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재비록
17화
촛불이 심문실 안을 간신히 밀어내고 있었다.
의금부 도사가 목록을 들었다. 그 옆으로 작은 탁자, 증거물들이 포목에 싸여 놓여 있었다. 채연의 약감별 일지, 탕약 찌꺼기, 약연 잔여 가루. 그리고 지금, 그가 집어 든 것은 어제 심문에서 확인되지 않은 물건이었다.
“이 수기는 무엇이냐.”
채연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었다. 두 손은 여전히 포승에 묶여 있었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진료 기록입니다.”
“어머니?”
“고故 의녀 윤소영의 수기입니다. 경신년부터 을축년까지, 내의원과 동궁 약방에서 작성된 비공식 진료록이지요.”
도사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가 표지를 넘기자 바스락 소리가 심문실 구석까지 닿았다. 첫 장에 단정한 해서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어째서 이 수기를 지금 제출하는가.”
“어제 심문에서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도사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허 어의가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채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관자놀이의 화상 흉터가 촛불에 붉게 부풀어 보였다.
채연이 이어 말했다.
“물으신다면 답하겠습니다. 그 수기에는 내의원 공식 의안에서 삭제된 사례가 최소 세 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사례 말이냐.”
“천오두와 백부자의 혼용 오진입니다.”
허 어의의 팔짱이 풀렸다.
“망발을……”
“첫째, 임신 팔 개월 차의 빈모 증세에 처방된 백부자에서 천오두가 검출된 사례. 둘째, 출산 직후 어혈 처방에서 백부자 대신 사용된 천오두. 셋째, 이것은 송 상궁 사건과 정확히 일치합니다만——”
채연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체기로 오인된 천오두 중독입니다.”
도사가 수기를 내려놓았다. 표지가 젖혀지며 마지막 장이 보였다.
“공식 의안에서 삭제되었다는 근거는.”
“어머니는 그날의 날짜와 처방전 번호를 기록했습니다. 내의원 의안 제47책과 대조하면 됩니다.”
허 어의가 한 걸음 나섰다. 손끝이 살짝 떨려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수기는 개인 기록에 불과하다. 증거로 삼을 수 없어.”
“내용의 진위는 의안과 대조하면 판명됩니다.”
채연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이현을 치료할 때도 그랬다. 의학적 사실에 관해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거기에는 직접적 증거가 될 만한 사안도 적혀 있습니다.”
도사가 다시 수기를 집었다.
“말하라.”
“천오두 중독의 3대 징후입니다.”
채연이 숨을 들이쉬었다. 포승줄이 손목에 닿아 붉게 긁힌 자국이 드러났다.
“첫째, 손톱 아래 검은빛 변색. 둘째, 불규칙한 맥박——느려졌다 빨라졌다를 반복합니다. 셋째, 발작적 혼절. 의식이 있다가도 갑자기 호흡 곤란과 함께 의식을 잃습니다.”
심문실 안이 조용해졌다. 촛농이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이 세 가지는 세자 저하께서 유년기부터 보이신 증상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허 어의의 얼굴이 굳어졌다.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한 번, 두 번. 좌측 눈가의 흉터가 떨리기 시작했다.
채연은 멈추지 않았다.
“또한 이번 송 상궁의 사약 사건에서 사용된 약재 배합이——”
말하며 수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사께서 보시는 그 기록, 장을 넘기시면 두 번째 사례가 있습니다. 천오두 이 돈 오 푼. 감초 이 돈. 오약 일 전. 계지 오 푼. 이 배합은——”
“송 상궁의 사약과 같다는 말이냐.”
“탕약 찌꺼기 분석서와 대조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사가 보좌관에게 손짓했다. 보좌관이 서류를 넘겨주자, 분석서의 약재 목록과 수기의 기록을 번갈아 확인했다. 잠시 후 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치한다.”
허 어의가 손을 내저었다.
“이건…… 이건 터무니없는……”
말끝이 사라졌다. 도사의 눈이 그를 향했다.
“허 어의. 이 수기에 대해 더 알고 계신 것이 있소.”
“개인 기록으로 내의원을 모독하는 짓이다.”
허 어의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그 끝은 갈라져 있었다.
“의녀가 공식 의안도 아닌 것을 근거로 어의원의 처방을 논하다니. 의원의 품격을 짓밟는 짓이야.”
“허 어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심문실 오른편, 주상궁 인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왼손 엄지의 백옥 가락지가 촛불에 반짝였다.
“어의원의 품격도 중요하지요. 하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록의 무게는 같을 수 없사옵니다.”
허 어의가 인혜를 바라보았다. 인혜는 단정히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였다. 가락지를 만지작거리는 손끝만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기록 대조의 기회는 주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사의 표정이 변했다. 주상궁이 심문에서 입장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명부에서도 이 사안을 주시하고 계신 겁니까.”
“내명부는 언제나 진실을 살피는 자리입니다. 도사께서도 그러실 테지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다만 의안 일부가 의도적으로 은폐되었다면, 그 또한 죽음의 원인입니다. 이를 덮는 것은 또 하나의 독이 되겠지요.”
말은 도사에게 했지만, 허 어의의 손에 쥐인 주름이 일그러졌다.
채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인혜의 발언이 심문실 전체를 가로지르는 동안, 그녀는 시선을 수기 위에 고정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글씨가 촛불 아래 잉크 자국처럼 번져 보였다.
도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금부는 피의자 채연이 제출한 수기와 내의원 의안 제47책의 대조를 승인한다. 아울러——”
잠시 뜸을 들였다.
“세자 저하의 진료 기록을 이 수기의 세 번째 사례와 대조하도록 하라.”
허 어의의 눈이 커졌다. 보좌관이 기록하기 시작했다. 붓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만 심문실에 남았다.
도사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오늘 심문은 이걸로——”
“한 가지 더.”
채연이 포승줄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수기의 마지막 장을 봐주십시오.”
도사가 이미 닫혀가던 표지를 다시 넘겼다. 마지막 면. 날짜와 도장이 찍힌 일지 한 줄이 작게 박혀 있었다.
“거기에 적힌 날짜와 내의원 도장은, 어머니가 그날 정식으로 보고서를 제출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보좌관이 수기를 들여다보며 읽었다.
“경신년 시월 초사흗날…… 내의원 인보가 찍혀 있습니다.”
“공식 의안에서 같은 날짜가 삭제되어 있다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은폐한 증거가 됩니다.”
허 어의가 돌아섰다.
“도의다.”
그러나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심하게 떨렸다. 손등의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인혜가 가락지를 한 번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허 어의의 손 위에 멈춰 있었다. 떨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절차대로 진행하시지요, 도사.”
도사가 목례했다.
“증거물은 봉인 보관한다. 익일 내의원 의안 대조 후 재심을 속개하겠소.”
심문실 문이 열렸다.
채연이 일어났다. 무릎이 저려 비틀거렸지만 곧 중심을 잡았다. 군관 두 명이 양옆에 붙었다.
복도엔 저녁 빛이 얇게 깔려 있었다. 창호지 너머로 노을이 번지며 석조 바닥에 붉은 띠를 만들고 있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인혜였다. 당의 자락이 바닥에 끌리지 않게 한 손으로 걷어 쥐고 있었다. 발걸음이 채연 쪽에서 멈췄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인혜의 왼손이 움직여 가락지를 한 번 더 돌렸다. 천천히, 각을 세어가듯. 그러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이내 발걸음을 돌려 내명부 쪽으로 사라졌다.
채연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오른손을 들어 왼쪽 손목을 쥐었다. 포승줄이 닿았던 자리, 어머니가 자주 쥐어주던 자리였다. 손가락이 뼈와 뼈 사이를 눌렀다.
‘어머니…… 마침내 기록이 되었습니다.’
목울대가 움직였을 뿐 소리는 내지 않았다.
군관이 재촉했다. 채연이 발을 떼며 구금실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 반대편에서 허 어의가 걸어나왔다. 손을 등 뒤로 깍지 껴 쥐었으나 떨림은 감춰지지 않았다. 채연의 뒷모습을 피해 곧장 어의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궁 침전. 촛불이 반쯤 줄어 있었다.
이현은 침상에 걸터앉아 내관이 전한 구두 보고를 듣고 있었다.
“……상황은 이와 같사옵니다.”
“수기의 세 징후가 내 병과 일치한다.”
“예, 전하. 도사께서 대조를 명하셨습니다.”
이현이 손을 들어 내관을 물렸다.
침전 안에 혼자 남았다. 창호지 밖으로 달빛이 얇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손톱을 들여다보았다.
유년기, 손톱 아래 검은 기운이 돌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마다 탕약 냄새를 맡았다. 백부자와 다른 무언가. 비린 듯하면서도 쓴——
‘그것이 천오두였다.’
이현이 천천히 손톱을 만졌다. 지금은 변색이 옅어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것과 같은 무늬가…… 내게도 있었소.”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이 향하는 곳은 침전 안이 아니었다.
이내 상체를 일으켜 서안으로 걸어갔다. 붓을 들었다. 먹을 갈았다. 먹 가는 소리가 침전 안을 차분히 메웠다.
종이 한 장을 펼쳤다. 붓끝이 종이에 닿았다.
‘의녀 채연에게.’
잠시 멈췄다. 관자놀이를 검지로 두드렸다.
‘그대의 수기를 보았소. 세 가지 징후. 손톱의 검은빛. 불규칙한 맥박. 발작적 혼절.’
붓이 다시 움직였다.
‘나 또한 어머니의 것과 같은 무늬를 가졌었소. 당신의 수기가 옳소.’
마지막 글자를 내리고 붓을 놓았다.
종이를 접어 봉함에 넣었다. 녹인 밀랍으로 봉인하고 세자 인장을 눌렀다. 인장이 밀랍에 파고드는 소리가 작게 났다.
종이를 내관에게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 의금부로.”
봉서가 내관의 손에 실려 문을 나설 때, 이현은 서안에 손을 짚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그의 손등에 닿아 손톱의 빛깔을 적막하게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