 겹친다는 점이 확증되었다.
채연은 수기의 표지를 다시 열었다. 보태음 금기 조항이 적힌 페이지를 펼쳤다.
착잡한 약재 목록들이 어머니의 손글씨로 빼곡했다. 그 아래 천오두의 독성 증상이 항목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태동 항진, 발열, 하혈, 신생아 경련…
채연의 손가락이 멎었다.
종이의 가장자리, 금기 조항 아래 여백에 다른 글씨가 있었다. 붉은 먹이었다. 너무 작아 촛불을 가까이 대야 했다.
‘이 약재를 쓴 모든 이가 침묵당했다. 단 한 사람, 기록을 남긴 자를 찾아라.’
채연의 손끝이 붉은 글씨를 따라 내려갔다. 어머니의 필체가 아니었다. 먹 색도, 획의 기울기도 달랐다. 누군가 어머니의 수기를 건네받아 이 글을 덧쓴 것이 분명했다.
기록을 남긴 자.
채연은 붓을 다시 집었다. 감별 일지의 ‘보태음’ 항목 아래에 천천히 한 줄을 추가했다.
‘모후 투약 의안 공백기 — 원본 확인 필요.’
붓을 놓고 종이를 말렸다. 촛불이 흔들렸다. 수기와 감별 일지를 나란히 포개어 품에 넣었다.
어머니가 남긴 기록. 그리고 어머니의 수기에 덧쓰인 다른 누군가의 붉은 글씨.
그 한 사람을 찾는 것. 그것이 다음 조사의 방향이었다.
채연이 촛불을 끄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수기의 무게가 가슴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