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재비록
8화
채연은 숨을 죽였다.
등잔불 하나뿐인 방 안. 그림자가 벽에 길게 누웠다. 귀를 기울였다.
복도 너머, 바람 소리도 없다.
발소리도,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그러나 누군가 다녀갔다. 확실했다. 요의 주름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인혜가 앉았던 의자 쪽이 아니라, 베갯머리 가까이. 그곳은 아무도 앉지 않는 자리였다.
채연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선이 약재함으로 갔다.
뚜껑의 먼지. 한쪽 가장자리만 닦여 있었다. 손가락 두 개 너비만큼. 안쪽 물건을 살피려면 그렇게 잡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수기와 사본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누군가 이 방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했다. 가져가지 않았다. 그것이 더 신경 쓰였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아침이 왔다. 빛이 창호지 너머로 번졌다.
채연은 평소보다 일찍 약방으로 향했다. 복도에는 벌써 약 달이는 냄새가 감돌았다.
약방 문을 열자 안쪽에 인기척이 있었다.
“언니.”
은솔이었다. 하급 의녀로 침전과 약방을 오가는 심부름을 주로 맡는, 스물한 살의 의녀. 채연과는 입궐 동기였지만 평소에는 말을 섞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은솔이 아침 일찍 약방 구석에 서 있었다. 손에 작은 보자기를 쥔 채.
“일찍 왔군.”
채연이 약연 앞으로 걸어갔다. 은솔이 따라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언니께 여쭐 게 있어서요.”
보자기를 약연 위에 조심스럽게 펼쳤다. 안에는 검은 껍질의 뿌리 약재가 두어 조각 놓여 있었다.
“이거…… 자초뿌리인데요.”
은솔이 목소리를 낮췄다.
“세자 저하 보약에 들어갈 거라, 감별 부탁드리려고요.”
채연의 시선이 약재에 닿았다. 뿌리의 단면이 검붉었다. 겉껍질은 얇고 광택이 없었다.
“어디서 난 것이지.”
“그게…… 밖에서 들여온 건데, 아직 약방 출납부에는 안 올렸어요.”
은솔이 채연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당번이 너무 바빠서…… 그래도 귀한 약재니까 먼저 감별만.”
채연이 뿌리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단면을 만졌다. 약간 끈적이는 질감. 코에 가져가자 퀴퀴한 흙내 속에 묘한 매운기가 섞여 있었다.
머릿속에서 어머니 수기의 구절이 떠올랐다.
‘민간약 자초뿌리, 유사품 주의. 진짜는 단면이 분홍빛을 띠고 냄새에 매운맛이 없다. 검은 단면에 미끈거리는 것은 독성 함유 가능. 복용 시 설사와 구토. 장기 복용하면 간 손상.’
채연이 뿌리를 도로 보자기 위에 놓았다. 손끝을 소매로 닦았다.
이런 약재가 세자 보약에 들어갈 리 없다. 동궁 처방에 자초뿌리 자체가 포함된 적도 없었다.
“잘못 알았군.”
“……네?”
“세자 저하 보약 처방에 자초뿌리는 쓰이지 않는다. 설사 쓰인다 해도 이 물건은 아니다.”
은솔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단면의 색과 질감. 이것은 복용해서는 안 될 종류다.”
채연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은솔을 바라보는 눈빛만 한층 차가웠다.
은솔이 입술을 떨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확실하지 않으면 입에 올리지 않는다.”
채연이 보자기를 다시 싸서 은솔 쪽으로 밀었다.
“약연에 반납하게. 출납부에 기재되지 않은 약재가 약방에 있는 것 자체가 문제다.”
은솔이 보자기를 움켜쥐었다. 손끝이 희었다. 잠시 입을 열었다 닫았다.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발걸음이 아까보다 빨랐다.
채연은 은솔이 약방 문을 나설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서야 약연 위의 찻잔을 집어 들었다.
은솔은 자초뿌리가 독성인 줄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가져왔을까.
누군가 시켰다면. 누구를 위해.
식은 차가 목을 넘어갔다. 채연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각을 지웠다. 약재 반납 여부는 나중에 확인하면 된다. 지금은 다른 일이 있었다.
동궁 내전.
이현은 앉은 채로 붓을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는 산적한 주본들. 그러나 눈은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내관 하나가 조용히 들어왔다. 동궁 침전의 최측근, 윤 내관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저하.”
이현이 손짓했다. 윤 내관이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이현의 입술이 귀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움직였다. 목소리는 종이를 살짝 스치는 정도였다.
“의녀 채연에게 전하라. 모후의 임신 중 투약 의안. 보태음이라 이름 붙은 처방의 원본을 의안고에서 찾아보라고.”
윤 내관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의안고는 어의원 기록 보관소입니다. 의녀 신분으로는……”
“동패를 가지고 있다.”
이현이 고개를 약간 들었다.
“내가 건넨 출입패다. 열람 제한이 걸린 서가가 아니라면 접근은 가능하다.”
“하오나, 의안고 관리 의관의 눈이 있습니다. 목록 열람조차 이유를 대야 합니다.”
이현이 잠시 침묵했다. 손가락이 주본 한 장의 모서리를 접었다 폈다.
“사유를 만들 방법은 그녀가 찾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이 전언은 네 귀와 그녀의 귀만이 듣는다. 타인에게는 어떤 경로로도 흘려서는 안 된다.”
“명을 받듭니다.”
윤 내관이 물러났다. 이현은 다시 붓을 집어 들었다. 허나 먹을 찍지 않고 그대로 멈춰 있었다. 손끝이 붓대를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모후.
기억 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얼굴. 어렸을 때는 그리움이었지만, 나이 들면서 의문으로 바뀌었다. 왜 하필 자신만 이렇게 태어나야 했는지.
답을 줄 수 있는 건, 아마 의안고의 먼지 쌓인 기록들뿐일 터였다.
채연은 약방 서고로 가는 길이었다.
은솔과의 일 이후로 복도가 더 길게 느껴졌다.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시선이 따라붙는 듯했다.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채연의 감각이 예민해진 탓이었다.
서고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려던 순간이었다.
“의녀 채연.”
옆쪽 복도에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낮고 신중한 목소리. 윤 내관이었다.
“동궁의 전언을 전하러 왔습니다.”
채연이 고개를 돌렸다. 윤 내관은 벽 쪽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변을 살폈다. 복도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그래도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세자 저하의 분부. 모후의 임신 중 투약 의안, 그중에서도 보태음 처방의 원본 기록을 의안고에서 찾아 분석해 달라 하십니다.”
채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보태음.”
투약 일지 사본에서 본 그 이름이었다. 기록 이틀분이 찢겨 있던 그날의 처방. 어머니의 수기에도 등장했던 독초 오용 의심 처방.
“세자 저하께서 왜……”
“그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윤 내관이 고개를 저었다. 손을 내밀어 작은 죽간 하나를 건넸다. 죽간에는 동궁 인장이 찍혀 있었다. 공식 문서는 아니었지만, 세자의 의지를 증명하는 데는 충분했다.
“다만 말씀하셨습니다. 의녀 채연이라면 반드시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채연이 죽간을 받아 들었다. 겉면의 인장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확실한 붉은 색이었다.
“의안고 관리 의관이 있습니다.”
“열람 제한 서가가 아니라면 동패로 접근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 물을 겁니다. 무엇을 찾느냐고.”
윤 내관이 답하지 않았다. 채연이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사유는 만들면 된다.”
눈을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전하께 아뢰어라. 의녀 채연, 명을 받들겠다고.”
윤 내관이 허리를 굽혔다. 두 걸음 물러나 조용히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채연은 죽간을 저고리 안쪽에 넣었다. 동패 옆에 나란히. 심장 쪽에 두 물건의 무게가 포개졌다.
보태음. 어머니 수기에 적힌 그 처방. 이제는 세자가 직접 찾으라고 명한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이 일은 이미 어머니 세대에서 시작됐다. 채연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서고로 향하는 발걸음이 다시 시작됐다.
해가 기울었다. 약방 일과를 마친 채연은 처소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허리춤의 약봉투를 풀었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은솔의 자초뿌리. 누군가의 의도.
동궁의 전언. 의안고 조사.
누군가 다녀간 방.
모든 것이 느슨하게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아직 한 줄로 꿰어지지 않은 실들.
노크 소리가 났다. 가볍고 빠른 두 번.
“언니.”
단영의 목소리였다. 채연이 문을 열자 단영이 작은 보퉁이를 안고 들어왔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할 말이 있어.”
채연이 자리를 내주었다. 단영은 좌정하고서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보퉁이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만 움직였다.
“언니…… 수기에 적힌 민간 감별법.”
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사실……”
단영이 보퉁이 끈을 풀었다. 안에서 낡은 종이 묶음이 나왔다. 손때가 묻고 가장자리가 닳은, 오래된 필사본이었다.
“우리 할머니한테서 배운 거라고 했지? 할머니가 그걸 어디서 아셨는지 알아?”
보퉁이를 채연 쪽으로 밀었다. 채연이 첫 장을 펼쳤다. 거친 종이 위에 약초 도해와 설명이 빼곡했다.
글씨체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용은 놀라웠다. 어머니 수기에 적힌 감별법과 거의 같은 사례들이, 더 오래된 종이에 다른 체로 적혀 있었다.
“이게 뭐지.”
“민간 의술서야. 궁중에서는 금서야, 언니.”
단영이 숨을 들이켰다.
“민간 약재 감별법과 독초 해독법을 모은 책. 원래 내려오던 건데, 할머니가 약방에서 일하실 때 몰래 필사하셨대. 들키면 안 되는 거니까.”
채연의 손이 멈췄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어머니 수기와 이 기록을 대조해 보면……”
“응. 언니 어머니도 이 책을 보셨을지도 몰라.”
단영의 눈이 진지하게 빛났다. 평소와 달리 장난기라곤 없었다.
“그런데 왜 이제야.”
“언니가 지금 뭘 조사하는지 아니까. 보태음이며, 천오두며…… 그 약재들, 이 책에도 다 있어.”
단영이 채연의 손을 덮었다.
“같이 보자. 나도 이제 겁먹고 숨고 싶지 않아.”
채연이 고개를 들었다. 단영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무릎 위 주먹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네게도 위험한 일이다.”
“알아. 언니 동태만 봐도 알아.”
단영이 힘주어 말했다.
“누군가 언니 방도 뒤졌다며. 이대로 혼자 끌려가면 어떡하려고.”
채연이 책장을 천천히 덮었다. 손바닥 아래 낡은 종이의 온기가 스몄다. 어머니의 수기와 이 책. 두 개의 금서가 한 방에 있었다.
“고맙다.”
짧은 한마디뿐이었다. 단영이 작게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내일 동 틀 무렵 의안고에 가자.”
채연이 조용히 말했다. 등잔불이 가늘게 흔들렸다. 노트 속 약초 도해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낯선 풀잎의 윤곽선이 깜박이는 불빛 아래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