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청연재비록

7화

촛불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채연은 들었다. 옥이 옥에 부딪히는 맑은 울림. 서고 문을 등 뒤에서 닫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린 그 소리는, 한 번으로 그쳤다.

동패가 저고리 안쪽에서 여전히 차가웠다.

채연은 복도로 나서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바깥은 다시 고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공기는 움직였다. 누군가 지나간 자리의 미세한 기류가 촛불을 스치지 않고도 피부에 닿았다.

누군가 들었다.

채연은 입술을 다물었다. 세자 이현이 탁자 위의 약서를 덮는 소리가 뒤에서 났다. 그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그것이 답이었다.

“늦었소. 돌아가시오.”

이현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채연이 고개를 숙였다.

“내일, 약방 서고에서 보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촛불이 반쯤 줄어든 복도 끝, 바닥에 옅은 발자국 하나. 흙먼지가 묻은 여성용 당혜 자국이었다. 내명부의 것이다.

채연은 발자국을 밟지 않고 옆으로 걸었다. 저고리 안쪽의 동패가 걸을 때마다 갈비뼈를 눌렀다.

이른 아침. 의녀 처소 문이 두드려졌다. 두 번. 짧고 부드러웠다.

채연은 약재 감별 일지를 덮고 일어났다. 밤새 잠들지 못한 눈이 따끔거렸다. 손으로 눈가를 누르며 문을 열자, 주상궁 인혜가 서 있었다. 인혜의 등 뒤로는 동녘 하늘이 채 밝아오지 않은 짙푸른 빛.

“이른 시각에 실례를 무릅썼소.”

인혜가 소매를 가지런히 모으며 말했다.

“들어가도 되겠소.”

묻는 형식이었으나 명령에 가까웠다. 채연이 옆으로 물러서자 인혜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백옥 가락지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은은하게 빛났다.

인혜의 시선이 방 안을 훑었다. 탁자 위에 펼쳐진 감별 일지. 그 옆에 쌓인 약초 견본들. 반쯤 남은 찻잔. 그리고 베갯머리에 놓인 낡은 수기 한 권.

인혜가 수기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입을 열었다.

“세자 전하께서 네게만 전하라 하신 물건이 있소.”

소매 안에서 종이 두루마리가 나왔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방 안에 번졌다.

“전하의 투약 일지 사본이오. 태어나신 날부터 아홉 살까지, 동궁에서 기록한 전량이오.”

채연의 손가락이 살짝 오므라들었다.

“전하께서 직접 필사하셨소. 하룻밤 사이에.”

인혜의 입술이 닫혔다.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종이 위를 한 번 쓸었다.

“전하께서 이걸 베껴 쓰시며 하신 말씀이 있소. ‘채연이 아니면 읽을 자가 없다’고.”

채연은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종이는 습기를 약간 머금고 있었다. 밤새 필사한 잉크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전하께서 왜 이걸.”

“네게 묻지 말라 하셨소. 그저 읽으라 하셨소.”

인혜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채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만 한 가지. 이 사본의 존재를 아는 것은 전하와 나, 그리고 너뿐이오.”

백옥 가락지가 돌았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인혜가 말을 이었다.

“허 어의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시오.”

“그걸 왜 주상궁께서.”

“전하께서 내게 맡기셨소. 내게 맡긴 것을 내가 네게 전할 뿐.”

인혜가 손을 들어 채연의 말을 막았다.

“이유를 묻지 마시오. 나도 모르오.”

거짓말이었다. 인혜의 눈빛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러나 채연은 묻지 않았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인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 쪽으로 두 걸음 걷다 멈추었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네 방은 앞으로 더 춥겠구나.”

채연이 대답하기 전에 인혜의 당의 자락이 문 밖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완전히 사라지자, 채연은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탁자 위에 두 권이 나란히 놓였다. 왼쪽은 어머니의 수기. 오른쪽은 세자의 투약 일지 사본.

채연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손가락이 먼저 수기를 펼쳤다. 낡은 종이. 수십 년 전의 잉크 냄새. 검지가 익숙한 글씨를 따라 내려갔다.

‘독초 오용례 제삼. 보태음(保胎飮) 변방.’

채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보태음. 어머니가 기록한 이 처방은 임신 중 태아를 보호하는 보약이었다. 그러나 수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보태음 방제 중 천오두(川烏頭)는 본초 기재 효능과 달리 다투면 경락을 손상시킴. 임부에겐 더욱 위험하니, 태중 독성 축적으로 태아 경락이 위축될 우려 있음. 변방 약방들 사이에선 금기 중의 금기라 칭하나, 어의원은 이를 부인함.’

채연이 숨을 들이쉬었다. 천오두.

천오두는 궁중 처방에서 원칙적으로 금지된 약재였다. 독성이 강해 경련과 호흡 마비를 일으킨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록에 따르면, 보태음이라는 처방에 천오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태아에게 축적되면 경락이 위축된다.

세자 이현의 선천적 허약. 경락 쇠약. 사지 냉증.

채연이 투약 일지 사본을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세자 출생 전 여섯 달. 모후 중전 민씨의 처방 기록.

‘신미년 시월 초이튿날. 중전 마마 보태음 조제. 약재: 당귀, 천궁, 숙지황, 황기…….’

채연의 손가락이 한 글자에서 멈췄다.

‘천오두(川烏頭).’

분명히 적혀 있었다. 정제 천오두 가루, 이 푼.

기록은 계속되었다. 신미년 시월 초닷새, 같은 처방. 시월 초아흐레, 같은 처방. 시월 열나흗날, 열이레, 스무날…….

채연은 페이지를 넘겼다. 처방은 중전이 세자를 출산하기 직전까지 거의 매일 반복되었다. 천오두는 매번 포함되어 있었고, 용량은 일정했다.

어머니의 수기에 적힌 경고. ‘임부에겐 더욱 위험하니, 태중 독성 축적으로 태아 경락이 위축될 우려 있음.’

세자의 투약 일지 사본. 중전이 임신 중 매일 복용한 보태음. 그 안에 든 천오두.

채연이 두 권을 번갈아 보았다. 수기의 경고와 일지의 처방이 정확히 겹쳤다. 어머니는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기록했다. 그리고…….

채연이 페이지를 더 넘겼다. 투약 일지의 날짜가 이어졌다. 그런데 열하룻날과 열나흗날 사이. 열이틀과 열사흘의 기록이 없었다.

찢겨 있었다.

채연이 페이지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종이가 날카롭게 절단된 면이 만져졌다. 가위나 칼로 한 번에 자른 흔적. 오래된 절단면이었다. 찢긴 지 최소 십 년 이상.

누군가 이틀분의 기록을 의도적으로 제거했다.

채연이 손을 거두었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왼쪽 손목을 쥐었다. 맥박이 빨랐다.

찢긴 페이지. 두 가지 가능성. 그 이틀 동안 천오두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없앤 것. 아니면, 더 많은 용량이 사용되었다는 증거를 없앤 것.

어느 쪽이든 누군가 은폐했다.

채연이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수기 속 또 다른 기록이 떠올랐다. ‘내의원 의안 제47책, 동궁 관련 기록에서 동일 증상 건 누락 확인. 원본 대조 결과 해당 면이 절취됨.’

어머니도 발견했다. 의안이 잘려나간 것을. 그리고 지금, 세자의 투약 일지에서도 같은 흔적이 나타났다.

같은 패턴. 같은 수법. 같은 누군가.

소의 한씨의 처소는 향으로 가득했다. 사향과 용뇌, 정향과 백단향, 그리고 미상의 다섯 번째 향. 오향약재의 냄새가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한씨는 화문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손에는 향낭. 손가락이 매듭을 풀었다 묶었다 반복하고 있었다. 오른손 약지손톱 안쪽의 검은빛이 촛불에 반사될 때마다 희미하게 빛났다.

“들어오라.”

문이 열리고 하급 의녀 하나가 들어왔다. 스물 안팎. 가냘픈 체구에 긴장한 어깨. 보향이었다.

“마마, 부르셨다 하여 왔습니다.”

보향이 바닥에 엎드렸다. 한씨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향낭 매듭만 계속해서 풀었다 묶었다. 보향의 어깨가 점점 더 굳어졌다.

“요즘 약방은 시끄럽더구나.”

한씨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마치 졸린 듯한 어조.

“네. 허 어의의 감찰도 있었고…….”

“그딴 건 알 바 아니고.”

한씨가 손을 들어 보향의 말을 잘랐다.

“의녀 채연. 요즘 뭘 하고 있느냐.”

보향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조제와 감별 업무를…….”

“보향아.”

한씨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교태 있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네가 나를 만만히 보는 것이냐. 아니면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마마.”

“그럼 똑바로 말하거라. 채연이 요즘 무얼 기록하고, 누굴 만나고, 어디를 드나드는지.”

보향이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지난밤…… 평소보다 늦게까지 처소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기록을 작성하는 듯했고…….”

“무슨 기록.”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한씨의 손가락이 향낭 매듭을 한 번 탁 잡아당겼다. 실이 팽팽해졌다.

“네가 약방에서 일한 지 몇 년이냐.”

“사, 사 년입니다.”

“사 년이면 채연의 동선쯤은 눈 감고도 알 만하지 않으냐.”

“압니다. 다만…… 최근에는 상급 의관의 감시가 심해져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감시라.”

한씨가 향낭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규칙적이고 느리게.

“그 감시를 이용하거라.”

“무슨 말씀이신지.”

“의관들의 눈이 많아졌다면, 오히려 좋지 않으냐. 누군가 채연의 작업을 실수로 망가뜨리거나…….”

한씨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눈에는 닿지 않는 미소.

“또는 기록이 우연히 뒤바뀌거나.”

보향이 눈을 내리깔았다. 손등에 땀이 솟았다.

“마마, 그건…….”

“네 오라비가 지금 어디 있더냐. 전라도 광주였나.”

보향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직 장액(臟腋)이 낫지 않아 사경을 헤맨다고 들었다. 안타까운 일이지.”

한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른했다. 마치 날씨를 이야기하듯.

“내가 아는 어의 하나가 있느니라. 장액에 조예가 깊은 분이지. 네 오라비를 진료하게 할 수도 있고…….”

한씨가 말을 끊었다. 향낭을 다시 집어 들고 매듭을 천천히 비볐다.

“아니면, 못 하게 할 수도 있고.”

보향의 손이 바닥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이해했느냐.”

“……네, 마마.”

“똑똑하구나.”

한씨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눈에도 닿는 미소. 차갑고 날카로운.

“오늘부터 채연의 동선을 매일 보고하거라. 특히 그녀가 기록을 만지거나, 약방을 벗어나거나, 누군가와 만나거든.”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씨가 손가락을 하나 더 세웠다.

“네가 할 수 있다면, 채연이 뭘 하고 있는지 지금보다 더 가까이에서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지. 그녀가 믿는 사람 곁에.”

보향이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제가…… 채연 언니에게 접근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접근은 네가 이미 하고 있지 않느냐. 다만 더 가까이.”

한씨가 소매를 털며 일어났다.

“가거라. 소식 기다리마.”

보향이 엎드린 채 뒷걸음질 쳤다. 문이 닫히자 한씨는 다시 향낭을 집어 들었다. 매듭을 한 번 더 비볐다. 실이 끊어졌다.

향낭 안에서 거무스름한 가루가 조금 바닥에 떨어졌다. 한씨는 내려다보지도 않고 발로 쓸어 치마 밑으로 감췄다.

“한 번 물린 교훈으로는 모자랐나 보군.”

한씨가 중얼거렸다. 촛불이 향 냄새 속에서 가늘게 떨렸다.

밤이 깊었다.

채연은 탁자 위의 감별 일지를 덮었다. 투약 일지 사본과 어머니 수기는 이미 약재함 아래 은닉했다. 동패는 여전히 저고리 안쪽에 있었다.

찻잔을 집어 들었다. 식은 차가 목을 넘어갔다.

탁자 위에 감별 일지가 놓여 있었다. 아침에 덮어둔 그대로. 그런데.

채연의 손이 찻잔을 내려놓다 멈췄다.

일지의 각도가 달랐다. 탁자 모서리와 나란하게 정렬해 두었으나, 지금은 약간 틀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미세하게.

채연이 천천히 일어났다. 시선이 방 안을 훑었다.

베갯머리의 흔적. 누군가 앉았다 일어난 자국. 약간 눌린 요의 주름. 인혜가 앉았을 때와는 다른 위치. 그녀는 의자에만 앉았다.

채연이 약재함을 살폈다. 은닉한 수기와 사본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약재함 뚜껑의 먼지가 한쪽만 살짝 쓸려 있었다.

누군가 들어왔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러나 확인했다.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채연이 숨을 죽였다. 귀를 기울였다. 바깥 복도는 고요.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청연재비록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