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청연재비록

4화

촛불이 꺼진 지 오래였다. 채연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잠들지 못했다. 한씨의 편지가 서랍 안에 있었다. 독초 가루가 손가락에 묻었던 감촉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제실로 향했다. 동트기 전의 약방은 고요했다. 약재 냄새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감별 일지 속에 편지는 그대로였다.

종이를 펼치지 않았다. 붉은 글씨를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채연은 일지를 덮고 약장으로 걸어갔다.

백부자 통을 열었다. 절편들을 살피며 한 점 한 점 집어 올렸다. 촛불을 새로 켜고 단면을 비추었다. 유관속 배열이 방사형인지, 불규칙 분지형인지.

세 점을 확인했다. 모두 백부자였다.

통을 닫았다. 누군가 이미 증거를 치웠거나, 천오두는 이미 탕약으로 들어간 뒤였다. 어느 쪽이든 지금 약장에서는 더 이상 찾을 것이 없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문이 열리고 단영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언니, 벌써 나왔어?”

“잠이 안 와서.”

단영이 다가왔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나도…… 한숨도 못 잤어. 괜찮은 거야?”

채연은 촛불을 끄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언니.”

“……?”

“중전 마마께서 언니를 부르신대. 아침 일찍 전각으로 오라셨대.”

채연의 손이 허리춤에서 멈췄다.

“언제 왔지.”

“방금. 주상궁 마마의 나인이 왔다 갔어.”

주상궁 인혜의 움직임이 빨랐다. 전날 세자가 채연의 이름을 언급한 직후였다. 중전이 호출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채연은 소매를 정리했다.

“약방 정리는 네게 맡길게.”

“응. 조심해, 언니.”

단영의 눈에 걱정이 스쳤다. 채연은 대답 대신 약장 위의 약사발을 정리하는 손짓으로 답했다.

중전 민씨의 전각은 동궁에서 멀지 않았다. 아침 햇살이 회랑 기둥 사이로 비스듬히 내리꽂혔다. 채연은 나인의 안내를 따라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중전이 좌정해 있었다. 화려한 가체 대신 단정한 쪽머리에 백색 소복 차림이었다. 눈가는 충혈돼 있었고 광대뼈가 도드라졌다. 밤새 잠들지 못한 얼굴이었다.

채연이 깊이 허리를 굽혔다.

“중전 마마, 의녀 채연이 명을 받들어 왔습니다.”

“일어서라.”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중전이 손을 들었다.

“가까이 오거라.”

채연이 두 걸음 다가섰다. 중전의 눈이 채연의 얼굴을 훑었다.

“세자는…… 네가 살렸다고 들었다.”

“주상궁 마마의 도움이 있었고, 어의원의 탕약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소인의 공만이 아닙니다.”

중전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움찔거렸다.

“겸손은 됐다. 본궁이 묻는 것은 과정이다.”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어떤 침을 놓았느냐.”

“천오두 독성을 의심하여, 내관혈과 합곡, 족삼리에 사침했습니다. 해독 처방은 감두탕을 기본으로 하고……”

“그 탕약 재료는 누가 챙겼느냐.”

“동궁 약방에 비치된 것을 주상궁 마마의 확인을 받아 사용했습니다.”

중전의 눈이 좁아졌다.

“주상궁이 직접?”

“그렇습니다.”

중전이 잠시 침묵했다. 손가락이 다시 움찔거렸다. 채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중전의 손을 관찰했다. 소매 안으로 손목이 감춰져 있었다.

“세자의 탕약에 문제가 있었다면.”

중전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것은 네가 감별했어야 할 일이 아니더냐.”

채연이 시선을 들었다.

“소인은 사흘 전, 탕약 재료에서 천오두 의심 절편을 발견하여 허 어의께 보고했습니다.”

“허 어의께?”

“어의께서는 백부자로 판정하시고, 소인의 검사 업무를 거두셨습니다.”

중전의 눈썹이 움찔 올라갔다. 이내 가라앉았다.

“허 어의가…….”

중전은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려다보았다.

“본궁은 세자가 아프기 전부터…… 늘 불안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약방에서 올리는 탕약을 믿어야 했고, 어의원의 진단을 의심할 수 없었고…… 본궁은 어미로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 동작에서 소매가 살짝 밀려 올라갔다.

채연의 시선이 멈췄다.

중전의 손목 안쪽이 드러났다. 작은 붉은 점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바늘 자국이었다. 좁쌀만 한 점들이 손목을 따라 여러 개 퍼져 있었다. 새로 생긴 것과 며칠 지난 듯 흐릿한 것이 섞여 있었다.

채연은 호흡을 멈추지 않았다.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약침 자국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횟수.

중전이 손을 내리며 소매를 끌어당겼다. 손목이 다시 가려졌다. 채연은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시선을 중전의 얼굴로 돌렸다.

“네가 세자를 살렸다.”

중전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본궁이 네게 묻겠다. 세자의 처방에…… 더 강한 약재를 써야 하지 않겠느냐.”

채연의 눈빛이 바뀌었다. 의료인의 눈으로 돌아왔다.

“마마께서 말씀하시는 강한 약재란.”

“이를테면…… 민간에서 효험이 있다는 녹용의 심혈, 혹은 장뇌삼 같은.”

채연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녹용 심혈은 열성을 띠므로, 허증에 사용해야 합니다. 세자 저하께서 지금 보이신 증상은 독성으로 인한 경련과 마비였습니다. 열성 약재를 추가하면 오히려…….”

“그럼 무엇을 쓰라는 말이냐!”

중전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손수건을 쥔 손이 떨렸다.

“본궁은 아무것도 모른다! 의원들은 입을 모아 체질 탓이라 하고, 네놈은 독초 의심을 했다가 묵살당했다 하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채연이 허리를 숙였다.

“마마.”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약재는 더하는 것보다 지금 쓰인 것을 검증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오늘 아침 백부자 통을 다시 살폈습니다만…… 이미 증거는 사라진 뒤였습니다.”

중전의 눈이 흔들렸다.

“사라졌다고?”

“누군가 통을 정리했습니다.”

중전이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그런데도…… 네가 감히…….”

목소리가 떨렸으나 위엄을 버리진 않았다.

“네가 감히 무슨 권한으로 내의원의 처방을 의심한다는 말이냐. 의녀 주제에.”

채연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정확히 알면서도 그 말은 가슴을 스쳤다.

“소인은 의학적 소견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의학적 소견.”

중전이 쓴웃음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손수건이 올이 풀릴 듯 비틀렸다.

“본궁이 원하는 것은 소견이 아니다. 세자를 살릴 방법이다.”

“그 방법을 찾으려면 먼저 탕약의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중전의 시선이 채연을 뚫어지게 보았다. 몇 호흡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너는…… 무섭지 않으냐.”

“……무엇이 말씀입니까.”

“이 궁궐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자는 대개 오래 살지 못한다. 너도 알고 있을 터인데.”

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대답이었다.

중전이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물러가라.”

“마마.”

“오늘은 이것으로 됐다. 물러가라.”

채연이 허리를 굽혔다.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순간, 중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세자의 탕약을 지키는 일…… 네가 신경 써라. 그것이 본궁의 부탁이다.”

부탁이라는 말이었다. 명이 아니라.

채연이 돌아서서 다시 한 번 예를 갖췄다.

“명심하겠습니다.”

약방으로 돌아오는 회랑에서 햇살이 눈부셨다. 채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약침 자국을 떠올렸다.

여러 개의 자국. 오래된 것과 새것이 섞인 점들. 약침은 민간에서 통증 완화나 진정 용도로 사용되지만, 궁중에서는 공식 처방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의녀들이 알 정도로 흔한 시술도 아니었다.

중전이 직접 약침을 맞을 이유가 있을까.

세자의 병환 후 불안이 심해졌다면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그 자국들은 최근 수년 사이에 걸쳐 누적된 흔적처럼 보였다.

채연은 품속의 어머니 수기를 만졌다. 걸음을 재촉했다.

약방 문을 열었다. 단영이 약사발을 닦다가 고개를 돌렸다.

“언니! 괜찮았어?”

“약장 정리됐나.”

“응, 백부자 통은 따로 빼뒀어. 근데 중전 마마께서 뭐라…….”

“단영.”

채연이 단영의 앞에 섰다. 목소리가 조용했다.

“약침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줘.”

단영이 눈을 깜빡였다.

“약침? 갑자기 왜?”

“중전 마마 손목에 자국이 있었다.”

단영의 눈이 커졌다.

“마마께서 약침을……?”

“자국을 봤다. 작은 붉은 점이 여러 개.”

단영이 약사발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민간에서 쓰는 약침 중에…… 심신 불안이나 불면에 놓는 게 있어. 산조인 달인 물을 침에 찔러 쓰는 거. 통증엔 오수유나 작약도 쓰고.”

“누구에게 배웠지.”

“고향에서 침의원 보조하던 할머니가 쓰셨어. 근데 궁중에서는 못 쓰게 하잖아.”

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영이 손가락으로 턱을 짚었다.

“근데 마마께서 그걸 왜? 어의원에서 처방해줄 리 없을 텐데.”

“그렇지.”

채연이 짧게 답했다.

“더 있어? 피부에 변색이 오는 경우라든가.”

단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오래 맞으면 주사 맞은 자리가 갈색으로 변한다곤 들었어. 근데 나도 확실한 건 몰라.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뿐.”

채연은 품에서 수기를 꺼냈다. 단영이 눈을 반짝였다.

“그 수기…… 언니 엄마 거지?”

“응.”

“거기 약침 얘기도 있어?”

“……찾아봐야 안다.”

채연은 약방 구석의 작은 탁자로 걸어갔다. 단영이 뒤에서 말을 붙였다.

“언니.”

“……?”

“중전 마마…… 상태가 심각해?”

채연은 수기를 펼치며 손을 멈췄다. 돌아보진 않았다.

“아직 모른다. 다만 불안이 오래됐고…… 약침 자국도 오래됐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어?”

채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단영의 눈빛은 진지했다.

“네가 알려준 민간 약침 지식은 도움이 됐다.”

단영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진짜?”

“응. 추가로 찾아볼 게 있으면 다시 묻겠다.”

“언제든! 내가 아는 건 다 말할게.”

단영은 약사발을 다시 집어 들었다. 발걸음이 가벼워져 있었다.

채연은 탁자 앞에 앉았다. 어머니의 수기를 펼쳤다.

손때 묻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약재 감별법, 독초 해독 처방, 금기 배합…… 기록들은 빼곡했으나 약침 관련 내용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페이지를 거꾸로 넘겨가던 손이 멈췄다.

중전의 증상과 무관한 다른 기록 조각이었다. 수기의 아래쪽 구석. 어머니가 옅은 먹으로 빼곡히 적은 메모.

계유년 겨울, 내명부 모 상궁. 양 완관절 주위에 다발성 흑자반 발생. 약침 과용 의심. 어의원 기록에는 단순 담음증으로 처리됨. 원인 미상의 경련 동반.

채연의 시선이 멈췄다.

흑자반. 약침 과용. 경련 동반.

손가락이 기록을 짚었다. 중전의 손목에 있던 붉은 점들이 떠올랐다. 아직 검은색은 아니었지만, 지속적으로 약침을 맞는다면 결국 어머니의 기록과 같은 상태에 이를지 몰랐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이미 십여 년 전에 이 증상을 기록해두었고, 어의원은 그것을 단순 담음증으로 처리했으며, 그 상궁은 경련 증세까지 보였다는 사실.

채연은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기록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종이의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단영이 약장 정리를 마치고 돌아섰다.

“언니, 무슨 기록이야?”

채연은 수기를 덮었다.

“과거 의안 일부야.”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품 속으로 다시 넣는 손이 평소보다 천천히 움직였다.

청연재비록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