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재비록
23화
동궁 약방의 문을 연 단영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약재 통 서너 개의 뚜껑이 열려 있었다. 도자기 뚜껑들은 바닥에 나뒹굴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약재들은 제각각 쏟아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뒤섞여 있었다. 바닥에는 검은 가루가 흩뿌려져 있고, 공기 중에는 맡아본 적 없는 비릿한 단내가 떠돌았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쇠붙이가 녹슨 듯한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약장 뒤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금속이 부딪히는 가벼운 소리.
복면을 쓴 누군가가 향낭을 거꾸로 쥐고 마지막 약재 통에 내용물을 털어넣고 있었다. 검은 가루가 비단 향낭에서 미세하게 흘러내리며 약재 통 안으로 사라졌다. 손놀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익숙한 동작이었다.
단영의 입이 열렸다. 목구멍에서 갈라진 숨소리만 새어나왔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귀 안에 가득 찼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얼어붙은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복면을 쓴 자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복면 위로 드러난 눈동자에는 불빛이 비치고 있었고, 잠시 당황하는 듯 가늘어졌다가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순간, 약장 위의 등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복면을 쓴 자의 소매가 스치면서 등잔을 쳤는지, 아니면 그의 손이 일부러 밀었는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기름이 흩뿌려진 약재 더미 위로 불길이 번졌다. 불은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순식간에 바닥을 타고 기어올랐다. 연기가 검게 솟구쳤다.
단영은 물러서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복도로 나뒹굴었다. 등뼈에 닿은 차가운 바닥의 감촉만이 온몸을 관통하는 공포 속에서 유일하게 현실임을 알려주는 감각이었다.
“불이야……!”
비명은 약방 밖으로 뻗어나갔다. 터져나온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갈라지고 떨리고 있었다.
“동궁 약방에 불이야!”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돌바닥을 박차며 좁은 회랑을 메아리쳤다. 불길은 이미 약장 두 칸을 집어삼키고 천장 서까래를 타고 있었다. 불이 약장 위에 건조된 약재들을 핥을 때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약재 특유의 냄새가 타서 올라왔다. 검은 연기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이현은 서책을 덮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잔불이 흔들렸다. 붓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촉감이 아직 손가락에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귀에 들어온 것은 책장을 덮는 소리가 아니라 밤의 고요를 찢은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젊고 높은 음역이었다.
공포로 굳어진 목소리가 밤공기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이내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수행원이 숨을 헐떡이며 문 앞에 엎드렸다. 수행원의 이마에는 땀이 솟아 있었고, 손끝은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저하, 동궁 약방에 화재……!”
이현은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다. 사고는 생각보다 빨랐다.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수행원이 황급히 뒤를 따랐다. 그의 다리는 비틀거렸지만, 그래도 세자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금군은.”
목소리는 짧았으나 그 안에는 명령과 확인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지금 막…….”
회랑을 돌자 약방 쪽에서 뿌연 연기가 밀려왔다. 석유 냄새, 타는 약초 냄새, 그리고 그 틈에 섞인 쇠 비린내 비슷한 독기가 섞여 있었다. 연기는 벽을 따라 기어오르고 바닥을 덮으며 회랑 전체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현은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 비단이 호흡을 걸러주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연기를 직접 들이마시는 것보다는 나았다. 독특한 비린내가 목구멍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
“물러서라, 저하!”
금군 넷이 먼저 약방 문 앞에 이르렀다. 그들은 철갑을 두른 팔로 연기를 헤치며 진입로를 확보하려 했다. 그중 하나가 문을 발로 차 열었다.
쏟아져나온 연기에 이현의 호흡이 막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움켜쥐는 듯했다. 기침이 터져나왔다.
한 번, 두 번. 무릎이 꺾였다. 머릿속에 독기운이 퍼지며 시야 가장자리가 흐려졌다.
천오두 냄새였다. 이 냄새를 잊을 리 없었다. 오 년 전, 어느 의녀가 이 냄새를 설명했었다. 달콤하면서도 쇠비린내를 닮은, 잘 말린 천오두의 뿌리가 불에 탈 때 나는 독특한 향이라고 했다. 고통스럽게 기억이 스쳤다.
채연은 동궁 정문을 뛰어넘을 때쯤 이미 연기 냄새를 맡았다. 동궁 외곽 담장을 감싸던 밤공기 속에 비릿함이 섞여 있었고, 나무와 풀내음 사이로 타는 약초 냄새가 번져오고 있었다. 다리의 속도가 저절로 빨라졌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아주 오래된 기억이 꿈틀거렸다.—이건 어머니가 기록에 남겼던 냄새다.—
달리면서 소맷자락을 찢었다. 비단 찢어지는 소리가 밤하늘로 퍼졌다. 왼쪽 손목을 묶던 중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저절로 왼쪽 손목을 쥐었다. 맥을 짚으려던 버릇이었다. 지금은 내 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손을 놓았다.
약방 앞 복도는 연기로 가득했다. 등불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뿌옇게 엉긴 연기 사이로 인영들이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금군 두 명이 이현의 팔을 부축하고 있었다. 세자는 연신 기침을 쏟아내며 무릎을 꿇은 채였다. 평소 꼿꼿하던 어깨가 축 처져 있었고, 목을 웅크린 채 연기를 뱉어내는 모습은 고통 그 자체였다.
“저하!”
채연은 이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돌바닥에 닿은 무릎에서 둔탁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인식하지 않았다. 입술이 푸르게 질려 있었다.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다. 손톱 밑으로 검은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천오두 중독의 전형적인 징후였다.
“저하, 들리십니까.”
이현의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흔들렸다. 동공이 확장과 축소를 반복하며 빛에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기도가 좁아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흑두와 감초.”
채연이 고개를 돌려 금군을 올려다보았다.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해서 명령처럼 들렸다.
“약방 안쪽 서쪽 약장, 위에서 두 번째 칸에 흑두가 있다. 뚜껑 없는 질그릇이다. 감초는 동쪽 선반 맨 아래, 황색 보자기에 싸여 있다.” 약방 구조를 기억 속에 펼치는 데는 한순간도 걸리지 않았다. 며칠 전 단영에게 약재 위치를 설명했던 기억이 선연했다.
금군 하나가 망설였다. 철갑을 입은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젊은 얼굴이었다.
“불길이…….”
“숨을 참고 들어갔다 나오면 된다.”
채연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금군의 발이 움직일 만큼 단호했다. 무게가 실린 말이었다.
“이 연기는 천오두를 태운 것이다. 저하께서 들이마신 지 얼마 안 됐다. 지금 해독제를 조제하면 늦지 않는다. 아직 맥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
금군 둘이 약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둠과 불빛이 뒤엉킨 문틈으로 그들의 실루엣이 순간 빛났다 사라졌다. 불길은 약방 절반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서쪽 약장은 아직 닿지 않은 듯했다. 불은 천장을 핥으며 동쪽으로 번지고 있었고, 서쪽 구석은 아직 연기만이 자욱했다.
채연은 이현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은 놀랄 만큼 차가웠다. 손끝이 얼음장에 닿은 듯했다.
맥은 불규칙하게 뛰었다. 삼 초에 한 번씩 맥이 끊겼다. 독이 심장에 닿기 시작한 맥박의 간격이었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이현의 입술이 움직였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성대를 움직일 힘조차 독이 빼앗아가고 있었다.
대신 손가락이 채연의 손목을 살짝 쥐었다. 힘이라고 하기에도 미약한, 떨림에 가까운 접촉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응답이 담겨 있었다.
금군 하나가 기침을 하며 약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눈이 충혈되고 얼굴은 그을음으로 검었다. 품에 흑두 단지와 감초 보자기를 안고 있었다. 질그릇은 열기에 달궈졌고, 보자기는 불똥에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여기……!”
채연은 약방 앞 평상으로 달려갔다. 평상 위에는 약봉투와 작은 절구가 있었다. 단영이 아침에 정비하던 도구들이었다. 약 절구의 내벽은 오랜 사용으로 반질반질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막자와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물을 구해오너라. 끓이지 않은 찬물이어야 한다.”
흑두를 절구에 쏟았다. 검은 콩들이 절구 바닥에 부딪히며 단단한 소리를 냈다. 한 줌.
감초는 세 쪽을 골라 칼등으로 으깼다. 손가락 길이만 한 감초가 단단한 껍질 밖으로 달콤한 내부를 드러냈다. 흑두 가루와 섞었다.
금군이 바가지에 물을 떠왔다. 물은 우물에서 갓 퍼온 듯 차갑고 맑았다. 채연은 가루를 물에 풀었다.
검은 가루와 노르스름한 감초 부스러기가 찬물 위에서 빙빙 돌았다. 손가락으로 젓고 냄새를 맡았다. 감초의 단내가 흑두의 쓴맛을 누르고 있었다.
냄새는 틀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수기에서 천 번도 더 읽은 조제법이었다.
약방 안에서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천장 일부가 무너지며 불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바닥이 진동했다.
“저하, 드십시오.”
채연은 이현의 턱을 받쳐 입을 열었다. 피부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목에는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다. 바가지를 기울여 한 모금.
검은 액체가 이현의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현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반사적인 삼킴이었다.
두 모금. 이번에는 조금 더 수월하게 넘어갔다.
그때, 약방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불이 타는 소리와 서까래가 갈라지는 소리 사이로 기어들어온 웃음이었다. 높고 가늘며 불쾌한 잔향을 남기는 웃음소리.
“참 대단하구나.”
연기 속에서 복면을 벗은 소의 한씨가 걸어나왔다. 당의는 그을음으로 얼룩져 있었고, 비단 위로 불똥이 튄 자국이 검게 번져 있었다. 오른손에는 뱀 한 마리가 감겨 있었다. 비늘은 등불 아래서 푸른 광택을 띠었고, 독사의 머리가 손등 위에서 혀를 날름거렸다. 뱀의 눈동자는 세로로 찢어져 있었고, 꼬리는 한씨의 손목을 칭칭 감고 있었다.
“불 속에서도 약재 이름을 또박또박 읊다니.”
금군들이 검을 뽑았다. 쇳소리가 일제히 복도를 메웠다. 한씨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뱀을 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물러서지 않으면 이 뱀이 누구를 물지 모른다. 독은 천오두보다 빠르다. 세 분의 호흡 안에 숨이 막힐 것이다.”
채연은 바가지를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섰다. 왼손은 평상 위 절구를 짚었다. 돌절구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이미 모든 증거가 내명부에 있다.”
“증거라고?”
한씨의 눈이 번들거렸다. 웃음기가 사라졌다. 불빛에 비친 얼굴은 반은 그을음, 반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네까짓 계집의 말 한마디가 증거냐. 의녀 주제에. 이 나라의 법도가 의녀의 말을 증거로 받아들인다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한씨가 한 걸음 다가왔다. 독사의 머리가 채연 쪽으로 향했다. 뱀의 혀가 더 빠르게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네 어미도 그렇게 죽었다. 말 많던 입을 영영 닫더구나. 불쌍하지도 않더냐? 네 어미가 마지막으로 흘린 눈물을 보았어야 했는데.”
채연의 오른손이 절구 위로 움직였다. 손가락이 막자 손잡이를 찾았다.
“전하께서 의안을 덮으라 명하셨을 때 순순히 물러났어야 했다. 네 어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느냐. 네 어미는 왕실의 비밀을 기록으로 남겼다. 의녀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한씨의 손목이 꺾였다. 독사가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검은 실루엣이 불빛을 가로질렀다. 금군 하나가 칼등으로 뱀을 쳐냈다. 정확한 일격이었다.
뱀이 바닥에 떨어졌다. 비늘과 돌바닥이 부딪히며 짧은 소리를 냈다. 다른 금군이 달려들어 밟았다.
군화 밑창 아래서 뱀의 몸뚱이가 마지막 경련을 일으켰다. 동시에 두 명이 한씨의 어깨를 잡아 밀쳤다. 철갑을 낀 손이 어깨 뼈를 짓눌렀다.
채연은 절구를 내려놓고 다시 바가지를 집었다. 손등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약지 첫 마디가 붉게 벗겨져 있었다. 살갗이 벗겨진 부위가 찬물에 닿을 때마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저하, 나머지도 드십시오.”
이현의 의식이 간신히 붙어 있었다.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었지만, 호흡은 아까보다 깊어지고 있었다. 바가지가 입술에 닿자 목울대가 다시 움직였다. 세 모금, 네 모금. 빈 바가지에서는 물기 가득한 바닥만이 남았다.
한씨가 금군에게 끌려가며 소리 질렀다. 목소리는 찢어질 듯 높았고, 마지막 남은 기력을 모두 쥐어짜낸 듯했다.
“네 어미가 지키려던 게 고작 이따위 왕실이더냐! 죽어 마땅한 세자를 위해……! 네 어미는 헛되이 죽었다. 그 기록도, 네 목숨도, 모두 헛되이……!”
금군이 한씨의 팔을 등 뒤로 꺾었다. 팔꿈치 관절에서 불쾌한 소리가 났다. 말이 비명으로 바뀌었다. 고통으로 뒤섞인 외마디 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려 퍼졌다.
이현의 눈동자가 겨우 초점을 되찾았다. 의식이 돌아오는 첫 신호였다. 첫마다 손끝이 떨렸다. 떨림은 손가락에서 시작되어 팔 전체로 번져갔다.
채연은 자신의 오른손을 보았다. 벗겨진 살갗 사이로 핏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불에 덴 건 아니었다.
약재를 급히 찧다가 절구 내벽에 긁힌 상처였다. 태울 때보다 지금 더 아팠다. 통증은 선명하고 지속적이었다. 하지만 그 통증은—나는 지금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약방 안에서 불길이 잦아들고 있었다. 금군들이 물통을 들고 들어가 잔불을 끄고 있었다. 축축한 연기가 자욱하게 깔렸고, 젖은 재 냄새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이현의 손목을 다시 짚었다. 맥은 여전히 불규칙했지만, 끊기는 간격이 길어지고 있었다. 독이 조금씩 밀려나고 심장이 제 박자를 되찾고 있다는 뜻이었다.
“해독제가 듣고 있습니다.”
채연은 물끄러미 손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신의 손끝에 전해지는 맥박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현이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숨을 내쉴 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쇳소리가 조금 옅어져 있었다.
“……그대 손.”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목이 긁히는 고통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 두 글자에는 명료함이 있었다.
“보아주십시오.”
채연은 손등을 소매로 가리며 일어섰다. 젖은 소매가 상처 위로 스쳤다.
한씨는 이미 복도 저편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비녀가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 은비녀가 돌바닥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아무도 줍지 않았다. 비녀는 그대로 발에 채이고 밟혀 구석으로 굴러갔다.
약방 안에서 금군 하나가 외쳤다. 연기와 그을음에 잠긴 목소리였다.
“의녀 나리! 이쪽에……!”
채연이 약방 문턱으로 다가갔다. 문지방은 반쯤 타서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발을 디딜 때마다 잔재가 부스러졌다. 불길은 잡혔고, 약장 세 칸이 무너져 있었다. 약장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검게 타 있었고, 그 주변으로 물에 불은 약재 찌꺼기가 흩어져 있었다. 금군이 가리킨 곳에는 잿더미 속에서 반쯤 탄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표지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가죽 장정은 녹아내려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책등을 묶던 실은 끊어져 재 속에 묻혀 있었다. 채연은 무릎을 굽혀 책을 집었다. 손에 닿은 종이는 바스라질 듯 연약했다.
어머니 수기의 사본이었다. 뒷부분 열 장 가까이가 불에 타 없어져 있었다. 종이는 검게 말려 올라가 있었고, 글자가 있던 자리는 완전히 사라지거나 희미한 먹 자국만 남아 있었다. 남은 장들도 가장자리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가장자리에서 재가 떨어져 나갔다.
검지로 재를 털었다. 살아남은 페이지들 사이로 익숙한 필체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어머니의 단정한 해서체였다. 마지막 남은 페이지에는 붉은 먹으로 쓰인 글귀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천오두 이 돈 오 푼. 백부자로 위장. 경신년 시월 초사흗날.'
붉은 글씨는 불길에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지워지지 않도록 쓰인 글귀처럼.
채연은 책을 접어 품에 넣었다. 젖은 품 안에 종이가 눌러붙었다. 안쪽 옷은 땀과 우물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책을 품에 넣자 종이가 천에 달라붙는 감촉이 가슴에 전해졌다. 품 안쪽에서 어머니의 글이 심장 가까이 스며드는 듯했다.
약방 밖에서는 이현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렸고, 얼굴은 창백했으나 눈동자만은 회복되고 있었다. 금군의 부축을 받으며 기둥에 등을 기댔다. 등이 기둥에 닿자 숨을 길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채연은 그 옆으로 걸어가 평상에 걸터앉았다. 절구 속에 남은 흑두 가루를 바라보며 말했다. 검은 가루는 찬물에 불어 반죽처럼 뭉쳐 있었고, 그 옆에는 칼등에 으깨진 감초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내일 청문에서 어머니가 쓰지 못한 마지막 기록을 제출하겠습니다.”
이현이 고개를 돌렸다. 기둥에 기댄 자세 그대로였다. 눈 아래 그늘이 검었다. 그을음과 피로가 뒤섞인 얼룩이었다.
“불타 사라진 부분은…….”
목소리는 여전히 갈라져 있었고, 마지막 음절은 기침에 묻혀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채연은 그을린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벗겨진 살갗 위로 핏물이 말라붙어 얇은 딱지를 만들고 있었다. 손등을 타고 흐른 그을음 자국이 손목까지 이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수고가 아니었습니다. 증거입니다.”
이현이 손을 뻗어 평상 위 절구 옆에 놓인 빈 바가지를 집었다. 바가지 안쪽에는 검은 약재 찌꺼기가 얇게 말라붙어 있었다. 물 한 방울 남지 않았다.
“……고맙소.”
짧은 말이었다. 그 짧은 두 글자 안에 실린 숨의 무게가 평소 그가 쓰는 어떤 말보다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채연은 고개를 들었다.
이현의 시선이 그녀의 벗겨진 손등에 닿아 있었다. 더 이상 말은 없었다.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동궁 정문 쪽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북소리는 한 번, 다시 한 번, 그리고 세 번째 울리며 밤하늘을 진동시켰다. 화재가 진압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채연은 다시 약방 안을 바라보았다. 재와 그을음, 깨진 약단지들. 젖은 재에서 아직 미열이 올라오고 있었고, 무너진 약장 사이로 반쯤 녹아내린 등잔이 보였다. 그 잿더미 속에 내일 청문의 마지막 증거가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