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재비록
14화
동궁 약방의 촛불이 채연의 손끝에서 마지막으로 흔들렸다.
밤새 정리한 약재함을 닫고, 탕자에 남은 잔여분을 확인하던 순간이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뛰어오는 소리였다.
“의녀 나리!”
문이 열리기 전에 비명이 먼저 들렸다. 하급 의녀 하나가 문틀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송 상궁이…… 탕약을 드시고……”
채연이 탕자를 돌아보았다. 송 상궁에게 건넨 탕약의 잔여분이 아직 사기 그릇에 남아 있었다.
“증상은.”
“경련이…… 입술이 파래지고……”
채연의 손이 약재 가위를 내려놓았다.
“탕약 찌꺼기를 가져오너라.”
그러나 하급 의녀가 대답하기 전에 더 무거운 발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군화 소리였다.
의금부 도사가 문을 열었다. 뒤로 병사 넷이 횃불을 들고 섰다. 새벽의 푸른빛이 횃불에 밀려났다.
“의녀 채연.”
도사의 손에 포승줄이 들려 있었다.
“방금 송 상궁이 사망했다. 네가 조제한 탕약에서 독초가 검출되었다.”
채연의 손이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손목의 멍이 소매 아래로 스쳤다.
“무슨 독초인지 확인하셨사옵니까.”
“천오두다.”
도사가 탕자 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병사 하나가 사기 그릇을 집어 들었다.
“잔여분에서 비린내가 난다. 감별은 내의원에서 할 것이다.”
채연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천오두는 생것일 경우에만 비린내가 납니다. 탕약으로 달이면 맥각과 유사한 쓴맛으로 변하옵니다.”
도사의 눈썹이 올라갔다.
“지금 네 입으로 독초의 성상을 논하는 것이냐.”
“사실이옵니다.”
“입 다물어라.”
도사가 손을 들자 병사 둘이 채연의 팔을 잡았다. 포승줄이 손목을 감았다. 채연이 입술을 다물었다. 저항하지 않았다.
병사 하나가 약재함을 열었다. 채연의 작업대 위에는 오늘 새벽 정리한 약감별 일지가 펼쳐져 있었다.
도사가 일지를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다 멈췄다.
“보태음…… 금기 약재…… 천오두……”
도사의 시선이 채연에게로 돌아왔다.
“네가 천오두를 연구하고 있었구나.”
채연의 손가락이 포승줄 아래서 움직였다. 왼쪽 손목을 쥐려는 버릇이었으나, 포승에 막혔다.
“그 일지는 모후의 투약 기록을 대조하기 위한……”
“네 일지에 네가 적었고, 네 탕약에 독이 들었다.”
도사가 일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끌고 가라.”
동이 트기 직전, 궁궐 복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병사 넷이 앞뒤로 서고, 채연은 포승줄에 묶인 채 그 사이를 걸었다. 손목의 줄이 걸을 때마다 옷감에 쓸렸다.
군화 소리가 돌바닥에 울렸다. 촛불이 꺼진 복도에는 횃불만이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내명부 후원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에서 인혜가 걸음을 멈췄다.
등롱 아래, 인혜의 손에는 아직 아침 차를 나르던 찻잔 쟁반이 들려 있었다. 감색 당의 소매가 새벽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인혜의 눈이 포승줄에 묶인 채연의 손목으로 갔다. 이어 도사의 얼굴로, 병사들의 횃불로, 그리고 다시 채연의 얼굴로 돌아왔다.
왼손 엄지의 백옥 가락지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채연이 고개를 들었다. 인혜와 눈이 마주쳤다.
두 바퀴.
채연의 입술이 열리려다 닫혔다. 인혜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온화함도, 놀람도, 분노도.
세 바퀴.
도사가 인혜를 향해 목례했다.
“주상궁 마마. 사약 사건 관련자입니다.”
인혜가 입술을 다물고 숨을 들이쉬었다. 찻잔 쟁반을 든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
채연의 시선이 인혜의 손에 머물렀다. 쟁반을 든 손은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왼손 엄지의 가락지는 돌고 있었다. 멈추지 않았다.
가락지가 다섯 번째 바퀴를 돌 때, 인혜가 몸을 반쯤 돌렸다. 복도 벽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길을 비켜준 것이었다.
채연의 걸음이 멈칫했다. 포승줄이 어깨를 잡아당겼다.
“주상궁 마마.”
채연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인혜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은 이미 복도 저편, 동궁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백옥 가락지가 마지막으로 한 바퀴 돌고 멈췄다.
병사가 채연의 등을 밀었다.
“가라.”
채연이 걸음을 옮겼다. 인혜의 옆을 지나는 순간, 쟁반 위의 찻잔이 미세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인혜의 손이 떨린 것은 아니었다. 바람이었다.
채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인혜도 돌리지 않았다.
군화 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질 때까지, 인혜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찻잔 쟁반을 든 손은 여전히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찻잔의 수면에는 잔잔한 물결이 일고 있었다.
가락지를 만지던 왼손 엄지가 천천히 손바닥 안으로 말려들었다.
군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인혜가 발길을 돌렸다. 내명부 처소로 향하는 걸음은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
복도에 걸린 등롱이 하나, 바람에 꺼졌다.
인혜는 멈추지 않았다.
채연은 포승줄에 묶인 손을 가슴께로 올렸다. 품 안에 어머니의 수기와 약재 감별 일지가 그대로 있었다. 의금부 도사가 압수한 것은 작업대 위의 일지 한 권뿐이었다. 안쪽에 품은 것은 건드리지 않았다.
손목의 멍이 포승줄 아래서 욱신거렸다.
채연은 눈을 감았다 떴다.
인혜의 가락지가 멈추지 않고 돌던 모습이 눈앞에 남아 있었다. 그 침묵이 보호인지 배신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길을 비켜준 그 한 걸음이, 가락지가 다섯 바퀴째 돌던 그 순간이, 채연의 가슴께를 무겁게 눌렀다.
의금부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현이 침전을 나서기도 전에 채연은 이미 의금부 정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동궁 침전은 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이현이 탕약 그릇을 막 밀어낸 참이었다. 미닫이 창 너머로 희끄무레한 빛이 창호지를 밝히고 있었다.
내관이 문 밖에서부터 뛰어왔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전하. 급보입니다.”
이현이 눈을 떴다. 약기운에 가라앉은 동공이 움직였다.
“말하라.”
“의금부에서 의녀 채연을 체포해 갔사옵니다. 동궁 약방의 천산설련 도난과 사약 오투 혐의라 하옵니다.”
이현의 손이 이불보를 움켜쥐었다. 마른 손마디가 하얗게 섰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고, 어깨가 기침을 먼저 토해냈다.
“전하!”
내관이 달려들었다. 이현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기침이 걷히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누가 지시했는지, 증거가 무엇인지, 지금까지 확인된 전모를 전부 수집하라.”
“전하, 아직 진정을…”
“듣지 않았소?”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창백했으나 눈동자만은 바짝 말랐다.
“의녀 채연은 동궁 소속이다. 동궁 사람을 의금부가 아무 근거로 체포해 갔으면, 그 근거를 먼저 밝혀야 하는 것이 또한 동궁이다.”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더 숨을 골랐다.
“주상궁 인혜께도 연락을 넣어라. 내명부에 출입한 약재 이력을 알고 계실 분은 그분뿐이다.”
내관이 망설였다. 이현이 덧붙였다.
“네가 직접 가라. 서신은 내가 쓴다.”
내관이 못 박히듯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이현은 이불을 걷어냈다.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으나 붓을 집는 동작은 지체되지 않았다. 먹을 갈며 세 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먹물에 거품이 일었다.
그가 붓을 들었다. 서찰의 첫 줄이 종이를 찢을 듯 내려앉았다.
‘의금부 심문에 앞서 동궁 약방 비품 대장과 출입 기록을 정식으로 요청하노니.’
두 번째 문장에서 붓이 멎었다. 주상궁에게는 사적으로 닿는 말이 필요했다. 인혜가 채연을 두둔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전보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침묵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침묵만으로 충분치 않사옵니다.’
그는 봉투를 접어 내관에게 건넸다.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종이는 반듯했다.
“몸을 추스르겠다. 네가 돌아올 때쯤이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전하.”
“가라.”
내관이 물러난 침전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현은 벽에 걸린 약재 목록을 올려다보았다. 백부자와 천오두, 그 사이에 난 작은 붉은 선 하나가 아직도 그어져 있었다.
한낮의 의금부 수감실은 어둠이 아니라 축축한 회색이었다. 벽의 석재는 땅속 깊이 박힌 것처럼 서늘했고, 바닥에는 짚단조차 깔려 있지 않았다.
채연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순간이 길었다. 손목에는 포승 자국이 붉게 올라 있었고, 의금부 나졸이 검신할 때 당의 소매를 잡아당겼던 자리도 따끔거렸다.
그들은 약통과 가위, 돋보기를 압수했다. 그러나 속옷 안주머니까지는 손을 대지 않았다.
채연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이곳은 냄새도 없었다. 약재도, 쑥도, 탄내도 없는 공간이었다. 의녀가 의녀임을 입증할 단 하나의 감각이 사라진 곳.
손을 더듬었다. 당의 안쪽을 열자 두툼한 종이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어머니의 수기.
꺼내 들자 북받칠 듯한 것이 올라왔으나 삼켰다. 표지가 손바닥 온기로 조금씩 따뜻해졌다. 어둠 속에서는 글씨가 보이지 않았지만, 본문의 위치를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었다.
경신년 시월 초이튿날. 보태음. 천오두.
그리고 붉은 먹으로 쓰인 낯선 글씨. 이 약재를 쓴 모든 이가 침묵당했다.
채연은 수기를 움켜쥐었다. 손톱이 표지에 박혔다. 종이 가장자리가 살짝 구겨지는 소리가 작은 쥐 울음처럼 났다.
어머니는 이 기록을 남기고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인혜는 말했다. 십 년 전에도 똑같은 의녀가 있었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서늘함을 기억했다. 속에 담아두었으나 지워지지 않은 문장이 있었다. 지키지 못한 것을 지금 지키는 데는 다른 대가가 붙습니다.
인혜의 대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기록은 그 침묵의 틈으로 건네진 것임을 안다. 기억을 담아 살아남은 유일한 증언이라는 것을.
채연이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도 눈동자가 움직이는 방향이 있었다. 위쪽, 조금 오른쪽. 낮은 천장에 난 작은 틈새로 한 가닥 빛이 벽을 긋고 있었다.
“기록을 남긴 자를 찾아라.”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입술만 그 모양을 따라 움직였다. 수기를 가슴께로 끌어당겨 품 안에 밀어 넣었다. 천천히, 등을 벽에 붙였다.
이 기록은 여기서 무기가 되어야 한다.
의금부 심문에서는 신분이 앞설 것이다. 증거는 묵살될 것이고 절차는 제한될 것이다. 그러나 수기 속의 문장 하나하나는 삭제된 의안의 공백과 정확히 맞물려 있었다. 보태음의 금기와 중전의 투약 날짜, 약재의 치환과 절취된 장부. 그 교차점을 아는 사람은 이 궁중에 많지 않았다.
채연은 눈을 감았다. 석벽의 냉기가 등을 타고 내려왔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이 수기를 손에 쥔 것은 언제였을까.
그때도 이런 어둠 속이었을까.
빛줄기가 조금 더 길어졌다. 바깥은 아직 한낮이었다. 채연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멍든 손목 아래로 손가락이 여전히 붓을 쥐는 모양으로 접혀 있었다. 필사하는 손. 기록하는 손.
그녀는 그 손을 품 안의 수기 위에 포갰다.
“이번에는.”
말이 목구멍을 떠나지 않았다. 더 이상 덧붙이지 않았다. 채연은 그대로 어둠을 응시했다.
동궁 침전에 다시 사람의 기척이 들었다. 내관이 돌아온 것이다. 이현은 약탕기를 옆으로 밀어둔 채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다.
“주상궁께서 받으셨사옵니다.”
“읽으셨느냐.”
“읽으시고, 알겠다 하셨사옵니다.”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드리운 그늘이 얕아지지 않았지만, 시선은 밖으로 향해 있었다. 창을 조금 열었다. 오전의 찬 공기가 흘러들었다. 어깨로는 떨림이 왔지만 그는 기대는 팔을 거두지 않았다.
“이번엔 반드시 지키겠다.”
목소리는 혼잣말이었다. 입김이 창틀에 부딪혀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