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재비록
24화
회랑의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새벽, 금군 넷이 소의 한씨의 양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약지 손톱의 검은 변색이 횃불 아래서 마지막으로 드러났다.
한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회랑을 가로질렀다. 비단 치맛자락이 재투성이 바닥을 질질 끌었다.
금군 대장이 패를 높이 들었다.
“의금부로 압송하라.”
발소리가 멀어지자 채연은 무릎을 돌려 이현을 마주했다. 오른손으로 이현의 손목을 짚었다. 검지와 중지가 관골 안쪽을 찾아 미끄러졌다.
촌구의 맥이 느려지고 깊이가 돌아왔다. 부침 사이에 규칙적인 간격이 자리 잡았다. 손목을 놓으며 눈을 감았다 떴다.
“……해독제는 제대로 들었습니다.”
이현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목소리는 쉰 듯 낮았다.
“네 손.”
채연이 왼손을 내렸다. 손등의 붉은 화상은 물집이 오르지 않았다. 이현이 손가락을 뻗다가 멈췄다.
“불길 속에서 망설이지 않았군.”
“약재가 탈 시간이었습니다.”
이현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기침은 나지 않았다. 채연은 띠에 꽂힌 작은 연고 통을 열어 손등에 고루 발랐다.
이때 회랑 구석에서 단영이 뛰어왔다. 품에 무언가를 움켜쥔 채였다. 두루마기 앞섶이 그을음으로 얼룩져 있었다.
“낭자님, 이것……!”
채연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품속의 것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검푸른 표지가 절반쯤 탔고, 가장자리에서 훈기가 올랐다.
채연이 표지를 살폈다. 할머니의 붓글씨가 그을음 속에 희미하게 살아 있었다.
“……약방 맨 안쪽 서가에서 꺼냈습니다. 불이 옮겨붙기 전에.”
단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손등에 금방 오른 물집을 채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치맛자락으로 감췄다.
“뒤쪽은 좀 탔는데, 수록 약재명은 거의 남았어요. 청사 거래처 적힌 부분도……”
단영의 말이 거기서 멎었다. 채연이 표지를 넘기자 안쪽 첫 장에 빼곡한 필적이 드러났다. 민간 약재의 채취 시기, 법제 방법, 금기 배합이 조목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마지막 몇 장이 불에 그을렸으나, 「북문 외곽 청사」라는 제목 아래 거래 약재 목록이 여섯 줄 남아 있었다.
채연이 책을 접었다.
“네 손 먼저 치료해라.”
단영이 눈을 깜빡였다.
“……이거 먼저라고요.”
“불 속에서 꺼낸 기록은 네가 다친 뒤에 읽지 않는다.”
단영이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숙여 한 번 끄덕이고는 연고 통을 받아 쥐었다.
채연은 민간 의술서를 품에 넣으며 일어섰다. 허리춤의 어머니 수기가 무게를 더했다. 탄 종이 냄새가 옷깃 사이로 스몄다.
이현이 벽에 짚었던 손을 떼며 말했다.
“수기와 저 책은…… 증거가 될 수 있겠군.”
채연이 고개를 들었다.
“증거로 내려면 먼저 속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청문 전까지 내명부 서기가 인증해야 공식 효력이 생깁니다.”
이현이 잠시 생각하더니 수긍했다.
“인혜를 부르겠다.”
채연이 대답하기 전에, 회랑 저편에서 인혜가 이미 걸어오고 있었다. 등 뒤로 내명부 서기 한 명이 붓과 두루마리를 든 채 따랐다.
인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통보했다.
“속기록은 지금 이 자리에서 받겠다. 두 기록 모두 내가 직접 날인한다.”
서기가 무릎을 꿇고 받침대를 폈다. 채연은 어머니 수기에서 천오두 중독 증상 기록 부분과, 민간 의술서에서 청사 거래 목록을 펼쳐 나란히 올렸다.
붓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 잠시 회랑에 남았다.
대전의 차일이 오전 햇살을 거르고 있었다. 어좌 앞으로 의금부 도사와 내의원 관원들이 좌우로 갈라섰다.
한가운데 소의 한씨가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수의는 그을음을 걷어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손톱의 변색만은 감출 수 없었다.
왕이 입을 열었다.
“동궁 약방에 불을 지르고 독초를 살포한 죄. 더하여 지난밤 의금부로부터 송 상궁 사망 건과 천오두 혼입에 관한 증언을 접수했다.”
한씨는 대꾸하지 않았다. 입술에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 허공에 멈춰 있었다.
의금부 도사가 소리 높여 고했다.
“증인 채연, 전방으로 나오라.”
채연이 두루마리 두 개를 들고 전면으로 걸어나왔다. 왼손 손등에는 연고 자국이 번들거렸다.
도사가 물었다.
“제출할 증거는 무엇인가.”
채연이 첫 번째 두루마리를 폈다.
“경신년 시월, 중전 마마의 보태음 조제를 담당한 서의녀 윤소영이 남긴 진료 수기입니다.”
펼쳐진 부분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초이튿날, 백부자 대신 천오두가 쓰였음을 기록하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묵살된 경위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허 어의가 자리에서 몸을 움찔했다.
채연이 수기 마지막 장을 넘겼다.
“초사흗날, 내의원 인보가 찍혔습니다. 이는 공식 보고서임을 증명합니다.”
왕이 손을 들었다. 내시가 수기를 받아 어좌로 올렸다. 왕이 인보를 손끝으로 짚으며 침묵했다.
그 틈에 채연이 두 번째 두루마리를 폈다.
“이 책은 내의원 약방에서 근무하던 최씨 노파가 사적으로 필사한 민간 의술서입니다. 현재 의녀 단영이 소지하고 있던 것으로, 동궁 화재 현장에서 구출했습니다.”
특정한 페이지를 펼쳤다.
“말미에 북문 외곽 약방 ‘청사’와 거래한 약재 목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금가마로 위장해 인시 말에서 묘시 초 사이에 반입된 물목도 기재되어 있습니다.”
한씨의 어깨가 처음으로 굳었다.
채연이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목록에 생천오두, 법제하지 않은 초오두, 그리고 두 독초의 비린내를 감추기 위한 오향 약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수취인은 소의 한씨 외척의 사재감 명의입니다.”
의금부 도사가 한 걸음 나섰다.
“사재감 한씨 외척의 약방은 어제 새벽 불에 탔다는 보고가 있었소. 그 화재와의 연관성은?”
채연이 대답했다.
“증거물이 사라지기 전에 이 필사본이 먼저 확보되었습니다.”
대전 안이 술렁였다. 한씨가 고개를 들어 채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소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입술을 열었다.
“……네 어미처럼 독한 년.”
채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잠시 쥐었다 놓으며 두루마리를 내렸다.
왕이 개구했다.
“허 어의는 나오라.”
허 어의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어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이마에 얇은 땀방울이 맺혔다.
“경신년 보태음 처방 당시, 의안 조작에 관여했는가.”
허 어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관여했습니다.”
대전 이곳저곳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당시 상급 의관의 지시로, 감별을 맡았던 서의녀의 보고를 묵살하고 공식 의안에서 백부자 처방으로 대체 기록했습니다.”
허 어의가 무릎 꿇었다.
“십 년간 그 일이…… 소의 한씨의 고모 되는 후궁 급사 사건과도 같은 방식으로 은폐되었음을 알고도 침묵했습니다.”
왕이 눈을 감았다 떴다.
“네 죄는 청문 후 따로 다스리겠다.”
허 어의가 머리를 조아렸다.
“은퇴를 청합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허 어의가 품에서 동패를 꺼내 들었다.
“의녀 채연에게…… 내의원 의안 열람권을 상징하는 이 동패를 이양하겠습니다.”
채연이 동패를 받았다. 무게보다 차가운 표면이 손바닥에 먼저 닿았다.
한씨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청사…… 그 이름이 무슨 소용이랴. 이미 불탔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너희가 증명한 건 겨우 찌꺼기 하나.”
입회해 있던 의금부 도사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찌꺼기가 아니라 단서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수사는 시작됩니다.”
왕이 최종적으로 선언했다.
“소의 한씨는 내란 및 살인 미수, 독초 반입과 불법 유통 혐의로 의금부에 재수감한다. 청사 조직의 배후는 의금부가 별건으로 수사하라.”
금군이 양쪽에서 다가와 한씨를 일으켰다. 한씨가 채연의 옆을 지나칠 때 발걸음을 한 번 멈추었다.
“네 어미가 남긴 그 기록…… 결국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채연이 동패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미 바뀌었습니다.”
채연의 증거 제시가 끝나고 허 어의의 자백이 이어지자, 대전 청문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서기들이 붓을 든 채 숨을 멈췄고, 어의원 관원들은 고개를 숙였다.
왕이 옥좌에서 일어서지도 않고 말했다.
“소의 한씨.”
한씨가 포승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었다. 약지손톱의 검은 변색이 촛불 아래 드러났다.
“네 죄는 독초 반입, 왕실 혈맥에 대한 고의적 독살 기도, 의안 조작 교사, 동궁 약방 방화 및 세자 살해 미수다.”
한씨의 입술이 경련하듯 일그러졌다. 왕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폐서인하여 원주 진천으로 유배하라. 한씨의 외척 사재감 직첩은 회수하고, 청사 관련자는 의금부에서 전원 색출한다.”
금군이 한씨의 겨드랑이를 붙잡았다. 한씨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다 채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빛에 웃음기가 없었다.
“계집애 하나가…… 내 십 년을……”
금군이 끌어내자 한씨의 목소리가 복도로 흩어졌다. 채연은 끝까지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중전 민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을 향해 합장하고 무릎을 꿇었다.
“전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신은 십 년간 이 죄인의 협박을 받아 동궁의 약방 정보를 넘겼사옵니다. 임신 중 마신 보태음의 진실을 세자에게 고하지도 못했사옵니다.”
왕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중전은 손수건을 접어 소매 안에 넣었다.
“왕비로서 내외명부를 지키지 못하고, 어미로서 자식을 지키지 못한 죄를 통감하옵니다. 별궁 경현당으로 물러가 평생 참회하고자 청하옵니다.”
대전이 조용해졌다. 촛농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왕은 잠시 침묵했다.
“……허하노라.”
중전 민씨가 일어났다.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퇴정하는 뒷모습이 유난히 가벼워 보였다. 문턱을 넘기 직전, 그녀가 돌아보았다.
채연과 눈이 마주쳤다. 중전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눈가가 붉었다.
그 짧은 시선 안에 사죄가 담겨 있었다. 채연은 고개를 숙였다.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자 이현.”
이현이 무릎 꿇었다. 왕이 수결을 든 손을 멈추고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십 년간 몸으로 감당한바 중하고, 오늘의 진실을 끝까지 추적한 공이 크다.”
봉명관이 왕세제 책봉 교지를 받들어 내려왔다.
“왕세제로 책봉하노니, 병약한 몸을 다스리며 나랏일을 보필하라.”
이현이 교지를 두 손으로 받았다.
“성은을 잊지 않겠사옵니다.”
교지가 닿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목소리는 평온했다. 채연은 그 손을 보았다. 어젯밤 해독제를 삼키기 직전에도 같은 손이었다.
왕은 마지막으로 채연 쪽을 보았다.
“의녀 채연.”
채연이 무릎 꿇었다. 주름진 남색 당의 소매 끝에 그을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왼손 손등의 얕은 화상이 거즈 없이 드러나 있었다.
“네 증언은 내명부 규례 개정으로 정식 증거가 되었다. 네 어미의 기록이 오늘의 심문을 완성했다.”
왕이 잠시 말을 멈췄다.
“어의원 공적부에 의녀 최초로 정식 기재하라. 내의원 감찰 개혁 논의에 네 이름을 올리라 명한다.”
채연은 이마를 바닥에 댔다.
“망극하옵니다.”
짧았다. 더 할 말도 없었다. 어머니의 수기를 품은 가슴 쪽이 뜨거웠다.
퇴정의 나발이 울렸다. 대전 월대,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초롱불이 걸린 기둥 아래로 인물들이 흩어졌다.
채연이 천천히 월대 끝으로 걸어갔다. 불에 그을린 어머니의 수기를 두 손으로 가슴께 눌렀다. 바람이 남은 탄내를 흩뜨렸다.
오른손이 왼쪽 손목을 쥐었다. 포승 자국은 옅어졌지만, 엄지가 그 자리를 찾아갔다. 멍든 자리가 아니라 맥 짚는 자리였다.
어머니도 여길 짚었을까. 기록이 묵살되던 자리에서, 같은 손목을.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채연.”
이현이었다. 왕세제 책봉 교지를 든 손이 아직 약간 긴장해 있었다. 그는 채연의 왼쪽 손목을 잡은 오른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나란히 섰다. 초롱불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월대 돌바닥에 겹쳐 늘였다.
채연이 입을 열었다.
“의녀의 기록이 이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현이 고개를 돌렸다.
“함께 증거를 만들자.”
채연의 손가락이 손목에서 풀렸다. 이현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의원을 뜯어고치는 일은 병보다 더딜 테니, 오래 붙들어야겠군.”
“괜찮습니다.”
채연이 대답했다. 서툰 위로도, 과장된 다짐도 아니었다. 사실 확인처럼 정확히 짧았다.
이현의 입가에 미세한 그림자가 지나갔다. 웃음 같은 것.
“알고 있었다.”
달빛이 구름 사이로 얇게 새어나왔다. 월대 아래에서는 의금부 도사가 청사 수사 명령서를 접어 품에 넣고 있었다. 먼 북문 쪽에서 경비 교대의 징 소리가 한 번 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