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재비록
20화
의금부 심문실은 북향이었다. 진시가 지났는데도 촛불이 두 개나 켜져 있었고, 심지 끝이 검게 휘어 있었다.
채연은 중앙에 무릎 꿇고 있었다. 손목의 포승 자국은 검붉게 변해 있었고, 입술에는 흰 각질이 일었다. 도사가 목침을 집어 들려는 순간, 심문실 문이 열렸다.
“잠시 멈추시오.”
주상궁 인혜였다. 감색 당의 소매 밖으로 백옥 가락지가 드러나 있었다. 그 뒤로 내명부 서기 나인 하나가 붉은 칠을 한 문서함을 들고 따랐다.
의금부 도사가 목침을 내려놓으며 일어났다.
“주상궁 마마께서 심문실에 무슨 일이시옵니까.”
인혜는 대답하지 않고 문서함을 열었다. 내명부 직인이 찍힌 공문 한 장을 꺼내 도사의 책상 위에 올렸다. 종이가 바람에 살짝 들썩였다.
“의금부 심문록 제12조를 확인하시겠소.”
도사가 공문을 집어 들었다. 눈이 글자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의녀의 증언은 참고 사항으로 기재하며, 증거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조항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 조항의 근거가 무엇인지 아시오.”
“내명부 규례라 알고 있사옵니다.”
인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런데 그 규례는 의금부 심문 절차에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명부 보충 조항이 이미 십 년 전에 공포되었소.”
도사의 손이 멈췄다.
“십 년 전이면……”
“그렇소. 내명부 소장 문서 제4책에 수록되어 있소.”
인혜가 손가락으로 공문의 하단을 짚었다. 붉은 인주로 찍힌 내명부 직인 옆에 작은 글씨로 ‘보충 조항 성립 경신년 십월’이라고 쓰여 있었다.
“경신년 십월이면, 선왕 시절이 아니옵니까.”
“선왕 승인 하의 규례요. 지금도 유효한.”
인혜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끝이 약간 올라갔다. 도사가 공문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서기 나인이 먹을 갈 준비를 하며 심문록을 펼쳤다.
“이 보충 조항을 의금부에서 모르고 있었던 것은 이해하오. 내명부 기록실에서조차 지난 주에야 정리되었으니.”
인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촛불이 옥에 부딪혀 빛을 한 번 튕겨냈다.
“그러나 몰랐다고 해서 무효는 아니오. 지금부터 의녀 채연의 모든 증언은 정식 증거로 심문록에 기재하시오.”
도사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의금부로서는 내명부의 공문을 확인했사오나…… 어의원의 참관 의관께서 이의를 제기하시면 절차가 복잡해질 수 있사옵니다.”
“어의원은 내명부의 규례에 간섭할 권한이 없소.”
인혜가 잘라 말했다. 도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서기에게 눈짓했다. 서기가 심문록 여백에 작은 글씨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인혜는 심문장 좌측의 빈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내명부 상궁이 이 자리에 착석한 것은 십 년 만이었다.
촛불이 한 번 흔들리고, 심문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도사가 목침을 두드렸다.
“심문을 속개한다. 의녀 채연, 방금 주상궁 마마의 공문에 따라 네 증언은 앞으로 정식 증거로 채택된다.”
채연이 고개를 들었다. 인혜 쪽으로 시선이 향했으나 인혜는 두 손을 소매 안에 모은 채였다.
“이전에 네가 진술한 어머니의 수기 내용, 천오두와 백부자의 오용 사례…… 모두 심문록에 정식 기재될 것이다.”
“도사님.”
채연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한 박자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소인의 진술에 오류는 없었습니다.”
더 이상 묵살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 한 마디에 실려 있었다.
도사가 무언가 기록하고 서기를 불러 심문록 앞부분을 수정하게 했다.
심문실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인혜가 왼손 엄지로 백옥을 만지작거렸다.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섯 번을 돌리지 않았다. 두 번 만에 멈추고 천천히 손가락에서 옥을 뺐다.
손바닥 안에 감췄다가, 다시 소매 밖으로 꺼냈다.
“의녀 채연.”
인혜가 조용히 불렀다.
“이리 오너라.”
채연이 무릎을 옮겨 인혜 앞으로 다가갔다. 도사와 서기는 기록을 정리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인혜가 손을 내밀어 채연의 손바닥 위에 옥을 올렸다.
“안쪽을 보아라.”
채연이 그것을 집어 촛불 쪽으로 기울였다. 백옥 안쪽에 음각된 글자가 불빛에 떠올랐다.
서의녀.
채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글자 위를 엄지로 한 번 쓸었다. 작은 획 하나까지 정확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의 성씨였다.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입술 사이로 숨이 짧게 새어 나왔다.
“마마……”
“이름을 묵독하였느냐.”
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맺히는 대신 눈동자가 유난히 검게 가라앉았다. 어머니의 수기를 품에 숨긴 채 심문을 받던 그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인혜가 손을 내밀었다. 채연이 옥을 건넸다. 인혜는 그것을 왼손 엄지에 다시 끼지 않고 손바닥 안에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약간 하얘졌다.
“너의 어미는 내명부에 공식 보고서를 남겼다. 경신년 시월 초사흗날.”
채연이 눈을 내리떴다.
“그 보고서가 묵살당한 뒤, 나는 내명부 규례의 허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십 년을 기다렸다.”
인혜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으나, 쥔 손 안에서 엄지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더 기다리지 않기로 했소.”
채연이 제자리로 돌아가 무릎을 꿇자, 인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매 속에서 옥을 내려놓고, 품 안에서 접은 문서 한 장을 꺼냈다. 종이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고, 접힌 선이 짙게 잡혀 있었다.
“의금부 도사.”
인혜가 문서를 펼치며 말했다.
“내명부 규례 개정 초안을 낭독할 터이니 심문록에 기재하시오.”
도사가 자세를 바로 하고 붓을 들었다. 서기가 새 종이를 펼쳤다.
인혜가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마치 문안 인사를 하듯 평온했다.
“내명부 규례 제4장 증거 효력 조항에 관한 개정 초안. 제15조——의녀의 진술 및 감별 보고는 내명부 심문에서 정식 증거로 인정한다. 의금부 및 사헌부의 심문 절차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도사의 붓이 종이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제16조——내명부 소속 의녀가 제출한 약재 감별서 및 독초 분석 보고는 어의원의 확인을 요하지 아니하며, 단독 증거 효력을 가진다.”
채연이 숨을 들이켰다. 어깨가 한 번 떨렸다.
“제17조——본 개정 조항은 즉시 발효하며, 현재 진행 중인 심문에도 소급 적용한다.”
인혜가 문서를 내렸다. 눈을 들어 도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낭독을 마쳤소. 기재하셨소.”
“기재 완료했사옵니다.”
도사가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기가 심문록에 방금 베껴 쓴 조항들을 보여주려고 종이를 들었다.
인혜가 손을 들어 막았다.
“확인은 나중에 하겠소. 먼저 이 초안을 심문 기록에 첨부하시오.”
서기가 규례 초안 문서를 받아 심문록 뒤쪽에 끼워 넣고 작은 끈으로 묶었다.
인혜가 채연을 돌아보았다.
“의녀 채연. 방금 낭독한 제15조, 제16조, 제17조는 네 어미의 보고서가 묵살되던 날부터 내가 준비해 온 것이다.”
채연이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손목의 포승 자국을 한 번 만지고는 두 손을 바닥에 짚었다.
도사가 심문록을 정리하며 물었다.
“주상궁 마마. 한 가지 확인해도 되겠사옵니까.”
“말씀하시오.”
“이 개정 조항에 따라 의녀 채연의 이전 증언——어머니 윤소영의 수기, 천오두 중독의 3대 징후, 백부자 오용 사례——이 모두 정식 증거로 소급 적용됩니까.”
“그렇소. 심문록에 그리 기재하시오.”
서기가 심문록 앞부분으로 돌아가 붓을 들었다. 채연의 첫 진술 옆에 작은 글씨로 ‘내명부 규례 개정에 의거, 정식 증거로 소급 채택’이라고 적었다.
촛불이 한 번 가늘어졌다. 서기가 심지에 불을 붙이자 다시 밝아졌다.
인혜는 서서 심문록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손바닥 안의 백옥은 여전히 꼭 쥐어져 있었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붓이 종이를 긁는 소리.
채연은 무릎 꿇은 자세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눈은 건조했고,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서기가 마지막 글자를 쓰고 붓을 놓았다.
“기재 완료.”
인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쥐고 있던 옥을 소매 속에 넣지는 않았다. 그대로 들고 심문실 문을 향해 걸었다.
나인 하나가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아침 햇살이 밀려 들어왔다. 촛불보다 밝았다.
의금부 도사가 심문록 마지막 줄에 붓을 내려놓았다.
“의녀 채연. 네 증언이 정식으로 채택되었으니, 남은 진술을 계속하라.”
채연이 무릎을 조금 고쳐 세웠다. 왼쪽 손목의 포승 자국이 소매에 스쳤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입을 열었다.
“사약에 쓰인 천오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잠시 뜸을 들였다.
“첫째, 포제하지 않은 생약이었습니다. 법제된 천오두라면 비린내가 사라지고 유관속 배열이 변형됩니다. 사약 찌꺼기에서 확인한 것은 염수 침지를 거치지 않은 생품이었습니다.”
심문실이 조용해졌다.
“둘째, 생천오두는 궁중 약방에서 정식으로 유통되지 않습니다. 내의원의 모든 천오두는 반드시 법제를 거친 것만 입고됩니다.”
허 어의가 방청석에서 몸을 움직였다. 입을 열려다 멈췄다.
도사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 생천오두는 어디서 유입되었단 말이냐.”
“북문 외곽의 사설 약방입니다.”
내의원 서기 두 명의 붓이 동시에 멈췄다. 채연은 숨을 가다듬었다. 중전에게서 받은 문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청사의 낙인. 소금가마 속 천오두 다발.
“소의 한씨 마마의 외척이 사재감에 재직 중입니다. 북문 외곽 약방의 거래 목록에 그 외척의 이름이 단독 수취인으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심문실 밖 복도.
이현이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채연의 음성이 침착하게 이어질 때마다 검지가 팔뚝을 한 번씩 눌렀다.
초롱불이 그의 옆얼굴을 비췄다.
“거래처 대부분에 ‘청사’라는 동일한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이 조직은 소금가마로 위장해 독초를 북문으로 반입합니다. 인시 말, 묘시 초 경비 교대 시간을 이용한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도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중전 마마께서 세자 저하께 전달하신 문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게는 필사본이 없습니다.”
채연은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 손금 사이로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다만, 사약에 사용된 천오두가 북문 외곽에서 반입된 것이라면 같은 경로로 반입된 생천오두를 소의 한씨 마마의 처소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허 어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게 무슨……”
도사가 손을 들었다. 허 어의의 말이 끊어졌다.
“소의 한씨 마마의 오른손 약지에는 손톱 안쪽 검은 변색이 있습니다. 독초를 장기간 직접 다룬 자에게서만 나타나는 징후입니다.”
채연은 어머니 수기의 한 구절을 속으로 되뇌었다. 독초 상습 취급자는 조갑하 울혈이 생기며 약지에서 검은 기운이 먼저 발현된다.
“향낭도 함께 확인하십시오. 오향약재가 독초의 비린내를 가리는 데 쓰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심문실 밖.
이현이 동궁 수행원을 손짓으로 불렀다. 품에서 전령 패를 꺼내 쥐여 주었다.
“소의 한씨의 외척 약방을 조사하라. 북문 외곽, 청사 낙인이 있는 곳이다.”
수행원이 패를 두 손으로 받았다.
“증거물을 확보하는 대로 의금부에 전달하고, 약방 관계자는 모두 신병을 확보하라.”
“예, 전하.”
수행원이 복도를 뛰어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이현은 다시 벽에 기댔다. 눈을 감았다 떴다. 천장의 초롱불이 흔들렸다.
심문실 안에서는 서기들이 바쁘게 붓을 놀리고 있었다. 내의원 서기 두 명이 굳은 얼굴로 좌석을 떠났다. 방청석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도사가 목침을 두드렸다.
“이 일로 오늘 심문은 마친다.”
정오 무렵. 퇴정 통로.
촛불 대신 좁은 창으로 햇살이 비스듬히 들었다. 채연이 통로로 나서자 손목의 포승 자국이 햇빛에 드러났다.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인혜였다.
채연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인혜는 두 손을 소매 안에 모은 채 다가왔다. 눈빛은 차분했으나 입가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네 어미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지만.”
인혜가 소매에서 오른손을 빼내며 말을 이었다.
“너는 다르다.”
손바닥을 펴자 백옥이 드러났다. 통로의 희미한 빛에도 옥은 제 빛을 냈다. 인혜가 채연의 오른손을 잡아 그 옥을 손바닥 안에 눌러 쥐여 주었다.
“안쪽을 보아라.”
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바닥 안의 차가운 감촉이 점점 체온에 젖어 들었다. 인혜가 손을 거두었다.
“십 년 전, 내가 지키지 못한 이름이다.”
채연의 오른손이 왼쪽 손목을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맥이 빠르게 뛰는 것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허리를 깊이 굽혔다. 이마가 거의 허리춤에 닿을 듯했다.
“……고맙습니다.”
짧은 말뿐이었다. 상체를 일으켰을 때 눈가는 젖어 있지 않았다. 인혜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먼저 통로를 빠져나갔다.
채연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백옥을 쥔 오른손을 펴지 않았다. 왼손이 오른손 위를 덮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바닥 안의 옥이 체온에 더 따뜻해졌다.
통로 끝.
이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채연의 굳은 표정과 포개진 두 손을 보자 한 걸음 다가섰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채연이 먼저 손바닥을 폈다.
“이 속에 어머니의 이름이 있습니다.”
땀에 젖은 그녀의 손금 위에 백옥이 놓여 있었다.
이현이 손을 내밀었다.
바로 그때.
통로 저편에서 동궁 수행원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옷자락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무릎을 한 번 짚고 숨을 몰아쉰 뒤, 목이 메는 소리로 말했다.
“전하…… 한씨의 외척 약방이 오늘 새벽 불타 없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