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청연재비록

22화

채연이 이현을 향해 돌아섰다. 오른손 엄지가 왼쪽 손목을 감싼 채였다.

“단영을 부르겠습니다. 어릴 적 배운 약재 지식의 출처가 민간 의술서입니다. 청사에 관한 기록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현이 관자놀이를 검지로 한 번 눌렀다.

“민간 의술서라면 궁중에서 금서로 취급되는 물건이 아니냐.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뜻이군. 지금 네 상태로.”

채연이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포승 자국이 소매 끝 아래로 붉게 번져 있었다.

“단영은 이미 이 사건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지식을 숨기느냐 쓰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현이 잠시 침묵했다. 촛불이 옥관 아래 관자놀이를 푸르스름하게 비췄다.

“부르라.”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단영이 측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품에 갈색 보자기를 안고 있었다.

“전하, 소인 단영, 인사 올리……”

“됐다. 네가 가진 기록을 보이거라.”

단영이 채연을 쳐다보았다. 채연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보자기가 탁자 위에 풀렸다. 푸른 표지의 필사본 한 권이었다.

“우리 할머니가 내의원 약방에서 일하실 때 베끼신 거야. 어릴 때부터 이걸로 약재 이름을 외웠어. 천오두 구별법도 여기서 배웠고.”

채연이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독초 감별’이라는 제목 아래 가는 글씨가 빼곡했다.

“이 기록에 청사라는 이름이 나오느냐.”

단영이 고개를 저었다.

“청사? 들어본 적 없어요. 이 책은 약재 감별법만……”

“마지막 장을 보렴.”

채연이 책의 뒷부분을 넘겼다. 표지 안쪽, 속표지에 가려져 있던 면에 붓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잉크 색이 본문과 달랐다.

‘을미년 유월 스무닷새. 청사의에서 보낸 약재 목록. 제생당을 경유, 북문 소금가마로 반입. 상자 밑널 이중.’

단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게 뭐야…… 할머니가 이런 걸……”

“네 할머니는 청사의 존재를 알고 계셨다. 그리고 네가 배운 약재 지식은, 이 불법 조직이 유통시킨 독초를 감별하는 데 쓰이던 기술이었어.”

단영이 탁자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내가…… 내가 배운 게, 독초 반입을……”

“달리 말하면, 네 지식은 지금 독초 반입 경로를 밝히는 열쇠다.”

채연이 단영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도울 수 있어?”

“그래.”

채연이 어머니의 수기를 탁자 가운데로 끌어당겼다. 두 권의 책이 나란히 놓였다. 어머니 수기의 마지막 장을 다시 폈다.

‘경신년 시월 초닷새. 청사에서 들여온 약재 중 백부자와 천오두 혼입 건. 북문 경비 교대 시 반입. 사방주 강 도사.’

채연이 두 기록을 번갈아 짚었다.

“경신년 시월. 을미년 유월. 적어도 십 년 이상 청사는 북문을 통해 독초를 들여왔다. 소금가마에 숨겨서.”

“경비 교대 시간을 이용했군. 그리고 제생당.”

이현의 손가락이 단영의 기록 속 ‘제생당을 경유’라는 구절을 가리켰다.

“소의 한씨 외척의 약방이로군.”

“전하. 상자 밑널 이중이라는 대목을 보십시오.”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사흘 전, 동궁 약방의 약재 상자를 점검했을 때다. 상자 하나의 깊이가 겉보기보다 얕았다. 안쪽 치수와 바깥 치수가 맞지 않아 조사해보니 이중 밑판이었다. 당시에는 단순한 제작 결함으로 여겼다.”

“그 상자는 어디 있습니까.”

“동궁 창고. 보관 중이다. 밑판을 열면 천오두를 숨겼던 공간이 있을 것이다.”

단영이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럼 소의전으로 가는 약재마다…… 상자 밑에 독초가 숨겨져 있었던 거야?”

채연이 단영의 기록에서 ‘소금가마’라는 글자를 짚었다.

“북문 경비 교대 시각인 인시 말에서 묘시 초 사이에 소금가마로 위장한 반입이 이뤄졌다. 이건 어머니 수기와 네 기록에 공통으로 나오는 정보다. 그리고 그 가마가 도착하는 곳은 제생당.”

“제생당에서 약재 상자로 옮겨 담아 궁중에 납품하고……”

단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할머니가 그걸 알면서도 기록으로 남기신 거구나.”

“은폐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었다. 훗날 누군가 이 기록을 읽고 진실을 밝히기를 바라셨을 뿐이다. 지금처럼.”

이현이 몸을 돌렸다. 곤룡포 자락이 바닥을 스쳤다.

“동궁으로 가겠다. 이중 구조 상자를 확보하겠다.”

“전하, 지금은 밤이 깊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사람이 적다. 증거를 옮기기에는 지금이 낫다.”

이현이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췄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채연. 네 어미의 수기와, 단영 할머니의 기록. 두 개의 증거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청사의의 반입 경로. 제생당에서 동궁 약방 상자 이중 구조를 거쳐, 소의전까지.”

채연이 수기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 상자를 확보하면, 독초 반입의 물증이 완성됩니다.”

“기다려라. 곧 가져오겠다.”

이현이 문을 열었다. 회랑의 찬 공기가 밀려들었다. 발소리가 회랑 저편으로 사라졌다.

단영이 채연의 소매를 살며시 잡았다.

“채연 언니. 나, 이제 알겠어. 할머니가 왜 이 기록을 몰래 필사했는지. 왜 평생 감쪽같이 숨겨왔는지. 언젠가 이 지식이 누군가를 구할 거라고 믿으셨던 거지.”

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왼쪽 손목 맥이 뛰는 곳을 엄지로 짚었다.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두 권의 기록이 남았다. 한 권은 닫혔고, 한 권은 여전히 ‘상자 밑널 이중’이란 대목이 펼쳐져 있었다. 촛농이 한 방울 더 흘러 탁자에 굳어가고 있었다.

동궁 창고는 지하였다. 돌계단을 열두 계단 내려가자 축축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현은 등롱을 든 수행원 뒤를 따라 중앙 통로로 들어섰다. 양옆 선반에는 약재 상자들이 크기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북쪽 선반 세 번째 열이다.”

수행원이 등롱을 들어 올렸다. 상자 하나가 시선 높이에 놓여 있었다. 외견은 평범한 오동나무 약재 상자였다. 뚜껑에는 ‘백출’이라는 글씨가 먹으로 쓰여 있었다.

이현이 장갑을 끼었다. 상자를 선반에서 내려 바닥에 놓았다. 무릎을 굽히는 동작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뚜껑을 열자 백출 특유의 향이 희미하게 올라왔다. 이현은 약재를 한 줌 집어 옆 접시에 옮겼다. 상자 바닥이 드러났다.

손가락으로 바닥면 가장자리를 더듬자 왼쪽 구석에서 미세한 틈이 만져졌다. 눌렀다. 딸깍.

바닥 판이 위로 들렸다. 아래 숨은 공간에는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고, 그 위에 미세한 갈색 가루가 묻어 있었다.

이현이 종이를 펼쳤다. ‘제생당 → 소의전. 천오두(生) 3냥. 경신년 구월 이십일.’

접시 위의 가루를 손가락 끝으로 찍었다. 생천오두 특유의 비린내가 약했다. 이미 달인 뒤 남은 찌꺼기였다.

“이것을 의금부로 옮겨라. 도사에게 직접 전하라. 동궁 약재 상자에서 발견된 이중 구조다. 제생당 납품 물품임을 증명하는 거래 기록도 동봉되어 있다.”

수행원이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이현이 장갑을 벗으며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밤늦게. 내명부 주상궁 집무실.

촛불이 세 개 켜져 있었다. 인혜는 책상 앞에 앉아 감찰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문지기 나인이 채연의 도착을 알리자 인혜가 붓을 내려놓았다.

“들라 하시오.”

채연이 들어섰다. 허리춤에는 어머니 수기와 베낀 기록 한 권이 함께 묶여 있었다. 두 걸음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주상궁 마마.”

인혜의 왼손 엄지에 낀 백옥 가락지가 촛불에 반짝였다.

“동궁에서 보고가 왔더군. 약재 상자에서 이중 구조가 발견되었고, 생천오두 거래 기록이 나왔다고.”

채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상자는 소의전으로 반입된 물품입니다. 제생당이 납품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대가 이미 추적하던 그 납품처로군. 보고하시오. 지금까지의 모든 증거를 일목요연하게.”

인혜가 서랍에서 내명부 감찰 최종 보고서용 종이를 꺼내며 붓에 먹을 다시 찍었다.

채연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으나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첫째. 소의 한씨의 오른손 약지손톱 변색은 장기간 생천오두를 직접 다룬 결과입니다.”

인혜가 붓을 움직였다.

“둘째. 압수된 향낭 속 분말은 법제되지 않은 생천오두이며, 제 어머니의 수기에 기록된 감별법으로 확인했습니다.”

먹이 종이에 번졌다.

“셋째. 단영이 보관해온 민간 의술 기록에는 천오두 반입 경로와 ‘청사’ 조직에 관한 필사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인혜의 붓이 잠시 멈췄다.

“넷째. 세자 전하께서 동궁 창고에서 확보하신 약재 상자 이중 구조는, 제생당에서 소의전으로 직접 천오두를 납품했음을 증명하는 물증입니다.”

“다섯째.”

채연이 품에서 어머니 수기를 꺼내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닳은 표지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경신년 십월 초사흗날, 제 어머니 윤소영은 보태음에 백부자 대신 천오두가 배합되었음을 내의원에 공식 보고했으나 묵살당했습니다. 이 수기 말미에는 독초 유통을 관장하는 ‘청사’ 조직과 그 사방주 ‘강 도사’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혜가 붓을 내려놓고 수기를 집었다. 마지막 장을 펼쳐 ‘강 도사’ 석 자를 눈으로 짚고 다시 접어 책상 위에 돌려놓았다. 손끝이 백옥 가락지를 한 바퀴 돌렸다.

“다섯 가지 증거, 모두 내명부 감찰 기록에 정식 등재하겠소.”

인혜가 최종 보고서의 빈 칸을 채우기 시작했다. 붓이 종이 위를 스치며 마지막 줄을 찍었다.

“공개 청문은 내일 오전. 본궁이 주재한다. 한씨는 이미 감찰실에 구금되어 있소. 증거 목록에 등재된 항목은——윤소영의 수기, 단영의 민간 의술 기록, 압수된 한씨의 향낭과 감별 결과, 손톱 변색 관찰 기록, 동궁 약재 상자 이중 구조 및 거래 기록.”

인혜가 붓을 놓으며 채연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평온했으나 끝음이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대 어미가 십 년 전 남긴 기록이 오늘 정식 증거로 등재되었소.”

채연의 오른손이 왼쪽 손목을 쥐었다. 포승 자국 위로 손가락이 천천히 닫혔다. 맥이 뛰는 곳을 엄지로 누르는 힘이 평소보다 깊었다.

“……감사하옵니다, 마마.”

인혜가 일어났다.

“오늘 밤은 이만. 그대, 회랑 밖으로 나가 숨 좀 고르고 돌아가시오.”

채연이 허리를 굽혀 물러났다. 수기는 품에 넣지 않고 두 손으로 쥔 채였다.

회랑 밖으로 나왔다. 별빛이 마당을 얇게 덮고 있었다. 후원 정자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회양목 향이 밤공기에 섞여 있었다. 채연은 정자 기둥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발소리가 들렸다. 이현이 회랑 모퉁이를 돌아 들어섰다.

“주상궁 처소에서 나오는 걸 봤다.”

채연이 몸을 돌려 허리를 굽히려 했다. 이현이 손을 살짝 들어 막았다.

“됐다. 여긴 사석이다.”

별빛 아래 이현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투명해 보였다. 관자놀이 핏줄이 희미하게 드러났고, 손가락 끝이 저린 듯 한 번 움찔거렸다.

“내일 청문에는 나도 참석한다.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이현이 정자 난간에 손을 얹었다.

“의녀의 증언이 증거로 채택되는 첫 공식 청문이옵니다.”

채연의 목소리는 밤공기보다 한 겹 두꺼웠다. 엄지손가락이 왼쪽 손목 안쪽을 한 번 쓸듯 지나갔다.

“어머니의 기록은 증거 목록에 올랐습니다. 마마께서 확인하셨습니다. 내일,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증언을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이현이 채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별빛 아래 채연의 옆모습이 수기와 같은 선으로 잡혀 있었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은 제도 개혁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았다.

“동궁으로 돌아가겠다.”

이현이 몸을 돌렸다. 회랑 저편으로 걸어가는 발소리가 별빛 아래 차갑게 깔렸다.

채연은 손에 든 수기를 가슴께로 끌어올렸다. 왼손 약지에 낀 백옥 가락지가 손등에 닿았다. 어머니의 성씨가 음각된 면이 맥박 쪽을 향했다.

청연재비록2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