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들리지 않는 진심

10화

법원을 나와 버스에 올랐다. 창가에 기댄 채로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바지 뒷주머니에 밀어 넣은 봉투. 제출하지 못한 서류. 유재현을 보자마자 돌아섰던 그 걸음.

버스가 목공소 앞 정류장을 지날 때 몸을 일으켰다. 하차 벨을 눌렀다.

목공소 셔터는 반쯤 내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없었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 작업대 앞에 앉아 있을 텐데. 휴대폰을 꺼내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집에 계세요?

답장은 오지 않았다. 골목을 걸어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 앞에 서서 초인종 대신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렸다. 저 깊은 곳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잠시 후 이순자가 문을 열었다. 눈이 살짝 커졌다. 곧 환한 미소로 바뀌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손놀림이 평소보다 빨랐다. 빨래를 널다 말고 나온 듯 손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잠깐 들렀어요.”

들어와. 차 마실래? 보리차 새로 끓였는데.

거실 소파에 앉았다. 창가에는 서명근이 손질하다 만 나무 조각이 놓여 있었다. 사포질이 중간에 멈춰 있었다. 아버지는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사람이었다.

이순자가 보리차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잔이 탁자에 닿는 진동이 손끝에 전해졌다. 찻잔을 한 모금 마셨다. 따뜻했다.

“엄마.”

이순자가 나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오늘 법원에 오셨어요.”

찻잔을 따르던 손이 멈췄다. 이순자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왜 거길?

“모르겠어요. 서류를 들고 계셨는데… 제출하지 않고 가셨어요.”

이순자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손가락이 찻잔 손잡이를 감쌌다.

“변호사 보자마자 도망치듯 나가셨어요.”

무슨 변호사?

눈썹이 올라갔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게 손목시계의 진동처럼 느껴졌다.

“유재현이었어요.”

이순자의 손이 찻잔에서 떨어졌다. 찻잔이 식탁 위에서 미세하게 기울었다. 바로 세우지 않았다.

그 사람이… 변호사가 됐구나.

“아버지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십 년 전에.”

이순자가 찻잔을 바로 세웠다. 손으로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찻물을 따르는 동작만 반복했다. 이미 가득 찬 잔에.

지난 일이다. 다.

“그게 끝이에요?”

그래. 묵은 얘기야.

손목이 너무 빨리 움직였다. 수어가 평소보다 작았다. 어깨가 약간 움츠러들었다. 거짓말할 때 보이는 습관이었다. 딸이라는 걸 잊은 듯한 태도였다.

“아버지는 왜 변호사만 보면 도망가시죠.”

이순자가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말하지 않았다.

다 지난 일이란다.

목소리가 없는 수어였다. 입술만 달싹였다. 내가 통역하지 않았다. 통역할 말이 아니었다.

찻잔을 바라봤다. 보리차 표면에 창밖 나뭇가지 그림자가 흔들렸다. 손끝으로 찻잔을 감쌌다. 따뜻해야 할 온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엄마가 말하지 않는 것 자체가 답이네요.”

이순자의 손이 무릎 위에서 움찔했다.

이언아.

“아버지랑 상의하신 거죠. 나한테 말하지 않기로.”

이순자의 입술이 달싹였다. 말이 없었다. 수어도 없었다. 그 침묵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찻잔은 거의 그대로였다.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다.

어디 가니?

“집에요. 내일 일찍 법원이에요.”

가방을 들었다. 현관으로 걸어갔다. 이순자가 따라오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돌아봤다. 이순자는 식탁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그래.

“서류가 뭔지 아세요? 아버지가 제출하려던 거.”

이순자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눈빛이 먼저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음에 올게요.”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문이 닫혔다.

신발소리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이순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식탁에 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보리차 잔이 보였다. 서이언이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 이순자의 어깨가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대로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나뭇가지 그림자가 마루 위를 가로질렀다.

오후 햇살이 법무법인 유현의 유리 외벽을 뚫고 들어왔다. 정유진은 자신의 자리에서 노트북 화면을 내리고 책상 위 서류 더미로 손을 뻗었다.

우상일 사건 파일의 색인이 붙은 박스가 옆자리 캐비닛 위에 놓여 있었다. 오전에 맹주원 사무관이 보내온 추가 자료 목록이 메일에 첨부되어 있었다.

…근무일지 원본 대조본 포함, 사업장 소음 측정 기록 6개월 치…

하나씩 넘기던 정유진의 손이 멈췄다. 박스 맨 아래, 우상일 사건보다 앞서 닫힌 파일들 사이에 얇은 바인더가 끼워져 있었다. 표지에는 '사건 선정 검토 목록'이라고 인쇄된 라벨. 유재현의 서명이 오른쪽 아래에 있었다.

바인더를 꺼내 펼쳤다. 날짜순으로 정리된 사건 목록. 사건명 옆에 간략한 키워드. 제일 왼쪽 여백에 유재현의 필체로 뭔가 표시되어 있었다.

대부분 깨끗했다. 하지만 몇몇 사건들만 작은 별표가 연필로 그려져 있었다. 수어 통역 관련 사건이었다.

정유진은 손가락으로 별표를 하나씩 짚으며 세어봤다. 일곱 개. 전부 청각장애인 당사자가 포함된 사건.

통역사 배정 기록이 뒤에 첨부되어 있었다. 통역사 이름은 전부 달랐다. 하지만 배정 방식은 같았다. '변호인 측 희망에 따라 법원 통역사 풀에서 사전 지정 요청.'

유재현이 개입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단지 이번만 서이언이라는 특정인을 찍었을 뿐.

정유진은 바인더를 덮었다가 다시 열었다. 복사기로 가져가 한 장씩 복사했다. 기계가 페이지를 삼키고 뱉어내는 소리만 사무실에 울렸다.

복사본을 반으로 접어 자신의 수첩 사이에 끼웠다. 수첩 새 페이지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패턴 확인.

볼펜 끝이 종이에 눌려 작은 점을 남겼다. 창밖으로 14층 아래 도로가 보였다. 버스 한 대가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정유진은 수첩을 덮고 서랍에 넣었다. 복사기에서 원본 바인더를 빼내 제자리에 꽂았다. 아까보다 조금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노트북 화면을 다시 올렸다. 메일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맹 사무관님, 요청하신 자료 검토 완료했습니다. 추가로…

자판 소리가 이어졌다. 오후 해가 유리창을 넘어 책상 위 별표 복사본을 절반쯤 비추고 있었다.

부모님 집에서 돌아온 현관은 조용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을 지나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위 스탠드를 켜자 방 한구석이 노란 빛에 잠겼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표지가 오래되어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의자에 앉아 수첩을 폈다.

최근 며칠 사이 빼곡히 적힌 페이지들을 천천히 넘겼다. 손끝이 종이 결을 따라 움직였다. 세 번째 장에서 멈추었다. 왼쪽 페이지에는 우상일의 증인석 행동이 기록되어 있었다.

보호구 질문 → 왼쪽 아래 시선 고정. 손속도 저하.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반복. A구역 언급 → 오른손 엄지 감싸쥠.

그 옆 페이지에는 아버지의 동요가 적혀 있었다.

유재현 발견 즉시 몸 돌림. 서류 봉투 접어 주머니에 넣음. 유리창 비친 손끝 떨림 확인.

펜을 집어 들었다.

새 페이지 상단에 네 항목을 적었다. '우상일 회피 패턴'. 그 아래 '서명근 동요'. 조금 떨어뜨려 '유재현 통역사 배정 개입'. 마지막으로 '이순자 침묵'.

네 항목 사이에 화살표를 그렸다. 우상일의 회피에서 아버지의 동요로, 통역 배정 개입에서 어머니의 침묵으로.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작은 원을 그렸다.

잠시 펜을 멈추었다.

원 안에 적었다. 십 년 전 / 작업장 사고?

글씨는 다른 기록보다 약간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스탠드 불빛이 수첩 위로 좁게 쏟아졌다. 화살표들이 서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법정에서 시작된 의문이 아버지에게 닿고, 거기서 다시 십 년 전으로 이어지는 선.

손목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렸다.

수첩을 덮지 않았다. 시선이 책상 위 휴대폰으로 옮겨갔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집어 들었다. 화면이 켜졌다. 메시지 앱을 열었다. 유재현과의 대화창은 지난 공판 때 일정 확인 메시지 이후 멈춰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 위로 현재 시각이 작게 표시되어 있었다.

입력창을 눌렀다.

내일 오후 시간 있으시면 잠깐

멈추었다. 엄지가 화면 위에 떠 있었다. 마지막 글자를 지우지 않았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가 올라갔다. '전송됨'이라는 글자가 메시지 아래에 나타났다.

1초.

엄지가 전송 취소 버튼 위로 이동했다. 길게 눌렀다. 메시지가 사라졌다. 대화창에는 '서이언이 메시지를 보냈다가 삭제했습니다'라는 작은 안내 문구만 남았다.

화면이 다시 정지되었다.

유재현은 사건 기록 파일에서 고개를 들었다.

책상 위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에 알림이 떠 있었다. 서이언의 이름. 손을 뻗어 확인하려는 순간, 두 번째 알림이 이어졌다.

서이언이 메시지를 보냈다가 삭제했습니다.

손이 멈추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알림을 눌러 대화창을 열었다. 빈 입력창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메시지 내용은 남아 있지 않았다. 보낸 시간과 삭제 알림만이 남아 있었다.

잠시 화면을 응시했다.

왼손 검지가 오른쪽 커프스 단추로 갔다. 한 번, 눌렀다 놓았다.

입력창을 눌렀다. 무언가를 치려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몇 초 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화면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방 안에는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남았다.

아무것도 쓰지 못한 대화창이 빈 채로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서이언은 어두워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탁자 위 수첩을 다시 집어 들었다. 방금 그은 화살표 옆 여백에 펜을 댔다.

내일 유재현 사무실 방문.

글씨는 여전히 작고 반듯했다. 펜 끝이 '유재현' 세 글자 위에 멈추었다. 먹물이 종이에 살짝 번질 만큼 오래 머물렀다.

그 아래로 펜을 옮겨 밑줄을 그었다.

직선 하나가 세 글자 아래에 가지런히 놓였다. 펜을 닫았다. 수첩을 덮고 스탠드를 끄자 서재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만 희미하게 책상 모서리를 비추고 있었다.

들리지 않는 진심10화